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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Oct 09. 2023

6. 음악은 정말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이 맞나 봐

- 의도적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음악을 듣고 부르기

나는 노래를 좋아했다. 듣는 것, 부르는 것, 심지어 연주하는 것까지. 예전에는 노래방에 가는 것도 모자라 스마트폰에 노래방 어플까지 다운로드하여 나 자신에게 심하게 도취되고 싶은 날이면 집에서 혼자 노래를 부르며 온 집안을 휘젓고는 했다.

아마도 이십 대 초반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 말곤 아무도 없던 집. 그날도 역시 노래방 어플 반주에 맞춰 내가 마치 무대에서 노래 부르는 가수라도 된 것 마냥, 오디션 프로라도 나가서 심사라도 받고 있는 냥, 혼자 노래를 부르며 놀고 있었다. 하도 노래 부르는 것에 심취하다 보니 그날도 역시 온 집안을 무대 삼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쌩쑈를 하고 있었다. 온 집안이 나만의 상상 속 무대였다. 솔로 라이브 공연이 한창일 무렵, 갑자기 현관에서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거실에 있던 난 그 소리에 당황해 허겁지겁 노래방 어플을 끄고 후다닥 내 방으로 도망갔다. 아빠였다. 가족인데 뭐 그렇게까지 숨길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겠지만, 이런 나의 적나라한 모습을 까발리기엔 나는 은근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라 방 안에서 콩닥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입을 싹 닫고 그렇게 거실로 나왔더랬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런 일도 있었다. 사실 집에서 노래 좀 해봤다 하는 사람들은 알 수도 있겠지만, 집에서 노래부르기 가장 좋은 최적의 장소는 바로 화장실이다. 화장실에서의 적당한 울림감이 나의 노래 실력을 원래보다 더 뻥 튀겨주기에 그것이 참으로 만족스러워 나는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면서 노래를 자주 불렀다. 화장실에서 노래만 불렀다 하면, 이건 완전 가수 뺨칠 만한 실력을 가진 것 마냥 어깨가 으쓱해지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날은 입을 놀리지 않고 그냥 조용히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정적을 깨고 저 멀리 어디선가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나는 집에서 이런 소리를 처음 들어봤기에 놀라서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리고 뒤이어 또 다른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너 정말 엄마 말 안 들을래?"

그 소리의 정체는 목욕을 하다 엄마에게 혼이 난 아이의 울음소리였다. 화장실에서의 말소리가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들리다니… 충격이었다. 그 말소리가 귀에 때려 박힐 정도로 너무나 잘 들려서 그 소리를 듣고 있던 나까지도 혼이 나는 기분이었다. 아파트라 소리의 출처가 정확히 어느 집이었던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안 그래도 층간소음으로 고통받고 있는 이 시대에 그동안 내가 화장실 콘서트를 해왔던 것에 대해 심히 송구스러워졌다. 화장실 안 울림의 위력을 생생히 체험하게 된 이후, 나는 더 이상 화장실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음악활동에 열성적이었던 나였건만, 생각해 보니 최근에는 딱히 목청껏 노래를 불러 본 적이 없었다. 노래방을 갔던 것도 까마득한 오래전에 있었던 일만 같다. 한동안은 딱히 노래를 부를 에너지가 없었달까? 덕분노래방 어플은 내 스마트폰의 스마트함으로 인해 어느 새부터 초절전 어플로 분류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오랜만에 계속 방치만 해두었던 노래방 어플을 살포시 눌러보았다. 그나마 가장 최근에 불렀던 노래 목록들을 살펴보니 하나같이 다들 슬프고 잔잔한 곡들이었다. 과거의 나는 나의 불면증을, 이별을, 우울을, 그리움을 주야장천 부르고 있었다.

노래에는 정말 신비한 힘이 있나 보다. 가수들도 자신의 노래 제목을 따라간다는 말이 있듯, 나 또한 부르는 노래에 따라 내 감정이며 기분이 좌지우지되어 버리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기분이 다운되어 있기에 내 상태에 어울리는 어두운 곡들을 찾게 되고, 그런 곡들을 계속해 듣고 부르다 보니 그 상태가 더욱 심화되는 악순환의 반복. 심지어 어두운 음악만을 섭렵하며 우울감에 빠져있는 내 상태에 취하기까지 했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한창 가수 '빈첸'의 <허물>이란 곡에 빠져 그의 가사말처럼 우울(blue)이라는 파란 방 안에서 벌벌 떨며 우울감이 취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나의 기분의 흐름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하는 걸까? 다행히도 이제는 신나는 곡, 밝은 곡들이 더 끌린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나의 기분을 상승시켜 주는 곡들만 들으려고 노력 중이다. 어쩌다 슬픈 노래를 듣게 되어도 예전보다는 가사에 과몰입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내가 이렇게 서서히 우울의 허물을 탈피했으면 좋겠다. 내 우울감을 증폭시키던 선봉장에 음악이 있었듯, 이제 내 삶의 희망과 밝음을 떠오르게 하는 선봉장의 역할도 음악이 나서 해주었으면 한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라 생각한다.

과거에 주로 부르던 우울의 끝을 달리게 한 애창곡들을 뒤로하고 새로운 선곡을 해보았다. 노래방 어플에서 전주가 흘러나오고 참으로 오랜만에 나의 입에서 음률이 흘러나왔다. 나를 기분 좋고 행복하게 만드는 곡이었다. 그런데

'아니 그나저나, 나 왜 이렇게 노래를 못하지?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가?'

목소리는 잠겨있고, 음정, 박자 모두 불안했다. 노래 공백기를 너무 오랫동안 가진 탓인가 보다. 나는 이 상황이 너무 당황스럽고 마음 아팠다. 그래도 나름 고등학생 땐 학교 밴드 보컬로 학교에서 공연도 하곤 했었는데… 뭐 어쩌겠나. 내가 무슨 가수도 아니고 그냥 내 엉망진창 노래실력을 어쩔 수 없이 즐기기로 했다. 고음이 안 올라가는 노래는 어플로 음정을 몇 키 낮춰주니 부르기 수월해졌다. 그리고 몇 곡을 부르다 보니 그동안 깊게 잠겨버린 목도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내친김에 나는 언제부턴가 내 관심에서 멀어져 버린 기타에 눈을 돌렸다. 그것은 늘 내 방, 내 눈길이 닿는 곳에 있었지만 꽤 오랫동안 보이지 않는 취급을 받았다. 오랜만에 기타를 손에 쥐어보았다. 뽀안 먼지들이 이곳저곳에 소복이 쌓여있었다. 물티슈로 기타를 한 번 닦아준 후 노래방 어플처럼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기타 튜닝 어플을 켰다. 기타 소리는 내가 무심했던 세월만큼이나 제멋대로 삐뚤어져 있었다. 꽤나 공을 들 나의 손길이 몇 번 거쳐진 후, 기타 줄들은 제 소리를 되찾았다. 곧이어 나는 오랜 겨울잠을 자던 기타 악보 어플을 눌렀다. 몇 간의 로딩이 이어진 후에야 들어올 수 있었던 어플 안에는 내 왼쪽 손 끝 손 끝마다 물집이 잡힐 정도로 쳐대던 노래 악보가 아직도 남아있었다. 그런데 역시나 슬픈 곡들 투성이었다. 나는 그중에서도 그나마 가사에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곡을 골라 기타 줄을 튕겨보기 시작했다. 오랜만이라 기타 코드가 가물가물했다. 몇 번의 버벅거림이 있었지만 그래도 내 손은 여전히 예전의 감각을 기억하고 있었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일이지만, 기타까지 치며 노래를 부르는 것은 나를 더욱 행복하게 만든다. 비록 내 노래 실력과 기타 실력이 그리 출중하진 않지만, 내가 음악을 함으로써 잔뜩 웅크리고 있는 나의 우울한 영혼을 위로해 주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나는 기타를 치고 노래 부르며 나 자신을 위한 음악치료를 하고 있 것이다.

나는 10대 청소년기에 예민하고 극성맞은 사춘기를 겪었고, 20대에는 우울한 오춘기를 겪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오춘기에서 헤어 나와 마음의 평온을 얻고, 나의 삶을 다시 묵묵히 걸어가기 위해 노력 중이다. 가수 '볼 빨간 사춘기'의 <나의 사춘기에게> 가사처럼 그래도 난 어쩌면 내가 이 세상에 밝은 빛이라도 될까 봐, 어쩌면 그 모진 아픔을 내딛고서라도 짧게 빛을 내볼까 봐, 나 자신을 그냥 놔버리고 포기할 수가 없다. 나는 오늘도 이렇게 음악에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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