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씨엠립에서
토요일 아침, H와 동네를 산책했다.
씨엠립은 이제 곧 크메르 새해. 사람들의 표정은 잔잔하면서도 들떠 있다. 거리 곳곳엔 흰옷을 차려입은 이들이 사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손에는 꽃이나 과일, 향을 들고. 사원 앞 가게에선 바칠 것들을 고르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모퉁이를 돌자 마침 아침용 빵을 굽는 아주머니가 보였다. 지하철역에서 파는 델리 만주 냄새다. 순간 걸음을 멈췄다. 숯불로 빵틀의 아랫부분이 달궈지고 있고 그 위에 빵 반죽물을 붓는다. 그러고는 역시 숯불을 올려 달군 빵틀 윗부분을 덮는다.
아침에도 30도가 넘는데 숯불을 다루는 아주머니는 온통 겨울 복장을 하고 계셨다. 두꺼운 털모자. 스웨터, 두꺼운 기모 바지, 장갑, 긴 양말까지. 보기만 해도 한 겨울 복장을 하시고는 숯불을 이리저리 조정하신다. '대체 왜..' H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근데 이렇게 더운 나라에서 왜 플리스 재킷이나 털모자까지 쓰고 다닐까?”
“그니까. 나도 항상 궁금했어. 우리 기준으로는 좀 덥지 않나 싶은데.”
“혹시… 멋?”
“아니면 실내 에어컨에 대비?”
우리끼리 한참을 추측하다 결국 챗지피티에게 물어봤다.
그 답변은 이랬다. 플리스나 니트, 심지어 털모자는 단지 ‘보온’의 목적이 아니라 ‘패션’의 의미가 크다고. 또, 강한 햇볕을 피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고, 때로는 자기표현의 방식이기도 하단다. 기온이 낮지 않더라도 새벽이나 이른 아침엔 시원하기도 하니까.
그렇게 빵을 만드는 모습이 신기해서 허락을 받고 사진을 여러 컷 찍었다. 사진만 찍기 뭐 해서 빵도 한 봉지 샀다. 지금 지내는 호텔에는 오후 3시 무료 티타임이 있다. 그때 곁들여 먹기로 기약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덥다.
“빙수 먹을까?”
크메르식 빙수에는 코코넛 젤리, 커스터드 맛 빵, 그리고 양갱처럼 쫀득한 무언가가 들어간다. 그 위에 갈린 얼음 한가득, 마지막엔 연유를 듬뿍 뿌려준다.
첫 한 술에 말도 안 되는 행복이 밀려온다.
'차갑고 달콤하다. 와...'
아, 생각났다.
분명 3월 언젠가 바디프로필을 찍었는데, 그로부터 한 달. 이제 복근은 어디에도 없다. 매일 디저트를 이렇게 챙겨 먹으니 그럴 수밖에. 그래도 뭐 어때. 행복한걸. 그냥 먹을 땐 먹자.
크메르 새해는 4월 14일 다음 주 월요일부터 시작이다. 이곳 사람들의 가장 큰 명절을 곁에서 지켜본다는 게 꽤 설렌다. 이곳의 새해 3일 동안 뭘 할지를 벌써 H와 모든 계획을 세웠다.
"나는 올해만 새해가 몇 번째인지 모르겠어. 1월 1일 신정, 구정 새해, 3월 2일 선생님들의 새해, 동남아 새해인 크메르 뉴이어까지."
"선생님 새해가 뭐야?"
"왜 한국은 새 학년이 3월 2일 시작하거든. 새 학년이 3월 2일에서 다음 해 3월 1일까지라서 말이야. 그래서 3월 초가 되면 뭔가 새롭게 시작하는 느낌이 들어. 퇴직했는데 아직 나에게는 그 습관이 남아 있는 거 같아."
16일엔 비자가 만료돼서 태국 꼬창 섬으로 넘어간다. 버스를 타고, 배를 타고, 트럭 택시도 탈 예정이다. 하루 종일 이동이라 생각만 해도 몸이 피곤하지만… 오랜만에 ‘여행하는 느낌’이 날 것 같다.
나는 내가 선택한 내 나름의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정착하지 않고 여행하는 삶이 이상할지 모르겠지만 난 그냥 하루하루를 내 방식으로 살고 있는 것일 뿐이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마시고 동네를 산책하고 체육관에 가고 읽고 쓰는' 내 루틴은 계속 지속되니까. 다만 장소를 옮기니 배경화면이 바뀔 뿐이다.
아무튼 새롭게 시작하는 이 삶.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지만, 일어나는 일들에 저항하지 않고 내 모든 것을 맡겨보며 살아야겠다 생각한다. 그 모든 여정의 끝엔 뭐가 있을지 기대하면서. 무슨 결과를 얻든 그건 나에게 아마 가장 좋은 결과일 거니까.
날씨는 조금 덜 더웠으면 좋겠다. 디저트는 매일 먹고 싶다. 그리고 매일이 휴일인 이 삶은 계속되면 좋겠다.
산책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며 H에게 말했다.
“수영장 가자, 너무 더워!”
#매일이휴일 #은퇴자의삶 #호젓함 #소요유 #미니멀리즘 #아다지오 #슬로우라이프 #디지털노마드 #친구랑세계여행 #에세이 #소설 #발코니에서글쓰기 #도인작가 #Dbalcony출판사 #바디빌딩 #프리다이빙 #디저트 #영국 #영국문화 #건강사랑자유 #캄보디아 #씨엠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