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가 지나고 바짝 소설 한 권을 읽었는데 그대로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연휴끝에 선선하게 바람이 부는 날씨 탓인지 소설 속 인생의 헛헛함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소설속 젊은이와 함께 고된 인생에 시달리다가 마음이 다 늙어버린 것 같이 허물어졌다.
"나조차 내 마음을 알 수 없을 때 누군가의 깊은 내면을 따라가 보는 일은 특별한 위로를 준다. 「스토너」는 내게 그런 소설이다"
존 윌리엄의 소설 스토너를 소개하는 여러 추천사 중에 소설가 최은영 님의 문장이 내게는 가장 적절하게 느껴진다. 일을 그만 두고 이렇다할 업적없이 보내는 날들이 많아질 수록 조바심이 나고 조금은 권태롭기도 한 기분으로 또 한 번의 겨울맞이에 싱숭생숭해지는 참에 그 추천사가 내 마음을 떠보는 것 같아 호기심내지는 심지어 반항심 같은 마음으로 책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덤덤하게 윌리엄 스토너의 보잘 것 없는 삶을 지켜보느라 주말이 지나가 버렸다. 애닲을 것도 없이 건조하고 단순한 젊은 시절부터 고요하고 쓸쓸한 그의 임종까지.
나는 무엇을 기대했을까
일을 그만두고 나서 나는 인생 하반기를 설계하느라 마음이 분주했다. 처음과는 다르게 내 취향을 찾아서 진짜 내 모습이 담긴 삶을 살겠다고 다짐을 하고 내면을 파고 들었다. 남들이 바라는 내가 아니라 원래 타고난 나는 어떤 사람일까, 삶에서 무엇을 이루고 싶은걸까, 답을 찾기 어려운 질문들을 하다가 어떤 실마리 비슷한 것이라도 잡힐라치면 앞뒤없이 달려들어 숙제 해치우듯 결론을 내지못해 안달이었다. 사업계획서도 몇 개나 썼다가 쳐박고 새로워진 루틴에 맞춰 외출복이며 신발도 사들였다. 하루아침에 완벽하게 변신해서 끝내주는 인생 2막을 열어보고 싶었나보다. 책의 말미에 들면 스토너가 죽어가는 침상에서 자기 인생을 관조하며 씁쓸하게 고백한다. 고독을 즐겼으나 연결을 통한 열정을 갈망했고 막상 열정을 품었을 때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놓쳐버렸으며 사랑을 원했지만 가능성이라는 실체없는 안개속으로 던져버렸고 순수함과 성실함에 헌신하고 싶었지만 타협하고 말았다고. 지혜를 찾아 살아온 모든 세월의 끝에서 결국 무지를 발견했노라고.
나는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원하는지 과연 말로 정의할 수 있을까.
삶은 흐르는 물 같아서 매 순간 변하고 모든 시공간에서 다르게 보인다. 마치 불행의 끝을 보는 듯한 순간에도 예상치 못 한 행복감이 차오를 수 있고 슬픔에 목이 메이지만 한편으로는 후련하기도 한 모호하고 오묘한 것이니까. 모든 불행과 불만족을 곱씹으면서도, 놓쳐버린 행복과 성취를 아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사이를 채우고 있는 온갖 아름다운 순간들이 잊혀지지 않는 것이 삶이라는 얄궂은 것이어서 감히 한 번에 그것을 정의하거나 넘겨짚을 수가 없다. 5년 일지 50년 일지 모르는 남은 시간들에 기대어 시간의 완성품을 꿈꾸는 부질없는 노력 때문에 지쳐나가 떨어지기를 수천번 반복하면서 절망하고 다시 희망하는 젊음에게 임종을 앞둔 주인공이 조심스럽게 고백한다. 삶의 모든 하찮은 순간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감정을 담아서 정성껏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인생의 의미에 한발 다가선 것이라고. 돌이켜 생각해보면 잊혀지지 않는 어떤 순간들은 대단한 업적을 이룬 현장이 아니다. 화창한 아침 오픈카를 타고 출근하면서 가로수 잎사귀 사이로 새어나오는 햇살을 발견한 날의 새삼스러운 만족감, 오픈카를 산 날보다 더 실감나게 느껴지는 성취감은 그날 찾아왔었다.
아무 맛이 없는 고운 쌀밥도 천천히 씹으면서 음미하면 담백하고도 고소한 단맛이 올라온다. 특별할 것 없는 어느 순간에 잠시 멈춰서면 지금을 둘러싼 모든 것이 신비롭고 비현실적이다. 파랗기만 하던 하늘이 주황색이고 보라색이고 핑크색이고, 값없이 얻은 밤톨같은 아이들은 내가 온 세상인 것처럼 의지하고, 나는 숨쉬는 모든 순간에 자유로우며 내가 원하는 동안 얼마든지 평화롭다. 어쩌면 조금은 방관자의 시선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급한 마음에 동분서주하며 헐떡거리느라 손에 잡히는 행복들을 놓치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 날 선 청년의 마음으로 삶을 지고 가느라 고군분투하기 보다는 너그러운 노인의 마음으로 삶이 흘러가는대로 감상하며 따라가는 것도 필요할지 모르겠다.
중년이 넘어 처음으로 내가 삶을 정의하지 않고 삶이 나를 정의하도록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어떤 큰 격차가 있을 것 같지 않다는 어렴풋한 직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