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를 개는 분위기는 어느 집이나 비슷하다. 느리고 단정한 손놀림 정숙한 몸가짐. 어딘지 모르게 경건하다.
살림은 하나도 공짜가 없다. 빨래는 세탁기가 해주고 청소는 청소기가 해주는데도 청소는 그냥 청소가 아니고 빨래도 그냥 빨래가 아니다. 사무실 한켠에 웅크리고 있는 덩치 큰 복합기가 사무실 식구 모두의 서류를 출력해 주듯이 싹둑 잘라 기계에게 맡길 수 있는, 살림은 그냥 그런 일이 아니다.
식구들이 모두 현관을 나서면 그 길로 뒷걸음질 치면서 일과가 시작된다. 던져놓은 수건들을 차례로 주워 담아 옷장 앞에서 벗어재낀 잠옷을 들고 잠시 멈칫한다. 하루 더 입게 침대 맡에 둘까. 그리고 구석구석 청소를 빌미 삼아 기웃거리면서 식구들의 그림자를 따라가 본다. 우리 둘째가 어제 여기 앉아서 한참을 꼬물거리더니만… 검은색 크레용으로 호기롭게 낙서해 놓은 테이블에 락스를 뿌려 놓고 테이블 아래 말라붙어 있는 수박 찌꺼기를 닦아내면서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린다. 앉은자리에서 그렇게 좋아하는 수박을 먹어가며 크래용으로 하얀 테이블에 낙서를 하느라 얼마나 신났을까. 수박 덩어리 하나가 떨어져서 바닥에 뒹굴었는데 큰 덩어리는 주워 먹었나 봐 찌꺼기만 남은 것 보면.
아무렇게나 쌓인 빨래를 한 장 한 장 개면서도 홀로 추억 놀이에 빠져든다. 우리 아가 이 옷 입은 날 참 예뻤는데. 이 옷은 탁구 하는 날 입으면 좋겠네 속옷이 작아진 것 같네, 실내복을 새로 사야겠다. 혼자 구시렁구시렁 중얼거리면서 티셔츠를 한 장씩 무릎에 얹어 탁탁 당겨 핀다. 그 빳빳한 면 촉감이 어찌나 개운한지.
요즘은 이런 재미에 푹 빠져 있다. 첫 아이 올 시간과 둘째 픽업시간이 맞물리면 꼭 간식을 차려두고 간다. ’ 메모라도 한 장 남기면 좋아하겠지. 접시를 레이어드 해서 차려 주면 공주님 기분일 거야.‘ (이런 욕심에 둘째 픽업에 늦은 날도 있다.) 첫 아이 간식으로 만두를 정성스럽게 구워서 덮어두고 작은 아이 먹을 그릭요거트를 싸들고 픽업 가는 길은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금방 깎은 과일을 모양대로 쌓어서 빈틈에 요거트를 채워 넣고 꿀 한 스푼 얹어서 싸가면 유치원에서 집에 오는 십분 사이에 차 뒷좌석에서 온 정신을 쏟아 요거트를 떠먹는다. 차시트며 얼굴이며 요거트 떡칠을 하면서 먹는데 그게 그렇게 예쁠 수가 없는 걸.
딱 한번 신랑 사무실에 샐러드를 싸다 준 적이 있다. 몇 주째 야근이라 기운도 없고 우울해 보이길래 둘째 픽업 가는 길에 깜짝 방문해서 샐러드를 내밀었는데 얼떨떨하며 받아 들고 갔다. 내 기억에 결혼생활 십수 년 만에 수제도시락은 처음이었는데 알쏭달쏭한 표정에 비치는 미안함에 오히려 내 마음이 아렸다.
살림하는 여자가 뭘 아냐고들 쉽게 말한다. 하지만 살림을 하다 보니 알겠다. 그동안 겉으로만 훑고 지나갔던 순간들의 그림자를 곱씹으면서 사람을 배우게 되고 마음을 헤아리고 깊이 애정하는 법을 배우고 싶어졌다.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주는 행복감에 보답할지, 또 이기적 이게도, 어떻게 해야 그 마음을 더 많이 받을지도 고민하게 된다. 가지런히 정렬된 서랍을 열면서, 따뜻하게 김서린 그릇을 열면서, 촌스럽게 멋 부린 도시락에서 내가 받은 행복의 반만큼이라도 돌려받는다면 모든 수고로움이 값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