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집들이 열기는 언제나 뜨겁다. 개인주의가 뿌리깊은 요즘이지만 일면식도 없는 불특정 다수에게 내 집 구석구석을 공개하는 데에는 거리낌이 없다. 잘 정돈된 집을 세심하게 연출해서 찍은 완벽한 사진 한장은 어떤 안도감마저 준다. ‘오늘의집‘같은 플랫폼이 성공가도를 달릴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집부심‘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그 집에서 편안한가. 완벽하게 꾸민 바비 하우스에서 뒷꿈치를 바짝 들고 관상용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까운 친인척도 드나들지 않는 텅빈 집을 쓸고 닦고 밥은 식당에서 먹고 잠은 호텔에서 잔다.
요즘 내가 가장 동경하는 사람은 국민요정 정재형님이다. 지인을 초대해서 정성껏 차린 밥상를 대접하고 대수로울 것 없는 수다를 요란하지 않게 나누는 모습이 꾸밈없이 편안하다. 평범한 일상 같아 보이지만 사실 현실세계에서는 흔한 일이 아니다. 우리 어릴 적에만 하더라도 교회 구역예배, 엄마들 계모임, 집들이, 아이들 생일 파티 따위로 집에 손님이 오는 일이 간간이 있었는데 요즘은 남의 집은 고사하고 친척집 갈 일도 잘 없다. 가족식사도 웬만하면 식당에서 하니까.
그런데도 희한하게 추석이라고 다들 고향집으로 차를 몰아 나선다. 안 막히는 도로가 없고 안 붐비는 휴게소가 없다. 요즘같은 시대에도 자식들이 "집"에 오기를 문자 그대로 "목을 빼고" 기다리시는 부모님이 살아계시니까. 그리고 집에 가면 신기한 마법이 작동한다. 그 집을 공유하던 가족들이 집을 떠나온 바로 그 시점으로 자동으로 돌아가는데 엄마는 성장기 아들에게 못 해준 고기반찬을 원없이 먹이려고 극성이고 아빠는 사춘기 아들과 못 다한 대화를 어떻게 시작할지 몰라 술상에 기댄다. 장성한 아들은 결혼한 사실은 까맣게 잊었는지 다시 사춘기 소년이 된 것처럼 툴툴거리면서 명절 내내 방에 틀어박히거나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며 보낸다. 오직 이방인만이 이 갑작스러운 시간여행의 어색함을 알아차리는데 그저 오랜만에 가족들이 만난다고 해서 늘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이것은 아마도 집이어서 만날 수 있는 풍경이다. 집에 가면 양말을 벗어던지듯이 자기 껍데기를 벗고 보들한 속내를 숨김없이 드러내기 때문에.
아이가 어릴 적에 마당이 있는 집이 부러워서 양평 주택집을 한달 빌려 구경한 적이 있었다. 아침이면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소꿉놀이를 죄다 널부러 놓고 동네 고양이를 초대해서 놀다가 흙자국이 남은 나무 테이블에서 아무렇게나 아침을 먹었다. 그 시골집에도 거실에 커다란 티비가 있었지만 더 커다란 거실 창으로 보이는 정원나무들과 하늘이 더 눈길을 끌었던 것 같다. 한달살기가 삶의 환기를 주는 방식은 그런식이다. 하루, 이틀 보내는 호텔방이 아니라 한달쯤 살면서 내 체취를 남겨도 되는 공간에서 마음껏 하루를 리셋하면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행동양식을 만들고 하루를 보내는 방식을 재정렬하게 한다. 집이라는 공간이 설계한 시간에 적응하도록.
서로의 집에 왕래하면서 얻게 되는 것은 단순한 친밀감을 넘어선다. 집주인의 한시간, 하루, 일년이 담긴 집에서 그 시간을 살아보는 짧고 유쾌한 경험이다. 세상을 보는 방식, 삶을 대하는 방식을 보면서 양말을 벗어던진 맨발을 만나는 경험. 그저 차려입은 옷과 흘리는 말로 담을 수없는 진짜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줄게. 새집 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