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오랫동안 연락 끊긴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려 해
- 소중한 사람들에게 편지보내기
외할머니 제사가 있으니 몇 시까지 삼촌네 집으로 오라는 이모의 연락을 받았다. 사실 나는 딱히 가족모임에 참석하는 편은 아니었다. 핏줄을 나눈 사이들이긴 하지만, 괜히 오랜만에 만난 어색한 사람들 사이에서 뻘쭘하게 뚝딱 거리느니 그냥 집에 편히 있는 게 나았다. 심지어 우리 집은 명절에도 친척들 집에 가질 않았으니, 나는 친척들과의 교류가 거의 단절된 상태였다.
하지만 나는 이번 제사에 참석하는 것이 이모, 삼촌들에게 그들이 엄마와 주고받았던 편지를 전할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모의 초대에 응하고서는 빛이 바래 누레진 편지 뭉텅이들을 돌려줄 사람별로 분류해 가방에 고이 집어넣었다. 제사를 가는 길이 이리도 설렜던 적은 살면서 처음이었다.
삼촌 댁에 도착하니, 아쉽게도 편지를 돌려드려야 할 모든 친척 분들이 제사에 참석하시진 못했다. 그래도 참석하셨던 몇몇 친척분들께 준비해 간 편지다발을 전해드렸다. 다행히도 내가 가져갔던 편지들로 인해 잠시동안 제사집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중학생이던 이모가 스물 초반이었던 우리 엄마에게 반성문 식으로 썼던 편지와 끝내 붙여지지 못했던 그 시절 좋아했던 가수에게 썼던 편지, 그리고 우리 엄마가 삼촌에게 용돈을 주며 썼던 편지까지….. 엄마는 자신이 받은 편지와 자신이 쓴 편지를 모두 간직하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글씨를 잘 썼구나!"
이모는 자신이 쓴 글을 읽으며 감탄했다. 그러면서 다른 친척들에게도 자신이 쓴 것을 보여주며 자랑했다. 그런 이모에게서 천진난만함이 느껴졌다. 사촌동생들은 어른들이 어릴 적 썼던 글을 보며 신기해했다. 아마 내가 처음 이 편지들을 봤을 때 느꼈던 감정과 비슷한 생경함을 느끼는 듯했다.
마지막으로, 엄마가 고등학생 때 수학여행지에서 할아버지에게 보냈던 엽서였지만, 왜인지 엄마가 계속 간직하고 있던 것을 원래 수신인인 할아버지의 손에 쥐어드렸다. 그런데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갑자기 울컥하고 말았다.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그 감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킬까 두려워 얼른 화장실로 달려가 마음을 추슬러야만 했다. 하여튼, 나는 눈물이 너무 많아 탈이다. 얼른 진정을 하고 다시 거실로 나왔는데 엽서를 다 읽으신 할아버지의 눈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 할아버지는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지만 나는 그 침묵 속에서도 할아버지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나는 콧잔등이 시큰해져 또다시 화장실로 몸을 옮겨야만 했다.
그래도 정말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에게 편지를 전달할 수 있어 마음이 따뜻해졌다. 하지만 편지를 전해드려 할 두 분이 아직 남아 있었다. 엄마의 언니인 큰 이모와 엄마의 사촌오빠인 육촌친척이었다. 나는 두 분과는 개인적인 교류가 딱히 없었고, 연락처도 아예 몰랐다. 그러나 친척들 중 나와 거의 유일하게 연락을 주고받는, 할머니 제사에 오라고 초대를 해주었던 이모가 제사 때 내 핸드백 속에 뭉터기로 들어있는 편지를 보고는 한 번 연락해 보라며 육촌친척의 번호를 알려주셨다.
나에게 이 분은 경조사 때나 간간히 뵙던 얼굴만 아는 분이었다. 그리고 내가 중학생 때 이 분이 운영하시던 영어학원을 잠시 다녔던 정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얘기를 나눠본 기억은 없었다. 그래서 이 분이 엄마가 받았던 편지들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땐 짐짓 놀랐을 정도였다. 엄마가 그 정도로 자신의 사촌오빠와 가깝게 지낸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특히 육촌친척이 고향을 떠나 대학생활을 할 때와 군대에 있을 때, 엄마와 꽤나 많은 편지를 주고받은 듯했다. 편지 내용으로 보아, 아마 두 사람은 어릴 적 같은 동네에서 자랐던 것 같았다. 이 분에게는 소포로 편지를 보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색하지만 엄마의 사촌오빠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런데 이미 이모가 먼저 얘기를 해두었는지 그분은 내가 연락을 한 이유를 알고 계신 눈치였다. 우리 사이엔 짧은 문자만이 몇 번 오고 갔다. 그분에겐 어릴 적 친하게 지냈던 사촌동생 딸과의 어색한 대화였을 것이다.
큰 이모의 연락처와 주소는 사촌언니에게 물어봤다. 언제부턴가 사촌언니와는 명절 때나 근근이 연락하는 사이가 되었다. 큰 이모네 가족들과 우리 가족은 어린 시절 여름방학만 되면 바다가 바로 코앞에 있는 외할머니댁에 모여 여름을 보내곤 했다. 다 함께 고기도 구워 먹고, 바다에서 수영도 하고, 보말도 따고, 윷놀이도 하고… 그러나 어린이들이 하나 둘 머리가 커지기 시작하면서 서로 다른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어느덧 사촌 언니들과 사촌 오빠는 어른이 되어 각자의 가정을 꾸려나갔다. 그렇게 어린 시절 우리의 추억은 조용히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래도 편지에 담긴 큰 이모와 우리 엄마의 추억만큼은 다시 돌려드리고 싶었다.
나는 달랑 예전에 쓰인 편지들만 소포로 보내기엔 예의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짧게나마 큰 이모와 육촌친척에게 편지를 썼다. 내가 그분들에게 쓴 생애 첫 편지이자,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기에 나는 최대한 글씨를 이쁘게 쓰려고 노력했다. 볼펜을 꾹꾹 눌러 글을 쓰며 내 진심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더 이상 수신인이 없게 되었으니, 이 편지들은 발신자에게 다시 돌려드리려 합니다. 이 편지들로 잠시나마 저희 엄마와의 추억을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셨으면 합니다.'
라는 문구를 마지막으로 편지를 마쳤다.
우체국을 가니 평일인데도 다른 이에게 정성과 마음을 보내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금방 산 택배봉투를 뜯고 가방에 넣어 온 편지들을 둘로 나눠 그곳에 편지들을 정갈하게 담았다. 만나지 못했던 세월만큼이나 익숙지 않은 받는 이의 주소와 전화번호가 혹여라도 잘못 쓰일까 몇 번이나 확인하고 또 확인한 후에야 순서 대기표를 뽑을 수 있었다. 그렇게 편지를 부쳤다. 드디어 오랫동안 간직해 왔던 모든 마음을 보낼 수 있어 속이 후련하고 시원했다. 하지만 동시에 편지를 발신자들에게 돌려줘버려 내가 더 이상 엄마의 추억을 읽을 수 없다는 섭섭함이 들기도 했다.
더 이상 수신인이었던 당사자가 존재하지 않아 내가 비둘기가 되어 몇십 년 만에 반송시켜 전달한 그 편지들이 부디 그분들의 추억 한 켠에 작게나마 울림을 드렸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