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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다짓기 최주선 Nov 17. 2023

팬티를 찢어질 때까지 입는 남자

도움이 안되는 편안함과 익숙함



"자기 뒤 좀 돌아봐봐." 

순간 내가 뭘 잘 못 봤나 싶었다. 

"어머! 돌아봐 빨리빨리" 

"그리고, 자기 손으로 엉덩이를 만져봐." 


"어? 푸하하 하하하하하"


상당히 크게 엉덩이 골 전체가 드러나 보일 정도의 길이로 쫙 찢어지다 못해 너덜너덜해진 팬티가 보였다. 위에서 아래로 '타졌다'는 말을 넘어 그냥 부악 찢어졌다. 


"자기 방귀를 많이 뀌어서 그래. 크크 그래서 찢어진 거야. 대체 자기는 왜 그렇게 다 너덜 해질 때까지 입어? 팬티도 많은데, 좀 버려." 


" 아 아니야. 오늘 이거 입고 사다리를 몇 번이나 오르락내리락했는지 그러면서 찢어진 것 같아." 


"그래. 그렇다고 해주고 싶은데, 근데...  케케케케케." 


한참을 웃었다. 배꼽 빠지게 웃는 내 소리를 듣더니 삼 남매가 무슨 일 났냐며 얼른 뛰어 왔다. 남편은 두 손으로 엉덩이를 가리고 얼른 샤워실로 들어갔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들어온 남편이 씻으러 가던 길에 내가 자신의 치부를 들켜버리고 만 꼴이 됐다. 다 같이 배꼽 빠지게 웃었다. 정적을 깨고 웃음을 선사해 준 남편에게 고맙기까지 했다. 


처음이 아니라, 몇 차례 이런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심하게 찢어진 건 처음이다. 남편은 집에서 사각팬티를 즐겨 입는다.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라 여기에 올리지 말까 하다가 이렇게 재밌는 이야깃거리를 그냥 지나칠 리 없지 않은가. (미안해 남편) 그리고 나는 남편에게 오늘 '글감'을 줘서 고맙다고 미리 말도 했다. 고로, 내가 본인 이야기로 글을 만천하에 공개할 것에 대한 마음 준비도 했을 거다. (거듭 미안 남편)  




남편은 옷을 사면 닳을 때까지 입는 편이다. 조금 후줄근해지면 보다 못해 내가 하나 새로 사 입으라고 재촉할 때도 있다. 한국에서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남아공에 와서는 잘 차려입을 일도 없고, 매일 트레이닝복이나 편한 차림으로 다니다 보니, 티셔츠에 청바지, 트레이닝 복이 전부다. 특히 속옷은 빨아서 또 입고 또 입고, 아프리카의 강한 햇볕을 이기지 못해 점점 빛바래고 얇아졌다. 그러니 찍어질 만도 하다. 새 속옷도 많이 있는데 굳이 입던 것만 입는 이유는 일단 버릴 때까지 입고 새것을 꺼내 입겠다는 거다. 가끔은 답답하다. 그래도 속옷인데 그냥 좀 버리지. 

"아끼다 똥 된다." 

자주 하는 말이다. 좀 그러지 말라고 경고하는 의미에서다. 내가 이 말을 꺼내려 치면 먼저 선수 쳐서 "아끼다 똥 된다"라고 말하려고 했지? 라며 씩 웃는 남편이다. 


가만 생각해 보니, 나도 잘 버리지 못하는 물건이 있다. 옛날에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나도 찢어질 때까지 입는 옷이 몇 벌있다. 검은색 여름 통바지, 얼룩도 묻었지만 편해서 집에서만 입는 후줄근한 티셔츠, 입지도 않으면서 장롱에 걸어둔 정장 원피스, 빨리빨리 정리해도 되는 옷들 마음에 가득 품고 있다가 한 번씩 정리할 때 깡그리 다 빼낸다. 그렇게 뒤도 안 돌아보고 정리하겠다고 해놓고 옷 더미에서 하나씩 다시 주워 담아 옷장으로 넣는 일도 여러 번 있었다. 잘 버리는 것도 능력이란 생각이 들던 타이밍이었다. 


신혼 때부터 쓰던 물건은 10년의 결혼 생활동안 9번 이사를 해야 했었기에 버리고 바꿀 수밖에 없었다. 자의든 타의든. 그랬다. 결혼 14주년을 남아공에서 맞았는데 여태 처녀 때부터 쓰던 물건들이 있다. 물론 추억이 담겨 버리지 못하고 아껴두는 물건도 있지만, 그렇게 의미가 있지도 않은데 움켜쥐고 있는 물건도 있다. 가방, 모자, 신발, 옷가지들도 몇 가지는 그렇게 딸려왔다. 버려도 되는 남의 사진도 사진첩에 끼워져 있고, 몇 년이나 됐는지도 모르는 볼펜, 종이들도 있다. 자잘한 물건을 굳이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분명 집안 구석구석에 잘 숨어 있는 것도 있을 법하다. 


어렸을 때는 친구들과 주고받은 쪽지, 편지, 교환일기장, 롤링페이퍼까지 다 싸 짊어지고 삻았다. 마음이 담긴 추억이니까 물건이랑은 다르게 대하고 싶었다.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시절, 뭣하러 증명사진은 주고받았었는지, 한국 친정에는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친구들 증명사진도 사진첩에 고이 끼워져 있다. 그땐 왜 그렇게 사진을 주고받고 간직하고 싶었을까. 당시의 친구를 향한 애틋한 마음이 그러했겠다 싶다. 오래된 물건 버리는 걸 잘 못했는데, 숱한 이사 덕분에 물건을 정리하는 법을 배웠다. 가끔은 너무 버렸나 싶을 정도로 기억나는 아쉬운 물건도 있다. 


팬티가 찢어질 때까지 입는 남편을 보면서 궁색하다는 생각도 해봤다. 속옷 살 돈이 없어서도 아니다. 그런데 그냥 결론은 "편해서", 그것이 "익숙해서"였다.  편한 것과 익숙한 것을 계속 쓰는 건 나쁜 게 아니다. 그러나 변화를 원한다면 때로는 과감해질 필요가 있다. 그냥 지금 바로 쓰레기통에 넣어도 되는 물건들도 끼고 있는 게 많다. 버려야 바꿀 수 있다. 그래서 연말이 끝나기 전에 좀 정리 좀 해보려고 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더 중요한 건 마음이든 물건이든 한 번에 몰아서 따 때려 엎어 없애려는 마음보다 순간순간 묵은 생각과 마음, 더는 내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는 물건과 마음도 정리해서 버리는 게 내게 득이라는 생각도 든다. 


** 찢어져 제 명을 다해 버려진 팬티를 애도하며, 오늘 이야깃거리를 준 남편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을 올립니다. 더불어, 제게 이런 글감을 준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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