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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다짓기 최주선 Jan 08. 2024

여덟 살이 생각하는 잔소리의 경계

아이들의 생각으로부터 배우는 인생




2023년 12월 31일 밤.

아이들과 둘러앉아 2023년들 돌아보고 2024년을 맞이하는 시간을 가졌다. 2024년 각자의 비전보드도 만들고, 2023년 감사거리도 나누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그냥 대충 말로 돌아가면서 이야기 나누는 게 전부였는데, 이제 제법 자발적으로 쓰고 말하기가 되니 할만하다.


2023년을 돌아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한 것 1가지, 우리 가족에게 감사한 것 1가지씩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잔소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제일 듣기 싫은 소리는 뭐였어? 잔소리?"


아이들이 싫어하는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듣고 싶었다. 잔소리야 누구나 듣기 싫은 건데 뭘 더 확인하고 싶었을까.  무심코 던지는 당연한 말들이 지겹도록 듣기 싫은 잔소리는 아니었나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잔소리지!"


혹시나가 역시나였지만,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뭘 더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근데 그럼 잔소리는 뭐가 잔소리야?  뭐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그러는 게 잔소리야? 엄마가 요엘아~  올라가서 엄마 컵 좀 가져다줘. 학교 숙제 해야지. 빨래 개자. 뭐 이런 거도 다 잔소리야?"


당연히 잔소리라고 할 줄 알았는데 올해 다시 또 8세가 된(한국 나이 만 나이로 바뀌어서) 요엘은 자기가 생각하는 정확한 정의를 내렸다.


"아니지. 그건 그냥 부탁이야. 그러니까 기분이 안 나빠요. 잔소리가 아니니까."

"응???? 그게 잔소리가 아니고 부탁이라고? 하기 싫은데 엄마가 자꾸 이거 하라고 하고, 도와 달라고 하면 귀찮잖아. 듣기 싫고, 그럼 그게 잔소리가 아니야? 그럼 뭐가 잔소리야?"


좀 의아했다. 내가 생각하는 잔소리와 정의가 다르단 말인가.


"잔소리는 내가 뭔가를 하려고 했는데, 막 하려고 했는데! 그때 자꾸 재촉하는 게 잔소리야."


생각보다 명쾌했다. 정말 하기 싫은 빨래 개기도 할 때마다 방구석에 숨어서 안 나오려고 하지만, 그래도 빨래개라는 말이 잔소리가 아니란다. 게임을 하든 놀이를 하든 숙제를 하든 뭘 하든 간에 자기가 집중하는 일을 방해해도 그건 잔소리가 아니란다.

주방에서 요리를 하다가 "요엘아~ 엄마 핸드폰 좀 가져다줘."라고 말하면, 게임하다가도 스위치 내려놓고 마지막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얼른 갔다가 대령한다. "엄마 설거지 할 건데, 엄마 책상에 있는 물컵 좀 가져다줄 수 있어?"라고 말하면 역시 싫은 내색 안 하고 달려가 두 손으로 컵을 내 몸 쪽으로 들이민다. 그냥 녀석, 뉘 집 자식인지 참 착하다는 말이 나오는 동시에 미소가 지어진다.


단순히 내 부탁을 잘 들어줘서가 아니라, 싫을 법도 한데 그게 "부탁"이라서 잘 들어주는 거란다. 부탁은 들어줘야 하는 거라며 말이다. 덧붙여 줬다. 부탁이라고 해서 내가 싫은데도 참고 다 들어줄 필요는 없다고 알려줬다. 그리고 거절해야 할 때는 거절하는 이유도 함께 이야기해 주면 좋다고 말이다. 때로는 아이들의 생각을 통해서 세상을 보게 된다. 내가 이미 이 아이보다 30년 이상을 살았는데도 아이의 말이 더 명쾌할 때가 많다. 동생의 말이 맞다며 끄덕여 보이는 별, 다엘의 말도 함께 들었다.


엄마 잔소리가 싫었다. 지겹도록 듣기 싫어 두 손으로 귀를 막았기도 했다.  입으로 아아아아아 소리를 내면서 귀가 왕왕거리도록 손바닥으로 눌렀다 뗐다를 빠른 속도로 반복했다. 문을 쾅 닫기도 했고, 제발 저 지겨운 잔소리 좀 안 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적도 있다. 그렇게 나이 먹도록 여전히 노파심 가득한 잔소리를 들을 때면 수화기 전원을 빨리 눌러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도 있다. 부끄러웠다. 나보다 나은 아이들이라니.

아이들이 말을 듣고 몇 분간 멍하니 자기반성에 들어갔다.  


저녁에 요리를 하면서 요엘을 불렀다.


"요엘아~ 엄마 책상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컵을 내 앞에 가져다가 대령하는 요엘이 두 손에 컵을 든 채 내게로 내밀고 미소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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