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먹씩 먹던 처방 약을 줄이자 오히려 활기를 띠는 할머니와 반대로 너는 남은 쿠에티아핀 같은 신경안정제를 골라 먹으면서 멍하니 있는 시간이 늘어갔다. 어쩔 땐 종일 잠만 잤다. 너는 어릴 적에 잠이 아주 많았다. 그때처럼 오래도록 자다 일어나면 현실은 오줌을 누기 위해 잠깐 깨어난 시간처럼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갔다. 그런지 몇 년이 되었을까,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너는 개 울음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귀를 후벼보고 손으로 팡팡 쳐보기도 했지만 한번 찾아온 개 소리는 기어이 미치기 일보 직전까지 진동을 일으키고 나서야 사라졌다.
“혹시 제가 미쳐가고 있는 건 아닐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김영준이 말했다.
“각종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현대인에게 그런 징후는 사실 드문 것도 아니죠. 혹시 개를 키우고 싶으신 건 아닐까요?”
너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소장님, 제가 그런 여유가 있을 것 같습니까?”
“요즘은 다들 개를 키우고 싶어 하죠. 반면에 개와 살기 어려운 여건의 사람들, 말씀하신 ‘여유’가 없는 분들은 무의식적으로 욕구불만이 억제되어 스트레스가 쌓이고 두통과 불면, 가려움증, 그리고 이명이 생기기도 합니다. 큰 병이 되기 전에 저를 찾아오신 건 정말 잘하신 겁니다. 솔직히 개 좋아하시죠?”
“솔직히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개 한 마리 정도는 키워야 사람답게 사는 것 같은 세상 아닙니까?”
너는 귀찮은 생각에 피식 웃음 짓는 것으로 동의를 표했다.
“저 역시 개와 살고 있습니다. 퇴근하는 저를 얼마나 반기는지 몰라요.”
그는 오른손과 왼손을 차례로 들고 “여기 ‘개’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할머니가 있어요.” 하더니 경중을 재듯 저울을 만들어 보였다.
“어느 쪽을 돌보는 게 더 행복할까요?”
너는 대답하지 않았다. 행복이란 말이 까마득한 어딘가에 존재하는 풍선처럼 오히려 상실감만 부추겼다.
“개를 유모차에 태우고 다니는 분들 말이죠. 그분들은 인간관계에서 찾기 힘든 무조건적인 사랑을 개와 교감하며 나눕니다. 하지만 그분들이 늙고 병든 부모와도 그런 교감을 나눌까요? 개를 사랑하는 훌륭하신 많은 분들이 저를 찾아와서 부탁합니다. 제발 사람도 그렇게 사랑하게 해달라고요. 제가 그분들의 고민을 어떻게 해결해 드리는지 아십니까? 바로 최면입니다.”
“최면이요?”
“우리는 고작해야 의식의 10% 정도만 사용하죠. 지금 태경 씨가 의식하는 어려움은 수면에 떠오른 빙산의 일각일 뿐, 최면을 통해 심층에 가라앉은 나머지 90%의 잠재의식을 사용하면 모든 어려움은 아주 사소한 것이 됩니다. 왜 웃으시죠?”
소설은 빙산의 일각만 보여주고 표층 아래의 나머지 부분은 과감히 생략해야 한다는 헤밍웨이가 떠올라서였지만 그런 것까지 김영준에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계속 말씀하세요.”
“최면 훈련을 통해서 생각의 습관을 개조하면 최면에서 깨어나도 효과는 지속될 수 있어요. 제가 그 증거죠. 저는 어머니를 개라고 생각하는 의식의 습관으로 이제 어머니가 개로만 보여요. 개를 보면 우리가 그렇듯 사랑스러워서 쓰다듬고 행복해합니다. 사랑받는 어머니도 행복해하시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