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내 긴 파마머리 스타일이더니 깔끔한 스타일로 등장하시더니 자신이 키웠다면서 레몬 다섯 개를 건네주었다. 세련된 본업 뒤에 농사를 짓는 그는 단호박, 한라봉, 브로콜리 등등 다양한 자신의 작품을 계절마다 카운터에 가득 놓아주고 갑니다.
받아 들자마자 행복하여라.
얼마나 실하고 먹음직스럽게 생겼는지 절로 탐이 나는 레몬이었습니다.
레몬을 내려다보면서 ' 홍차 사야겠다. ' 했습니다.
마감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동네 그릇편집샵에 가서 투명한 유리잔을 사고 ( 반드시 이쁜 투명 유리잔에 레몬 홍차를 마시고 싶었습니다.) 마트에 들러서 얼그레이 홍차와 과일향이 나는 홍차를 과자 두 개를 사고 돌아오는 길에 '내일은 점심 장사가 끝나면 오후 두 시쯤 그녀는 약간 허기감을 가지고 홍차를 내려서 티타임을 즐기리라' 했습니다.
드디어 오늘.
토마토 짬뽕을 준비하던 그녀는 갑자기 수제비에 꽂혔습니다.
급하게 밀가루를 꺼내서 반죽기에 넣고 밀가루 반죽을 만들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짬뽕에 해산물을 넣는 대신 소고기를 넣고 숙주도 빼기로 했습니다.
첫 손님은 그녀의 단골 고객님이셨고 전화로 " 나 5분 뒤에 도착할 텐데 준비해 줘요"
"뭘로 준비해 드릴까요" " 내가 말해야 하나? 알아서 해줘요"
이 분은 영어 마을에 영어 학교 건축을 하시는 분인데 까다로우세요.
까다로우시지만 귀엽기도 하셔서 한 번 가게 어수선 할 때 ( 늘 어수선하지만) 오셔서는
"오늘은 왜 이리 난잡해" 하셔서 발끈한 그녀는 "아니 제가 남자를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는 것도 아니고 난잡은 아니다 조금 어수선하죠"라고 했더니 " 아이고 알았어요 "하며 크게 웃으셨죠.
오늘도 문 열고 들어 오시면서 "곰탕 끓였어요? 곰탕 냄새난다" 하시니 소고기 냄새가 들켰네요.
수제비와 파스타 면이 들어간 토마토 짬뽕을 너무 맛있다면서 칭찬해주셨으나
"수제비 뜯기 귀찮았지? 좀 두껍다" 하셔서 그녀는 못 들은 척하고 웃다가 다음 손님부터는 얇게 떴답니다.
손님 식사 도중에 제 인스타에 사진 보시고 dm 보내신 디 아더 손님... 우리 가게는 일상이에요.
여기서 아쉬운 것은 레몬 홍차에 버터 파운드 케이크가 있어야 하는데 좋아하던 구움 과자 가게는 없어졌고 그 가게 이외에는 맘에 드는 게 없어서 차랑 어울리는 과자로 마리와 케이크 쿠크다스로 같이 합니다.
홍차와 초콜릿은 어울리지 않아서 초콜릿과자는 패스합니다.
조용히 앞치마 벗고 차 쟁반 올려놓고 음악 들으면서 멍 때렸습니다.
책 읽기도 아까운 시간이었답니다.
클래식 라디오에서 흐르던 음악도 좋았고 11월 22일 1시 22분이라는 시간도 좋았습니다.
맹신적인 커피홀릭이지만 인생 처음으로 혼자 간 해외여행으로 홍콩을 갔었는데 (미국은 여행지 아니죠 생활지였습니다.) 쉐라톤 호텔 티타임은 혼자 즐기기엔 머쓱하고 비싸서 호텔 안 한번 휘적거려 보고 엘리베이터 두 번 타보고 지하 내려가서 고디바 초콜릿 사고 마무리 했었습니다. 그리고 백화점에 갔는데 차가 어마어마하게 많은 거였어요.
시식 코너도 잘 되어있어서 조그마한 투명 유리 주전자에 각종 허브와 과일과 홍차들이 황홀해서 어지러울 정도였습니다. 두 시간 정도 설명 듣고 차 마시고 설명 듣고 차 마시고 설명 듣고 치 주전자 사고 시식 차 마시고 차사고 했었습니다.
미국에서 돌아와 그녀의 인생이 실패감으로 반짝거릴 때였으나 어학원 강사로 돈은 생각보다 많아서 나름 사치스러운 여행이었기에 신났었거든요.
호텔도 좋은데로 사박오일, 쇼핑도 거침없이 하고 택시도 아낌없이 타고 무조건 호텔 조식 오랫동안 많이 먹고 사일 내내.
파크레인 호텔이었는데 아침에 빅토리아 파크 한 바퀴 돌고 조식 먹고 지하 IKEA 매장 구경하고 서점 가서 죽 때리고 맥도널드가서 간식 먹고 슬슬 나와서 돌아다니고 돌아다니고.
제 여행 스타일은 본전 뽑기 스타일이 아니라 좁은 반경에서 깊게 즐기는 스타일입니다.
관광지 별로 찾아가지도 않고 사진도 집착하지 않아요. 게을러터진 유형이죠.
홍콩 우산 정말 좋아요.
스콜현상이 잦아서 비 왔다가 개었다가 하니까 우산이 가볍고 튼튼하고 백화점 입구마다 우산 매장이 대단했어요. 음식은 기대보다 별로였어요. 동남아 음식도 좋아하질 않아서 베트남 가서도 늘 심드렁.
잔이 이쁜데... 아쉽게 나왔네요
미국 학생들은 립톤 홍차 네 팩에 따뜻한 우유를 한 컵 부어서 잘 마시고 그녀도 많이 얻어 마셨는데
그 저렴이 밀크티가 티라 알았었는데 레몬 띄운 얼 그레이는 또 다른 세계더라구요.
그뤠잇입니다.
한 주전자 마셨어요. 쿠크다스는 먹었지만 마리는 사진만 찍고 다시 박스로.
온도도 분위기도 너무 좋았거든요. 여기까진....
날이 좋아서 그래서 산책을 나왔어요.
그냥 가게에서 멍 때려야 했는데...
오늘의 제주 하늘.
너무 좋았는데 망할 까마귀 새끼가 제 머리를 뜯고 날아가버립니다.
나이 오십에 진정 식겁했습니다.
아주 조금은 머리에 똥 안 싸주신 까미귀 새끼님이 고맙기도 하고요.
후들거리며 가게도 돌아와 오후 장사를 하고 집에 돌아오니 ㅋㅋ 지금 몹시 아프답니다.
다시 레몬 꺼내서 엄마와 다정하게 레몬꿀차를 마시기 시작했는데 마무리는
" 넌 살 뺀다고 안 먹고 딜딜 거려서 아픈 거야 도대체 나이가 몇이야 언제까지 네 엄마 해야 하니"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