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보다 마흔에 가까운 나이. 책임질 가족들도 생겼다. 봄날이 가면 무더위가 기승하는 법이다. 이제 진 빠지는 세상에서 땀 흘려 일할 차례다. 혹여 꿈처럼 청춘이 되돌아온다면 그건 정말 꿈이던지, 아니면 내가 다시 태어났다는 소리일 게다. 적어도 이번 생에선 아니다.
생의 여름에서,가물었던 봄날을 원망한다. 인생에서 가장 많이 울고 웃어야 했을 시기. 나는 좀처럼 울지 않고 살아왔다. 남자다움을 온 사회가 주입하던 어린 시절이었다. 남자들은 태어나 세 번 운다는 격언을 애국가처럼 부르고 다녔다. 사회의 의도대로 나는 잘 자랐던 것 같다. 눈물 빨리 흘리기 대회가 있다면 순위권에 들 자신이 있었지만 아마 내 눈물을 본 사람은 가족 말고는 손가락에 꼽을 것이다. 울면 쪼다고, 남자답지 못한 거니까. 울면 지는 거니까. 남자답고 이기고 싶었던 낭만소년은 봄비 같은 눈물을 어디로도 쏟아내지 않고 매번 꾹꾹 되삼켰다.
그러다 보니 타고난 기질에 비해 나는 좀 건조한 청년으로 자랐다. 그것대로도 좋아 보였다. 슬픔은 참아내는 게 정답 같았고, 그런 내 주위로 사람도 몰렸던 것 같다. 사람이든 날씨든 축축하면 가까이하기 싫은 법이니까. 같이 웃고 혼자 우는 삶이 꽤 멋있어 보였고 만족스러웠다.
내게 탈이 났다는 걸 알게 된 건 얼마 지나지 않은 일이다.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책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1부를 읽고 나서 나는 나를 그렇게 진단해야만 했다. 단지 울음을 참아냈던 세월만으로 나는 비정상이며, 어쩌면 타인에게 쉽게 상처 주는 어른으로 자랐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배출되지 못하고 속에 고인 눈물 웅덩이에서 균이 증식해 나의 정상적인 성장을 방해했던 것만 같다.
원래 억누른 모든 것은 엉뚱한 데서 터지고, 자연스럽지 못한 것은 결국 탈이 나기 마련이다. 당연한 이치다. 그걸 알면서도 눈물을 억지로 참는 내 모습을 거울에 비출 생각은 못했다. 덜 자랐기 때문이리라. 책은 나에게 그런 나를 고발했다. 문장문장을 읽을 때마다 나는 더 집요하게 갇히는 기분이었다. 자기 합리화라는 궁박한 기술로 빠져나갈 만한 작은 틈조차 보이지 않았다. 책에서 저자는 스스로를 반성했지만, 마치 내게도 '문제어른'으로 자라고 있었음을 자백하라고 모질게 권유하는 듯했다. 멘붕에 빠진 나는 순순히 진술서를 써야만 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안팎으로 이런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먼저 나는 남을 자주 공격하는 성인으로 자랐다. 울음을 억누른 성대에서 날 서고 못된 목소리들이 줄줄 터져 나왔다. 눈물은 용케 잘 참으면서 다른 울화의 감정들은 못 참았다. 이를테면 마음속에 참을성의 공간이란 게 한정돼 있는데, 그 공간을 슬픔이 다 채워버려서 정작 참을성이 필요한 다른 감정들은 몸 밖으로 모조리 분출해버리며 살아온 것만 같다. 평생을 나이에 비해 어른스러웠다고 자부했지만 실상은 작은 화도 못 참는 설익은 어른이 된 셈이다. 당연한 귀결이다. 봄비를 거부한 영혼이 어찌 푹 익겠는가.
타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눈물에 엄격한데 남의 울음에 관대할 리 있었을까. 누가 울면 공감보다 해결에 분주했고, 믿음보다 의심을 앞세웠다. 속으로는 아직 어린애 같다고 무시하면서. 더러는 눈물의 의도부터 따지고 든 적도 있었다. 가끔 그 생각이 맞아떨어지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의 촉에 뿌듯해하거나 심지어는 눈물 흘린 상대에게 자랑하며 웃어대기나 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그들이 내게 화를 내거나 나를 떠나버리지도 않았다. 그것조차 내가 '슬픔을 견딜 줄 아는 든든한' 사람이어서라고 착각했다. 그들이 화내지 않은 건 슬픔을 이겨내느라 분노할 여력도 남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는데. 그들이 날 떠나버리지 않은 건, 이런 철없는 인간조차 버리지 못할 정도로 외로웠기 때문일지 모르는데.
가장 존경하는 회사의 선배가 내게 말한 적 있다. 어떤 이유로도 남에게 상처를 줘선 안 된다고. 비판이 업인 기자질을 하면서 참 와 닿기 힘든 말이었는데, 지금 보니 직업 너머 존재 자체에 던지는 경고였던 것만 같다. 나는 내 슬픔을 내보이지 않는 대가로 남에게 슬픔을 스스로 삼켜주길 강요하며 살아왔다. 그게 그의 속을 곪아 터지게 하는 줄도 모르고. 슬픔을 참아내는 게 어른이라면서, 당신도 어른스러워지길 종용하면서. 심지어 나는 어른이라고 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다.
눈물을 참으며 지내온 봄날. 나를 위해 울지 않다 보니 남을 위해 울어본 적도 없이 살아버린 청춘이었다. 그 세월의 결실로 나는 고작 이 정도 자랐다. 멋진 어른이 아니라, 자신도 타인도 보듬을 줄 모르는 메마른 어른으로.
나는 뒤늦게 용기 내보려 한다. 그 사이 세상도 조금씩 변했다. 이젠 남자다움을 강요하는 게 도리어 이상한 시대로 흐르고 있다. 올바른 흐름 같다. 그 강물에 뒤늦게나마 덜 여문 나를 띄우고 싶다. 다 커서 감정도 못 다스린다고 어린애 같다고 수군거려도 감당하겠다. 막 시작된 생의 여름엔, 실컷 울었으면 좋겠다. 타인의 울음을 내 목으로 삼키기 위해 나부터 울 줄 아는 어른이 되고 싶다. 장마처럼 축축한 사람 취급받아도 좋으니까 슬플 땐 슬프다며, 이유 없을 땐 이유 없다며 주룩주룩 여름비 같은 눈물을 쏟아내고 싶다. 마음속 '참을성의 공간'을 꽉 채웠던 억눌린 슬픔들을 마음껏방류하면서. 그 비워진 공간에는 남에게 자주 상처를 입혔던 내 안의 승리욕, 질투, 나쁜 생각과 말들을 대신 꽁꽁 가둬둔 채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