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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Oct 09. 2023

8. 오늘은 하루종일 계단만 이용해 봐야지

- 하루종일 계단만 이용해 보기

나는 제주도 살고 있지만 치아교정을 서울에 있는 병원에서 했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은 반드시 서울에 가야만 했다. 그러나 우울증으로 대학교를 여러 번 휴학하면서 도저히 치과에 갈 엄두가 안 났다. 차를 타고 고작 몇 분 거리에 있는 학교조차 못 갔는데 서울에 있는 치과까지는 더더욱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치아교정을 계속 미루며 늦추다 보니 치과 내원만 벌써 6년째가 되었다. 이러다 보니 비행기를 타는 일이 누군가에겐 설레는 일일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언젠가부터 공항에 가는 것에는 별다른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피곤한 일일뿐. 제주도 사람이 육지에 나가려면 어쩔 수 없이 매번 비행기나 배 같은 거대한 교통편을 이용해야만 하니, 이건 섬사람의 필수불가결한 고충이라고도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나의 경우엔 딱히 여행을 목적으로 서울에 가는 것도 아니고, 당일치기로 서울에 다녀오기 위해서는 새벽부터 부랴부랴 준비를 해야 했기에 이것이 내 무감흥과 피곤함의 주된 이유가 된 것이다. 그리고 난 서울에 도착하면 하루종일 지하철을 타고, 예약에 늦지 않기 위해 분주히 걸어 다녀야만 했다. 생각만으로 해도 벌써 지치는 느낌이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오늘 하루종일 계단만 이용하고 다닐 수 있을까?'

어차피 오늘은 다리를 많이 움직여야만 하는 날이니,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예 생활 속 운동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졸린 가자미 눈을 한 채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가던 나에게서 잠시 피곤함이 사라졌다. 하도 집에만 꼭 박혀 있어 요즘 내 다리는 허벅지고 종아리고 근육이 모두 빠져 물렁물렁해진 상태였다.

'한창 열심히 운동을 하던 때에는 내 다리도 참 딴딴하고 이뻤었는데…'

되지도 않는 추억팔이를 하며 최근 다시 운동을 시작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하던 참이었다. 계단 오르기쯤은 식은 죽까지는 아니더라도, 현미밥 먹기 정도는 되지 않을까? 소화하는 게 죽보다는 어렵지만 몸에는 좋은… 어쨌든, 갑자기 오늘 해야 할 미션이 생기자 오랜만에 공항으로 가는 길이 즐거워졌다.

시내버스로 공항 앞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바로 앞에 있는 공항건물로 들어가탑승 수속을 하는 2층으로 연결된 에스컬레이터를 곧바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에스컬레이터는 계단이라 쳐도 되는 건지? 그건 반칙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비행시간이 촉박했으므로, 이 짧은 시간 동안 어딘가에 있을 계단을 찾은 건 무리였다. 계단을 이용하자고 비행기를 놓칠 수도 있는 긴박함을 느끼며 공항을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는 에스컬레이터로 직행했다. 그리고 아쉬운 마음에 에스컬레이터를 걸어 올라가 보았다. 이 이후로는 딱히 제주공항에서 계단을 이용할 기회는 없었다. 보안검색 후 내가 탈 비행기가 있는 게이트로 가기 위해 아주 짧은 계단으로 내려가야 하는 것 말고는.

김포공항에 도착하고 공항철도 지하철로 가는 길은 계단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모두 다 내려가는 계단뿐이어서 나는 그냥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했다. 계단을 내려가는 게 무릎에 좋지 않다고 들어서 나는 계단 오르기만 하고 싶었다. 내 소중한 도가니를 위해서.

계속 내리막길만 있었지만 도착지인 서울역에서는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계단이 그리 높지 않아 그냥 걸을만했다. 시시했던 첫 계단을 다 올라 개찰구를 통과해 좀 걷다 보니 다시 계단이 나왔다. 양 옆으로 에스컬레이터가 호위라도 하고 있듯, 정중앙에 떡하니 계단이 있었다. 꽤 높아 보였다. 하지만 나는 에스컬레이터를 무시하고 당당히 계단 쪽으로 향했다. 사람들로 꽉 찬 에스컬레이터와는 대조적으로 계단은 텅 비어 있었다. 휑한 그 길을 나 홀로 묵묵히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순간, 내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 나처럼 계단을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뒤를 돌아 그 사람을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뭔가 동지애 같은 것이 느껴졌다.

'어? 너도? 나도!'

그저 내 발 앞에 보이는 계단만을 바라보며 계속 걸어올라 가는데 도무지 끝이 안 보였다. 역시 지하철은 깊은 지하에 있는 대중교통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며 점점 숨이 차올랐다. 하지만 나는 힘들지 않은 척했다. 이것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그리고 행여라도 내가 뒷사람의 속도에 방해가 될까 오르는 속도를 계속 유지하려 노력했다. 드디어 계단을 모두 오르고, 숨이 차지 않은 척을 하려니 도리어 코로 거친 숨이 뿜어져 나왔다. 내 뒤쪽에서 올라오던 사람이 나를 앞질러 걸어갔다. 서울역의 그 많은 출구들 중 그 사람도 나와 같은 곳으로 나가는 건지 동선이 겹쳤다. 또다시 계단이 나왔고 이번엔 내가 그 사람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그런데 나의 앞으로 걸어 올라가던 사람이 압도적인 속도로 나와 멀어지기 시작했다.  


'어라? 이. 것. 봐. 라?'


나는 그 사람을 따라잡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내 안에서 경쟁심이 느껴졌다. 나는 정말 부정할 수 없이 한국의 경쟁 사회에 길들여진 인간인가 보다. 하지만 내 끌어 오르는 마음과는 다르게 다리는 점점 느릿해져만 갔다. 설상가상으로 내 오른쪽 발목이 쓰라리기 시작했 너무 따가웠다. 경쟁이고 나발이고, 나는 마음을 내려놓은 채 그냥 내 페이스대로 걸을 수밖에 없었다.


'저 사람은 엄청난 체력가진 계단 오르기의 고수임에 틀림없어.'


이솝우화 속 여우처럼 신포도 짓을 하며 계단을 모두 오른 나는 터질 듯 한 허벅지의 통증과 거친 숨을 겨우 참으며 사람이 없는 후미진 모서리 쪽으로 갔다. 내 앞쪽으로 지나쳐가는 행인들을 뒤로한 채 운동화를 벗어 안을 확인해 보니, 내 발목이 닿는 신발 안쪽이 다 해져있었다. 이게 말 그대로 내 발목을 잡을 줄이야! 나는 마지못해 운동화를 다시 신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오늘 계단을 오르며 다리가 아플 것은 예상했지만, 발목이 쓰라릴 것까지는 예상 밖이었다.


'신발 겉은 멀쩡한데 안이 헐었네. 이걸 버려야 돼, 말아야 돼?'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최대한 오른쪽 발목이 신발에 닿지 않도록 걸으려 노력했다. 그런데 계속 출구를 향해 걷다 보니, 이건 계단이 문제가 아니라 서울역 자체가 엄청 넓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출구로 나가는데만 한 세월이 걸렸다. 출구를 향한 마지막 계단코스를 오르고서야 드디어 나는 쓰라린 발목을 느끼며 서울역 지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치과건물에 도착해서도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했다. 엘리베이터 앞쪽에는 사람들이 몰려 있었는데 무거운 철문을 열고 들어간 비상계단에는 아무도 없었다.

치과 진료를 다 마치고, 이제는 내가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야 한다. 이번에는 변화를 좀 주고 싶어 서울역 대신 시청역으로 향했다. 역 입구에서부터 내려가는 계단의 연속이었다. 에스컬레이터도 없어서 내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한 발 한 발 사뿐히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지하철에 올랐다. 나는 홍대입구역에서 공항철도로 환승을 해야 했다. 지하도를 걸어가면서 무빙워크가 보였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기계의 도움 없이 내 두 발로 걸어보고 싶었다. 집순이인 내가 또 언제 이렇게 많이 걷을 수 있게 될지는 기약할 수 없기에, 비록 신발에 쓸린 발목은 여전히 아팠지만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걸었다. 나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양 옆의 무빙워크를 이용했기 가운데로 뻥 뚫린 길은 나를 위한 스테이지 같았다. 나는 마치 모델이라도 된 양다리를 쭉쭉 뻗어 앞으로 나아갔다. 신발이 불편해 발이 아파도 그러한 티를 내지 않는 나는 프로라는 생각으로, 남들이 나와 같은 길을 가지 않아도 나는 시크하고 당당하게 내 갈 길을 갔다. 에어팟에서 흘러나오는 신나는 곡이 내 상상에 더욱 부채질을 했다.

목적지인 김포공항역에 도착하여 지하철에서 내리고 이제부턴 오르막이다. 하지만 에스컬레이터만 보일뿐 계단은 어디에 있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에스컬레이터에서는 사람들이 오른쪽으로 서서 올라가는 게 암묵적인 룰이니, 나는 하는 수 없이 에스컬레이터의 왼쪽으로 한 칸 한 칸 발을 디뎌 올라갔다. 생 계단을 오를 때보다는 별로 힘이 들진 않았다. 발전된 문명의 맛이었다. 에스컬레이터로 2층을 걸어 올라가고 또다시 에스컬레이터가 보였다. 이것만 올라가면 김포공항이다. 그런데 순간 오른쪽에 있는 계단이 보였다. 나는 드디어 기계가 아닌 오직 내 다리 힘만으로 계단을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그리고 계단으로 직진해 힘차게 계단을 올랐다. 비교적 빠른 속도로 걸어 오르니 점점 숨이 가빠졌다.


'역시 이 정도는 헐떡여줘야, 계단 오르는 맛이지!'


솔직히 힘들었지만 쿨한 척했다. 계단을 다 오르고, 개찰구를 통과하니 또다시 무빙워크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모델놀이지.'


그 순간만큼은 내가 바로 모델 정호연이고, 신현지였다. 그리고 김포공항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만이 남았다. 왼쪽에 버젓이 있는 안락한 에스컬레이터를 두고 나는 오른쪽에 있는 계단을 택했다. 나는 에스컬레이터에 서서 위층으로 가는 사람들을 하나둘씩 제쳐 올라갔다. 이 놈의 경쟁심이 또 발동된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김포공항에 도착을 했다! 모바일 탑승권을 미리 발급받았으니 보안검색을 위해 바로 3층으로 가면 됐다. 그런데 이런, 계단을 막 올라와 숨이 찬 내 눈앞에 쉴 틈도 없이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떡하니 보였다. 하지만 고민할 새도 없이 나는 거친 숨을 간신히 참으며 그리로 나아갔다. 그리고 또다시 계단을 올랐다. 티켓팅 장소인 2층이 나왔다. 하지만 나는 그곳엔 볼일이 없었기에 바로 지나쳐 3층으로 올랐다. 쉼 없이 3층을 오르니 내가 헥헥거리는 개가 된 것 같았다. 숨이 너무 찼다. 너무 빠르게 올랐나 보다. 나는 왼쪽 편에 보이는 정수기로 가 잠시 갈증을 해소하며 휴식을 취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제주도에 도착했다. 오늘 치과에 다녀온 것 밖에 한 게 없는데 너무 피로했다. 하루종일 계단을 이용하며 다녔다고 해도 너무 극심한 피로함이었다. 발목도 너무 따끔거렸다. 이 운동화는 그냥 버려야겠다. 나는 그저 빨리 집으로 가 침대에 눕고 싶었다. 휴, 당일치기로 서울에 다녀오는 건 너무 힘든 일이다. 그런데 이 짓을 교정이 끝날 때까지 한 달마다 계속해야 한다. 몸이 지친 만큼 마음도 잠시 서글퍼졌다. 지친 몸을 겨우 이끌고 공항에서 집으로 왔다.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아파트 건물 안으로 들어갔는데, 계단…이 보였다.


'나 오늘 하루종일 정말 열심히 계단 올랐잖아, 엘리베이터 탈 자격 있잖아.'


하지만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나는 계단 쪽으로 터벅터벅 발을 옮겼다. 가면서 슬쩍 엘리베이터를 보니 고것이 마침 1층에 서있었다. 누굴 놀리는 것도 아니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내 무거운 발걸음으로 천천히 계단을 한 칸 한 칸 오르며 나는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다. 예전에 유튜브 클립으로 봤던 이효리와 이상순의 일화였다. 당시 이상순이 의자를 만들면서 남들 눈에는 잘 띄지도 않는 의자 밑바닥을 열심히 사포질 하자 이효리가 말했다.


"여긴 사람들이 안 보잖아. 누가 알겠어."


그 말에 이상순이 이렇게 대답했고 한다.


"내가 알잖아."


사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계단을 오르고 숨을 헐떡여도 남들은 나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들은 그저 각자 자신의 길을 가기에 바쁠 뿐이다. 예전에 들었던 이 말이 갑자기 떠올라서 하루종일 남을 의식하며 계단을 오르고, 괜히 혼자 남과 경쟁심에 불타올랐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나는 인적도 없는 아파트 비상계단을 홀로 걸으며 생각했다.


'나는 무엇을 위해 계단을 오르고 있는가.'


내가 이것을 하게 된 본질을 생각해 보았다. 공항으로 가던 이른 아침, 나는 오늘만큼은 하루종일 계단을 이용해 보자고 나 자신과 약속을 했다. 나는 단순히 그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약속이행을 위해 계단을 오르고 또 올랐을 뿐이다. 아무도 이것을 알아주지 않지만 딱 한 사람, 나만은 내 노고를 분명 알고 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우리 집이 있는 11층 복도에 도착했다. 나는 결국 나와의 약속을 끝까지 지켰다. 나 자신이 기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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