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옷걸이를 바꿔봤다.
의류 매장에서 주는 어깨가 두툼한 옷걸이는 옷 모양은 잘 잡아주지만 보관할 때 자리를 너무 많이 차지해서 옷장이 금세 비좁아졌다. 조금 더 날씬한 논슬립 옷걸이로 모두 교체했더니 부피가 거의 절반으로 줄어서 옷이 너무 많은가 싶은 죄책감을 조금 덜어주었다. 그리고 또 겨울 코트를 사고, 가벼운 잠바도 한 개 사고, 허리가 잘록해서 우아한 느낌이 드는 원피스, 행사가 있는 날 입기 좋은 편한 정장바지, 그리고 겨울 운동복 등등 을 샀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장은 좁아지는데 정작 입을 옷이 없기 때문에.
어느 강연자가 말하기를 사람은 외로울 때 나에게는 물건이 부족하다는 착각에 빠진단다. 이 말이 공감은 가지만 마음에 울림을 주지는 않았는데 어느 날 내 현명한 친구가 입을 옷이 없는 이유는 옷이 없거나 취향이 없거나 둘 중 하나라고 한 순간 그녀의 탁월한 통찰에 눈물이 핑 돌았다. 반백년이 가깝도록 나는 이렇다 할 취향이 없는 솥뚜껑 인생이다. 그릇도, 음식도, 옷도, 취미도 일관성 없이 순간의 경험들로 갈증을 채우기 급급하다. 한동안은 급작스럽게 각성해서 내 취향을 찾겠다고 파고들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취향이 괜히 취향일까. 작정하고 만들어 보자 한다고 만들어지는 취향이 어디 내 것일까.
조금 더 애정을 갖기로 했다.
취향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이미 내 안에 잠재해 있는 선호와 비선호를 구분하고 편안한 선을 찾는 여유가 필수적이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남들에 맞춰 스스로의 호감과 비호감을 감추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려서 이제는 애써 찾아도 찾기가 어려운 지경이 되고 말았을 뿐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니까.
나는 옷장 가득 못 입는 옷을 쌓아두고 있다. 미니멀리스트들처럼 옷장을 뒤집어 설레지 않는 옷을 내다 버릴 용기도 없다. 백화점을 휘저으며 옷을 사모으던 열정도 날아가버렸는지 이제는 딱히 마음에 드는 새 옷을 찾기도 어렵다. 최소한 옷장에 있어서는 취향을 찾을 나이가 되었나 보다. 쉽지는 않겠지만 오랜 세월 동굴 속에 들어앉아서 혼자 구시렁거리는 쫌생이와 화해를 시도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