유난히 잘되는 날, 조심해야 하는 이유
조지 엘리엇에게 ‘위험할 정도로 몸 상태가 좋다’는 것은 그녀에게 때때로 발작의 전조였다. 과잉은 이처럼 특별한 능력과 고뇌, 기쁨과 고통을 동시에 낳는다. 위험하리만치 좋은 몸 상태와 병적인 특출함, 그건 기만적인 행복감이다. 그 밑에는 심연이 입을 벌리고 있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올리버 색스
유독 버거웠던 그 아사나가 수월한 날, 평소에는 시도조차 못했던 아사나에 내가 꽤 접근했을 때, ‘드디어 나에게도 이런 날이 오는구나’ 싶어서 마음이 요동친다. 요 며칠 컨디션이 안 좋아서 수련을 망설였는데 수련하길 잘했네. 선생님이 자세를 교정해 주는 핸즈온도 어찌나 따스한지, 평소에는 선생님이 가까이 오시면 ‘여기까지가 최선이에요. 건드리지 마세요’ 하던 몸이 선생님 쪽으로 마중 나가려 한다.
이러다가 요가인들의 기본 교본이라고 할 수 있는 책 <요가 디피카> 속 아헹가 선생님처럼 되어보겠다는 목표도 감히 품어본다. 오늘의 나는 얼핏 보면 요가 마스터다. 하지만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부상의 전조 혹은 컨디션이 안 좋기 직전에 겪을 수 있는 증상이다. 나는 이를 무시하고 요가를 했다가 근육이 다치기도 했고, 유난히 몸이 좋다고 느낀 이후에는 어김없이 감기나 몸살을 앓았다.
앞서 인용한 조지 엘리엇의 말처럼 ‘위험할 정도로 몸 상태가 좋다’는 것은 내 몸이 정도를 지나쳐 과하게 뭔가가 되고 있다는 신호다. 요가를 하다가 허리나 목을 삐끗한 이들부터 갈비뼈에 금이 가서 몇 달간 수련을 못 하는 이들까지 다양하게 부상을 입는 경우를 목격한다. 이렇게 하면서까지 요가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요가의 기본 목적은 육체적 건강에 있다고 보는데, 고차원적인 혹은 다른 목표를 두고 있다면 견해가 달라질 수도 있겠다.)
요가는 수련을 통해 내가 내 몸을 바라보는 일련의 행위들이다. 여기에서 스스로 몸을 본다는 게 핵심이다. 오늘의 내 몸은 어제의 나, 그저께의 나, 몇십 년 전의 나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그래서 사람마다 다르고, 내 몸도 그날그날 다르다. 무엇보다 아사나에는 완성도, 정답도 없다. 대부분의 아사나들이 기본이 있고, 단계별로 심화 과정에 접근한다. 복부와 척추를 비트는 아르다 마첸드라아사나도 1단계부터 3단계까지 있다. 나는 1단계에서 2단계로 가기까지 5년이 걸렸고, 지금도 어떤 날은 3단계까지 가는가 하면 요즘처럼 오른손잡이로서 육체노동 강도가 높은 시기에는 오른 등이 경직돼 1단계도 힘들다.
한번은 수련을 하다가 보름달이 휘영청 밝게 떠 있고, 아사나도 마음먹은 대로 내 몸이 따라줘서 의아했던 적이 있다. 그러고 보니 몇 달 연속, 우연의 일치인지 보름달이 뜬 날 수련이 특히 잘된다는 것을 체득했다. 원인은 보름달에 있었다. 몸의 70퍼센트가 수분으로 이루어진 인체는 달의 위상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태양-달-지구 순으로 위치하고 있을 때, 태양에서 달이 도착한 빛이 태양 방향으로 반사된다. 지구에서 달의 전체 모습, 즉 보름달이 보인다. 지구는 태양, 달로 인해 에너지의 영향을 받는데, 이때의 에너지는 요가에서 프라나(에너지, 호흡)의 힘이 가장 큰 때인 들숨의 끝과 일치한다고 본다. 신체 에너지가 전반적으로 상승하고 성취의 욕구가 증대한다. 그래서 이 시기의 수련은 과욕과 무리함을 유발하고 상해의 위험성에 노출될 수 있으므로 수련의 자제해야 한다. 매일 수련을 원칙으로 하는 아쉬탕기들은 보름달이 뜨는 날 수련하지 않는다.
반대로 지구-달-태양 순으로 위치해 태양에서 달에 도착한 다시 태양 방향으로 반사되는 날, 초승달이 보이는 때도 수련하지 않는다. 이때의 에너지는 날숨의 끝과 일치하기 때문에 몸이 뻣뻣해진다. 통증, 부상을 유발할 수 있어서다. 초승달과 보름달이 뜨는 날을 ‘문데이’라고 지정하고 아쉬탕가 요가원은 이날을 미리 공지하고 수련을 쉰다. 인도에서는 문데이에는 여행도 자제하고 특별한 날로 여겼다. 중세 유럽에서는 보름달이 인간의 사악함을 불러일으킨다고 봤다. 미치광이를 일컫는 영어 단어 'lunatic'의 어원은 달을 뜻하는 'luna'다. 영상 속 구미호, 늑대인간들은 꼭 보름달이 뜨는 날 변신하곤 했다. 신앙, 과학적 근거를 떠나 과거에는 자연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았기 때문에 인간의 경험치가 이렇게 나타난 게 아닌가 싶다.
요가에서는 꾸준히 하되 아사나를 대하는 어떤 순간에는 과유불급이어야 한다. 아사나를 더 깊게 하고 싶고, 수련을 통해 자신을 혹독하게 내몰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는 것, 그것 또한 필요하다. 몸이 뻗어가는 팽창하는 에너지로 휘청일 때 그 몸을 잡아줄 수 있는 힘이 내 안에 있어야 한다. 몸과 관련된 모든 행위에서, 우리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무작정 내뱉다 보면 해서는 안 되는 말도 불쑥 내뱉게 된다. 누군가가 너무 좋아서 일방적으로 향하다 보면 넘어서는 안 될 적정거리도 훌쩍 뛰어넘는다.
적당해야 한다. 요가를 할 때도, 말을 할 때도, 사람 간 관계에서도. 제어되지 못한 나의 과한 에너지는 어떤 대상에게 해를 입힐 수도 있다. 꾸준한 수련으로 나의 몸을 존중하고 서서히 깊은 단계로 나아가는 게 진실된 것이며 오래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