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이 Oct 11. 2023

10. 날도 좋은데 무작정 나가 걷기라도 해 보지 그래

- 걷기

요즘 다시 일을 하고 있다. 일하는 곳과 내가 사는 곳은 버스로 20분 거리에 있다. 그런데 그날은 유독 햇빛이 눈이 부시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것이었다.



'그냥 걸어가 볼까?'



지도어플로 집에서 내가 일하는 곳까지 걸어서 얼마나 걸리는지 검색해 보았다. 5.8km, 1시간 30분이 걸린다고 나왔다. 거리가 꽤 됐지만, 일단 조금만 걸어보고 힘들면 중간에 버스를 타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집 밖으로 나와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원래 내가 버스를 타야 할 버스정류장도 어느새 지나친 채 그저 계속 앞으로 걸어 나갔다.



사실 나는 걷는 것을 좋아했다. 내가 언제부터 걷는 것을 좋아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마도 그 시작은 고3 때부터였던 것 같다. 고3 때, 나는 엄마의 권유로 혈혈단신 호주 시드니로 유학을 갔다. 그곳에서 랭귀지 스쿨을 다녔는데, 유학 초기에 적응을 잘하지 못하고 겉도는 순간이 있었다. 언어도 잘 안 통하고 아는 사람도 딱히 없으니 약간의 위축감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수업이 끝나고 버스를 기다리는데 문득 좀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때의 나는 스마트폰도 쓰지 않아서 지도 어플조차 없었지만, 그동안 버스를 타고 지나치던 길을 더듬으며 그냥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걷는 동안 그 당시 내가 꽂혀 있던 가수 에미넴의 노래가 나를 위로해 줬다.



처음엔 내가 당시 살던 집까지 걸어가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걷다 보니 그냥저냥 걸을 만했고,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예 그냥 집까지 걸어가 볼까?' 



집까지 도대체 얼마나 걸릴지는 가늠조차 못했지만, 그래도 그냥 왜인지 그날은 끝까지 걸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평소 타던 버스의 경로를 떠올리며 길을 찾아가 보려는데, 아뿔싸! 걷는 중간에 도무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 건지 기억이 전혀 안 났다. 그리고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서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에미넴의 <Lose yourself>를 들으면서 걷는데 진짜로 길을 잃어버릴 줄이야! 당황스러움에 멈춰 서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보는데 내 앞에 사람이 한 명 보였다. 나는 곧장 그 사람에게로 가 내가 살던 동네에 있는 가장 큰 쇼핑몰의 이름을 말하며 이곳에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냐고 꼬부랑거리는 영어로 물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나를 보고 놀라며 한국사람이냐고 물어봤다. 나는 같은 한국사람을 만났다는 것에 반갑고 갑자기 마음이 놓여 입을 삐죽삐죽 거리며 하소연하듯 말했다.



"걸어오다가 길을 잘 모르겠어 가지고…"



그 사람은 놀라며 그 쇼핑몰은 걸어가기엔 너무 멀다는 말을 했다. 그러면서 쇼핑몰이 있는 방향을 알려주었다. 나는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집이 있는 방향으로 계속 걸어 나갔다. 수업은 3시에 끝났지만 집에 도착하니 어느새 주변은 어둑해지고 있었다.



그 이후로도 종종 랭귀지스쿨에서 집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나는 시드니 북부에 있는 노스시드니 역에서부터 출발해 시드니 대표 랜드마크인 하버브리지를 건너, 그 옛날 영국 이민자들이 초기에 정착을 시작했다는 록스지역을 들르고, 빌딩숲의 상업지구 마틴 플레이스를 거쳐, 시드니 시티 중심부로 진입하여 차이나타운이 있는 헤이마켓까지도 걸어 다니곤 했다. 그것도 모자라 시드니 시내에 있는 모든 스트릿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오늘은 '조지 스트릿(George St)', 또 다음날은 '옥스퍼드 스트릿(Oxford St)', 이번엔 '피트 스트릿(Pitt St)' 하며 시드니 시내에 있는 길이란 길은 다 걸어본 적도 있다. 그렇게 걷는 행위는 나의 외로움과 타국에서의 헛헛함을 채워 주웠다.



이랬던 나인데, 최근에는 거의 침대에만 누워 있어 근력도, 기운도 없는지라 내가 1시간 30분을 걸어 일하는 곳에 도착이나 할 수 있을지 100% 자신할 수가 없었다.



'이러다 지각이라도 하면 안 되는데...'



걱정스러운 마음에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래도 오랜만에 걷는 것이어서 그런지 기분은 상쾌했다. 그리고 내리쬐는 따뜻한 햇살과 솔솔 불어오는 바람에 나의 걸음이 점점 당차지고 빨라졌다. 우리 아빠는 종종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게, 다 네가 햇빛을 안 봐서 그런 거야."



내가 한창 얼굴에 난 여드름으로 심란해할 때도, 우울증으로 고생을 할 때도 아빠는 햇빛의 중요성을 얘기했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을 듣고도 흘렸다.



'햇빛이랑 여드름이랑 우울증이 뭔 상관인데?'



나는 그냥 암막커튼을 치고 침대에 누워 있는 게 더 좋았다. 



어느 날은 자려고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잠자기 편한 자세를 잡기 위해 오른쪽으로 돌아 눕는데, 귀에서 뭔가 덜그럭거리며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뭐지? 나 에어팟 낀 적 없는데?'



나는 처음에 이것이 귀에 끼고 있던 에어팟이 떨어지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머리가 미친 듯 빙빙 돌기 시작하며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온 세상이 어지러웠다.



'내가 갑자기 왜 이러지? 나 죽을병에 걸렸나?'



너무 어지러워 갑자기 속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토가 나올 것 같아서 바로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한동안 구역질이 계속되어 나는 화장실 바닥에서 일어나지 조차 못했다. 기운이 쏙 빠져 방에 들어와 다시 누웠는데, 그 어지럼증이 또 나타났다.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나는 예전에 간혹 어지럼증이 느껴지면 안락한 나의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하곤 했는데, 이건 누웠는데 오히려 더 어지럽다니? 나는 답답한 마음에 벽에 머리를 기댄 채 스마트폰으로 '누웠을 때 어지러움'이라고 검색해 보았다. 이석증의 증상과 나의 증상이 일치하는 듯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병원에 가보니 이석증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피검사 결과, 나의 비타민 D 수치가 엄청난 최저의 수치가 나왔다며 의사 선생님이 직접 나에게 전화까지 하여 알려주셨다. 그러면서 비타민 D 부족 시, 이석증의 원인이 될 수 있으니 영양제를 잘 챙겨 먹으라고 하셨다.



아빠 말이 맞았다. 모든 건 내가 햇빛을 안 봐서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체내에 비타민D가 극심할 정도로 부족해졌고, 이석증까지 걸려버렸다. 그래서 한동안 나는 누우면 그 무지막지한 어지러움이 또다시 나를 덮칠까 두려워 똑바로 눕는 것이 두려워졌다. 내가 하도 누워만 있으니까



'제발 이제 그만 일어나서 햇빛 좀 봐라!'



하며 몸이 비명을 지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찌 되었건 나는 이석증에 걸린 덕분에 반강제적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게 되었다.



어느새 걷는 게 1시간을 넘어가니 그 따뜻하던 햇빛이 더움으로 변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그동안 못 충전한 햇빛을 충분히 받은 것 같긴 했다. 땀이 삐질삐질 나오고 다리는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30분만 더 가면 도착인데, 계속 힘을 내보기로 했다. 나의 고막을 뚫고 들어오는 신나는 음악소리에 의지해 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전 10화 9. 감사하며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도전하는 삶을 살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