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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효진 Apr 27. 2017

1.3. 이상한 나라를 만드는 요인들

Stone Mountain에서 바라 본 Atlanta. 겁나 먼 왕국도 직접 살아보면 동네다.

익숙했던 직장과 한국을 떠나보면 여태까지 당연하게 주어졌던 것들이 허락되지 않아 불편하고, 그동안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들이 나를 힘들게 한다. 이주한 나라와 주어진 신분에 따라 각자가 겪는 어려움의 차이는 크다. 그렇지만 무엇이 나와 내 시간에 영향을 미치는지 먼저 알면, 모르고 당할 때보다는 여유로울 수 있다. 


이상한 나라를 만드는 요인들의 다양한 수준


1.3.1. 국가


신분


해외 체류를 위해 신청하는 비자는 해당 국가에서 거주할 수 있는 자격과 함께 그 나라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의 신분도 정해준다. 미국의 경우, 학생 비자로서 일반적인 F-1의 가족인 F-2의 경우 취업이 금지된다. 미국 유학생 와이프들 사이에서 금치산자 혹은 식물인간 비자라 불린다. 그러나 교환학생과 같이 교육교류 프로그램을 통해 입국하는 J-1 소지자의 가족인 J-2, 주재원으로 오는 L-1 소지자의 가족인 L-2의 경우 근로 허가를 취득한 후 취업을 시도할 수 있다.


물론 배우자를 따라오는 경우라 해도 배우자와 연결된 비자가 아니라 별도의 비자를 받아 취업을 추진할 수 있다. 그러나 취업허가가 없는 상태에서 취업을 시도하는 사람은 미국 내 기업들에게 참고할 만한 지원자는 되지만 우선적으로 채용하고 싶은 후보자가 되지 못한다. 미국에서 만난 이민 변호사에 따르면, 2016년의 경우, 미국 내 기업의 스폰서를 받아 취업비자(H-1B)를 신청한 사람들이라도 비자 심사기관에 접수시킨 비자 신청 서류가 개봉에 까지 이르는 확률이 1/4에 지나지 않았다. 기업 입장에서는 스폰서쉽 비용 외에 불확실성까지 감수해야 하는 채용이다. 그래서 그동안 열심히 경력을 쌓아 온 ‘미국 유학생 와이프’들이 취업을 기대하며 미국에 오지만, 미국 회사와 미국 내 한국 회사들의 기회를 탐색하다 신분의 벽에 부딪혀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나의 경우, 내 경력을 보고 다가 온 회사들과 헤드헌터는 내 비자(F-2)를 보고 사라졌다.


신분은 비단 취업이 아니더라도, 하나의 독립된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 제한을 준다. 신용카드를 만드는 데도 제한이 있고 각종 계약 시 뒤로 물러서게 된다. 싱가포르에서 같이 일했던 네덜란드 출신 동료의 경우, Dependent(부양가족) 비자를 가지고 있어 핸드폰 계약 시 남편의 명의를 사용했다. 그녀가 웃으며 말하길, 자기는 자기의 핸드폰 때문에 통신사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어야 할 때 남편의 목소리를 흉내 낸다고 했다. 싱가포르에서 공감하지 못했던 그녀의 처지를 나도 미국에 와서 이해할 수 있었다.


현지 시스템


내가 살아오면서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환경은 나에게 미지의 장벽이 된다. 아는 만큼 보이고 배운 만큼 할 수 있는 법인데, 내가 자라고 학교 다니고 직장 다니며 익숙해진 우리나라의 시스템은 사실 우리나라 안의 것이다. 사람 사는 환경이야 다들 비슷하긴 하지만, 그 이면에 있는 문화와 사고방식과 제도와 규제를 단번에 이해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일상생활 하나하나가 도전과 성취가 된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의 경우, 내가 직접 겪지 않아 알 수 없는 새로운 학교 시스템을 이해하기 위해 공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해외 체류자의 심리적 적응 과정 (참고. Oberg (1960)와 Gullahorn & Gullahorn (1963))

일반적으로, 해외 체류는 위의 그림과 같은 적응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며 처음에 신나고 즐거울 수 있으나, 문화의 차이로 인해 갈등과 문화 충격까지 겪을 수도 있다. 그러다가 새로운 문화와 환경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터득하며 회복이 되고 적응하고 익숙해진다. 본국으로 돌아가거나 다른 나라로 이동하면 이런 과정은 다시 반복된다. 물론 ‘미국 유학생 와이프’에게 해외 체류는 문화의 적응 그 이상을 요구한다. 


1.3.2. 사회


인간관계


일본의 ‘잃어버린 세대’가 겪은 비정규직의 현실을 논한 <98%의 미래, 중년파산>이란 책에서는 기업에 속해있을 때 받을 수 있는 선물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꼽는다. ‘직장인’이라는 신분이 있으면 업무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만나고 사회생활을 하며 성취감을 얻을 수 있는데, 비정규직은 그런 기회를 박탈당한다는 것이다. 하물며 직장이 없고 진로 계획까지 불확실한 경우, 사회 활동은 제한적이 되고 만나는 사람들도 달라지게 된다. 나를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대하지 않는 사람들도 만날 수 있다.  


직장을 그만두고 미국에 와서 한인 교회에 갔을 때, 교회 사람들은 남편 옆에 서있는 나에게 무슨 일을 하는지 묻지 않았다. 은행 계좌를 만들러 남편과 은행에 갔을 때, 내 계좌를 만들던 은행 직원은 내 생활이 아닌 남편의 학교 생활과 장래 계획에 관심을 보였다. 지난달까지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이번 달에도 열심히 고민하며 내 길을 찾고 있는 내가 갑자기 흥미롭지 않은 인간이 된 것 같았다. 싱가포르 출신 ‘미국 유학생 와이프’ 친구는 싱가포르에 갈 때마다 사람들이 “너 앞으로 어떡하니?”라며 염려를 해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했다. 소속이 없고 일을 쉬고 있는 나를, 사람들은 ‘노는 사람’, ‘미래가 불분명한 사람’으로 여길 수 있다. 그래서 이상한 나라에서 살아가는 동안 불편한 시선을 종종 느끼게 된다.


1.3.3. 가족


배우자


가족들과 떨어져 배우자와 단둘이 해외에 있는 경우 ‘세상에서 부부 둘만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만큼 배우자와의 관계, 배우자의 진로가 나에게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 내 진로와 내 생활이 불확실해졌을 때 나를 격려해줄 수 있는 사람도 내 옆의 배우자고 나를 절망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도 배우자다. 


미국 퍼듀 대학교 Purdue University의 주디스 마이어스-월스 Judith A. Myers-Walls 교수 등은 한국, 중국, 대만, 필리핀 출신의 미국 유학생 부부들이 미국에서 어떻게 적응하고 자녀들을 양육하며 살고 있는지를 조사했다. 연구에 따르면, 미국 유학생 와이프들은 본인들의 배우자인 미국 유학생들과 다르게, ‘부부 사이 힘의 불균형’을 스트레스의 이유 중 하나로 꼽았다. 본인을 위해서라기보다 남편과 가족을 위해 미국에 온 상태에서, 경제적 사회적으로 남편에게 의지하게 될수록 부부간 힘의 불균형은 심해졌다(논문 링크).


부모



또 다른 가족, 특히 부모의 이해는 내가 직장과 일을 떠나 사는 동안 정신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가족 간의 관계와 교류 정도는 집집마다 다르지만, 내가 불안한 시기에 나를 믿고 격려해주는 부모와 나를 불안해하는 부모가 내게 주는 영향력은 같지 않다. 더욱이 부모와 자녀가 일심동체가 되어 입시와 취업을 위해 달려온 한국에서 그동안 쌓아온 것을 일시에 허물어버린 것 같은 자녀의 상황은 부모에게도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 사회학자 엄기호 선생과 정신과 의사 하지현 선생의 대담인 <공부중독>에서 하지현 선생은 자기 삶의 성적표가 자신의 성취가 아니라 자녀의 진학, 취업, 결혼으로 매겨진다고 믿는 한국의 부모들에 대해 얘기한다. 자녀가 표준화된 시나리오대로 살아가지 못할 때 한국의 많은 부모들이 자녀에게 강력한 사회적 압력을 가한다. 


임신과 육아


임신과 육아는 한국에서 회사를 다니든 미국에서 유학생 와이프로 살든 여자의 진로에 부담이 된다. 장서영 박사의 연구에서, 한국의 고학력 여성들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결혼과 출산 후 낮아진 후 다시 높아지지 못하는 L자형(L-shaped curve) 모습이다. 자녀를 키우게 되면 이전과 취업 조건이 달라져 육아와 병행이 어려운 경우 취업 자체를 시도하기 어려워진다. 부모의 도움과 직장의 어린이집과 같이 한국에서라면 가능했을 도움을 얻기 어려운 해외에서의 임신과 육아는 ‘미국 유학생 와이프’의 진로를 긴 시간 제한하게 된다.


1.3.4. 나


일에 대한 관점


내 일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그 일이 나에게 없을 때 확연히 드러난다. 일은 돈을 버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나에게 삶의 의미, 자신감, 성취감도 선물해 준다. 고려대학교 강수돌 교수가 한국, 일본, 미국, 독일의 직장인들 약 750명을 대상으로 ‘일에 대한 태도’를 조사한 연구(링크)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일에 돈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만약 당신이 일을 안 해도 좋을 정도로 충분한 돈을 얻게 되었다면 그래도 계속 일을 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일이 돈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일을 계속할 것”이라는 응답이 한국인 51%, 독일인 43%, 일본인과 미국인 24%였다. 또한 “일을 통해 자아존중감, 인정감, 인간적 유대감을 느끼는가?”를 질문에, 한국인 71%, 독일일 62%, 미국인 61%, 일본인 49%가 긍정적으로 답했다. 한국인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일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갑자기 내 일이 사라질 경우, 그 일을 되찾는 길이 보이지 않을 경우, 삶 전체가 흔들릴 수도 있다. 


내 분야와 전망


내가 지금까지 해온 공부와 일은 대개의 경우 내가 계속 이어가기를 원하는 내 진로의 구심점이 된다. 내 전공과 직업이 지금까지 ‘나’라는 사람의 능력과 사고방식을 만들어왔기 때문에, 거주하는 나라가 바뀌어도 내 길과 관심이 완전히 바뀌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동안의 경험, 더해진 관심사와 관련 직업들의 전망을 고려해 내 진로를 어떻게 이어가면 좋을지 고민하게 된다. 한편, 새로운 나라는 새로운 진로를 개척하도록 하는 위기이자 기회가 되기도 한다. 지금까지 해왔던 일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거나 그 일의 미래 전망이 좋지 않을 경우, 이참에 다른 분야로 과감하게 전향하는 계기로 삼기도 한다. 외국인이라는 위치 때문에 외국인으로서 보다 쉽게 취업이 가능한 분야를 일부러 선택하기도 한다. 


쉬는 기간


일을 떠나 지내는 기간을 어느 정도로 예상하고 있는지는 내 진로뿐만 아니라 생활에도 영향을 미친다. 1년 이하 단기로 일을 쉬는 경우, 그 이상 장기로 쉬는 경우, 언제 다시 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불확실한 경우의 생활과 고민이 각기 다르다. 단기로 쉬는 경우, 한정된 시간에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떤 결과를 남기고 싶은지, 남은 시간이 줄어들수록 고민이 된다. 장기간 쉬면서 다시 일로 돌아가는 시점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 매일이 비슷하고 막막할 수 있다.


외국어 수준


내가 거주하는 나라의 언어 수준은 내 생활 범위와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미국에서의 경우, 내 영어가 부족하다고 느끼면 한국에서라면 충분히 참여했을 모임과 상황에 어느 정도 소극적이 된다. 언어는 할수록 더 잘하게 되는데, 내가 부족하고 모자라다는 생각은 그만큼 나를 제한하고 늦어지게 만들 수 있다.  




'이상한 나라를 준비하는 참고서' 목차 및 이전 글 보기  

'이상한 나라를 준비하는 참고서' 소개
1. 배경

    1.1. 우리 안의 ‘미국 유학생 와이프’

    1.2. 기대와 다른 현실

    1.3. 이상한 나라를 만드는 요인들
2. 다양한 경로와 이슈들
3. 11명의 ‘미국 유학생 와이프’들에게서 찾은 인사이트
4. 이상한 나라를 준비하기 위한 지침


월요일, 목요일마다 업로드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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