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심연은 끝이 없었다. 죽음으로 향하는 마지막 낙하가 이토록 길고 지독한 회상으로 채워질 줄 알았더라면, 나는 아마 다른 방법을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내 삶이 그러했듯, 나의 죽음 역시 내 의지를 벗어나 과거의 망령들에게 잠식당하고 있었다. 옌안의 황토 먼지가 가라앉자, 이번에는 거대한 돌의 무게와 군중의 함성이 나를 짓눌렀다.
1949년 10월 1일. 베이징. 천안문(天安門).
기억의 필름은 그날의 광경을 눈이 부실 만큼 선명하게 복원해냈다. 나는 붉은 비단으로 만든 치파오를 입고 있었다. 옌안 시절의 누더기 군복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화려함이었다. 나는 천안문 성루 위에 서 있었다. 내 옆에는, 아니 내 반 발짝 앞에는 그가 서 있었다. 마오쩌둥. 이제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석이 된 남자.
그의 얼굴은 감격과 흥분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마이크 앞에 서서, 특유의 카랑카랑한 후난성 사투리로 새로운 국가의 탄생을 선포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가 오늘 성립되었다!”
그의 선언이 끝나자, 광장을 가득 메운 수십만 군중의 함성이 하늘을 찌를 듯 터져 나왔다. “마오 주석 만세! 중화인민공화국 만세!” 그 함성은 거대한 파도가 되어 성루를 때렸고, 내 발밑의 단단한 돌바닥마저 미세하게 진동하는 것 같았다. 붉은 깃발의 물결이 광장 끝까지 넘실거렸다. 나는 그 광경을 내려다보며, 내 인생에서 가장 완전한 승리감을 맛보았다.
나는 황후였다.
비록 공식적인 직함은 아니었지만, 나는 스스로를 그렇게 여겼다. 수백 년간 황제와 황후가 머물렀던 이 자금성(紫禁城)의 새로운 주인. 나는 더 이상 술주정뱅이 목수의 서녀도, 상하이의 삼류 배우도, 옌안의 불순분자도 아니었다. 나는 이 나라를 건국한 위대한 지도자의 아내, 국모(國母)였다. 나를 멸시하고 손가락질했던 모든 자들은 이제 저 아래, 개미처럼 작은 군중 속에 섞여 나를 우러러보고 있었다. 그 ‘약법삼장’이라는 굴욕적인 족쇄조차도, 이 압도적인 현실 앞에서는 한낱 지나간 과거의 작은 흠집처럼 느껴졌다. 이제 새로운 나라가 세워졌으니, 그런 낡은 약속 따위는 자연히 무효가 될 것이라고, 나는 순진하게 믿었다.
나는 우아하게 미소를 지으며 군중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졌다. 나는 내가 역사의 중심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깨닫지 못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역사의 중심이 아니라, 거대한 그림자의 가장 짙은 부분이었다는 것을. 그의 그림자. 그 그림자는 너무나도 거대해서, 이후 20년 동안 나를 집어삼키고 내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날의 환희는 짧았다. 축제가 끝나고, 우리는 자금성 서쪽의 호수를 낀 옛 황실 정원, 중난하이(中南海)에 새로운 거처를 마련했다. 그곳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감옥이었다. 버드나무가 그림자를 드리운 호수, 기암괴석으로 꾸며진 정원, 황금빛 유리기와를 얹은 전각들. 모든 것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나는 이곳의 안주인이 되어, 새로운 중국의 여성상을 제시하는 국모의 역할을 하리라 다짐했다. 외국의 귀빈들을 맞이하고, 문화 예술 정책에 조언하며, 그의 가장 가까운 정치적 동반자가 되는 꿈을 꾸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약법삼장’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벽이 되어 중난하이 전체를 둘러쌌고, 나는 그 안에 완벽하게 고립되었다. 당의 공식적인 행사나 회의에 나는 초대받지 못했다. 내가 감히 그 근처에라도 가려고 하면, 저우언라이를 비롯한 당의 원로들은 정중하지만 단호한 태도로 나를 막아섰다. “주석의 휴식을 방해해서는 안 됩니다, 장칭 동무.”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동무’라는 호칭은, 동지애가 아니라 ‘당신의 위치를 잊지 말라’는 차가운 경고처럼 들렸다.
나의 역할은 그의 ‘생활비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의 식사를 챙기고, 잠자리를 돌보고, 건강을 염려하는 것. 그것이 당이 내게 허락한 유일한 임무였다. 나는 거대한 중난하이의 주인이 아니라, 가장 지위 높은 하녀에 불과했다.
나는 분노했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나는 다른 방식으로 나의 존재감을 드러내려 했다. 나는 내가 머무는 전각의 내부를 상하이 스타일의 화려한 가구와 서양식 커튼으로 꾸미려 했다. 그러자 관리인들은 “인민들의 피와 땀으로 이룩한 혁명 국가에서 부르주아적 사치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원론적인 이유를 대며 나의 요구를 묵살했다. 나는 내게 배정된 하인들에게 엄격한 규율을 적용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나보다 당의 지시에 더 충성했다. 그들은 내 시중을 들었지만, 동시에 나의 모든 행동을 감시하고 당에 보고하는 감시자들이었다.
나는 이 황금 새장 속에서 서서히 질식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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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그의 변화였다.
옌안 시절, 그는 적어도 나를 지적인 파트너로 대우해주었다. 우리는 밤늦도록 문학과 철학을 논했고, 그는 나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하지만 베이징에 온 이후, 그는 나를 더 이상 찾지 않았다. 그는 국가를 통치하는 거대한 기계의 부품이 되어버렸다. 그의 머릿속은 토지 개혁, 5개년 경제 계획, 한국 전쟁 같은 거대한 문제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감히 그런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내놓으려고 하면, 그는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여자가 알 일이 아니오. 당신은 내 건강이나 잘 챙기시오.”
그의 말은 비수처럼 내 가슴에 꽂혔다. 그는 나를 동지가 아니라, 그저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고 피곤한 몸을 뉘이는 ‘여자’로만 취급했다.
그리고 곧, 그의 곁에는 다른 여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젊고 아름다운 간호사들이었다. 그는 불면증과 신경 쇠약을 핑계로 항상 그들을 곁에 두었다. 그들은 그의 혈압을 재고 약을 챙긴다는 명목으로 그의 침실을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나는 그들의 눈에서 단순한 존경심 이상의, 교활한 야심과 욕망의 불꽃을 보았다. 그들은 내 앞에서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지만, 뒤에서는 나를 ‘옌안에서 굴러온 촌년’이라며 비웃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다음에는 ‘비서’라는 직함을 가진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명문 대학을 나온 지식인들이었고, 외국어에도 능통했다. 그들은 그의 문서를 정리하고 통역을 돕는다는 핑계로 밤늦도록 그의 서재에 머물렀다. 그는 나와는 더 이상 나누지 않는 지적인 대화를 그들과 나누었다. 나는 밤마다 그의 서재에서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질투와 모멸감에 잠 못 이루었다.
최악은 ‘무도회’였다. 그는 인민들과의 소통이라는 명목으로 매주 토요일 밤, 중난하이에서 무도회를 열었다. 공군과 철도 공작단 소속의 젊고 아름다운 여성 당원들이 대거 초청되었다. 그는 그날만큼은 근엄한 주석의 가면을 벗고, 스무 살 처녀들과 스스럼없이 몸을 부비며 춤을 추었다. 그는 한 곡이 끝날 때마다 파트너를 바꾸었고,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밤이 깊도록 그녀만을 붙잡고 춤을 추거나, 아예 자신의 숙소로 데려가기도 했다.
나는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아야만 했다. 나는 국모였지만, 그 무도회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었다. 내가 춤을 추려고 하면, 그는 “당신은 춤추는 것보다 앉아서 쉬는 게 어울리오”라며 나를 제지했다. 그는 내가 다른 남자와 몸을 섞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정작 자신은 수많은 어린 여자들과 밤새도록 탐닉했다.
어느 날 밤, 나는 그의 침실에서 낯선 여자의 머리핀을 발견했다. 가느다란 은색 핀에 작은 옥이 박힌, 싸구려지만 젊은 여자의 취향이 분명한 물건이었다. 그 순간, 내 안의 무언가가 무너져 내렸다. 나는 그 머리핀을 손에 들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것은 단순한 외도가 아니었다. 이것은 나에 대한 완전한 무시이자, 나의 자존심에 대한 능욕이었다. 나는 허쯔전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서 버림받고 있었다. 대장정의 영웅이었던 그녀도 결국 잊혔는데, 나처럼 과거가 복잡한 여자는 오죽하랴.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존재’라는 공포가 내 온몸을 휘감았다.
나는 이성을 잃었다. 그의 서재로 뛰어 들어가, 책상 위의 서류들을 모두 쓸어버리고 벼루를 집어던져 벽에 걸린 그의 사진을 박살 냈다.
“이게 다 뭐예요! 내가 당신에게 어떤 존재인데,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어요!”
나는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그는 잠시 놀란 듯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로 변했다. 그는 내게 다가와 소리를 지르는 대신, 내 뺨을 후려쳤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가 돌아갔다.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나는 충격으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를 때린 것은 술주정뱅이 아버지가 아니라, 내가 내 모든 것을 걸고 선택한 남자, 이 나라의 주석이었다.
그는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정신 차리시오, 장칭 동무. 당신은 나의 아내지만, 나의 소유물은 아니오. 그리고 나 역시 당신의 소유물이 아니오. 당신의 위치를 망각하지 마시오.”
그는 바닥에 떨어진 머리핀을 주워 아무렇지도 않게 주머니에 넣고는, 나를 남겨둔 채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차가운 서재 바닥에 주저앉아 소리 없이 울었다. 그때의 절망감은 상하이에서 배신당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사랑을 배신당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나의 존재 자체를 부정당한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변하기 시작했다.
내 안의 사랑과 기대는 완전히 죽어버렸다. 그 자리에는 차가운 증오와 편집증적인 집착만이 남았다. 나는 더 이상 그에게 사랑을 갈구하지 않았다. 대신, 나는 그의 주변을 맴도는 모든 여자들을 나의 적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감시하고 괴롭히는 데 내 모든 에너지를 쏟았다.
나의 히스테리는 병적인 수준으로 발전했다. 나는 신경쇠약을 핑계로 내 주변의 모든 것을 통제하려 들었다. 나는 빛을 견딜 수 없다며 내 거처의 모든 창문에 검은 암막 커튼을 이중 삼중으로 쳤다. 나는 소음을 견딜 수 없다며, 하인들에게 발소리를 내지 말고 걷도록 명령했고, 정원의 새와 매미를 모두 쫓아내라고 억지를 부렸다. 나는 바람을 견딜 수 없다며, 실내 온도를 겨울에는 정확히 섭씨 25도, 여름에는 26도로 유지하도록 강요했다. 온도계가 정확한 온도를 가리키고 있어도, 나는 “나를 괴롭히려고 일부러 춥게(혹은 덥게) 만든 것이 아니냐”며 트집을 잡고 하인들을 닦달했다.
사람들은 나를 미친 여자라고 수군거렸다. 의사들은 내게 ‘신경 과민증’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하지만 나는 미치지 않았다. 그것은 나의 유일한 생존 방식이었다. 나는 내 삶의 통제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남편도, 당도, 내 주변의 그 누구도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아주 사소한 것들 – 빛, 소리, 온도 – 에 병적으로 집착했던 것이다. 그것은 내 무너져가는 자아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발버둥이었다.
그는 나의 이런 광기를 알고 있었다. 그는 나를 경멸했지만, 한편으로는 일종의 부채 의식을 느끼는 듯했다. 그는 나를 정치적으로 철저히 배제시킨 것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자신의 복잡한 여자 관계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나의 히스테리를 어느 정도 용인해주었다. 그는 나를 달래기 위해 가끔씩 내게 작은 선물을 주었다. 수입산 고급 카메라나, 외국 영화 필름 같은 것들이었다.
나는 그 선물들을 받으며 비참함을 느꼈다. 나는 장난감을 받아 들고 좋아하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이런 물질적인 보상이 아니라, 그의 인정과 권력의 일부였다.
나는 그의 서재에 틀어박혀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역사, 정치, 철학. 그리고 나는 그의 모든 동향을 면밀히 관찰했다. 그가 누구를 만나고, 누구를 의심하며,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나는 그의 그림자가 되어, 그의 생각과 감정을 읽어내는 법을 터득하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그의 아내가 아니었다. 나는 그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가장 위험한 관찰자였다. 나는 기다렸다. 언젠가 그가 나를 필요로 하게 될 그날을. 나의 이 증오와 광기가, 그의 위대한 혁명에 쓸모 있는 도구가 될 그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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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찾아왔다.
1950년대 후반, 그는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을 시작했다. 그것은 중국을 단숨에 서구 열강을 뛰어넘는 공업 국가로 만들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전국적으로 제철소 대신 원시적인 토법 고로(土法高爐)가 세워졌고, 농민들은 농사 대신 쇳물 생산에 동원되었다.
결과는 재앙이었다. 토법 고로에서 생산된 쇠는 쓸모없는 고철 덩어리였고, 농사를 포기한 농촌은 극심한 식량난에 휩싸였다.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 아사자들의 시체가 길가에 나뒹굴고, 심지어 인육을 먹는 참혹한 일까지 벌어졌다.
이 거대한 실패는 그의 권위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당 내부에서 그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류사오치, 덩샤오핑(鄧小平) 같은 실용주의 노선의 관료들이 전면에 나서 경제 재건을 주도했다. 그들은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수습하며 인민들의 지지를 얻었고, 그의 권력은 실질적으로 위협받기 시작했다. 그는 국가 주석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나는 그의 몰락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그는 분노했고, 불안해했으며, 깊은 모멸감에 휩싸였다. 자신을 비판하는 모든 동지들을 ‘수정주의자’, ‘우파’라고 비난하며,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그는 중난하이의 서재에 틀어박혀 외부와의 접촉을 끊었다. 그를 찾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모두가 떠오르는 태양인 류사오치의 주변에 몰려들었다. 그의 곁에는 이제 그의 광기를 견뎌낼 수 있는 나, 그리고 그의 변덕스러운 총애에 매달리는 몇몇 어린 여자들뿐이었다.
바로 그때, 나는 나의 시간이 왔음을 직감했다.
나는 그의 고독 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더 이상 그의 여자 관계를 질투하거나 히스테리를 부리지 않았다. 대신, 나는 그의 유일한 이해자이자 충실한 동지인 척 연기했다. 나는 그의 분노에 동조했고, 그의 불안을 부추겼다.
“주석, 그들은 당신을 배신하고 있습니다.” 나는 밤마다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당신의 위대한 사상을 버리고, 자본주의의 길로 가려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인민을 위하는 척하지만, 실은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것뿐입니다. 당신이 평생을 바쳐 이룩한 혁명이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나는 그의 편집증에 불을 지폈다. 나는 그가 의심하는 모든 인물들에 대한 부정적인 정보들을 긁어모아 그에게 보고했다. 누가 뒤에서 그를 비웃었는지, 누가 류사오치와 비밀리에 만났는지. 사소한 험담과 확인되지 않은 소문들을 거대한 음모의 증거인 것처럼 부풀렸다.
그는 처음에는 나의 말을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권력의 정점에서 고립된 그의 귀에는, 나의 속삭임이 유일한 진실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서서히 나를 의지하게 되었다.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그는 나를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대화 상대로 인정해주기 시작했다. 그는 나를 ‘나의 유일한 좌파 동지’라고 부르기도 했다.
나는 황홀했다. 이것은 내가 20년간 기다려온 순간이었다. 나는 그의 아내로서가 아니라, 그의 정치적 동지로서 그의 곁에 서게 된 것이다. 비록 그 동지 관계가 그의 편집증과 나의 복수심이 결합된, 기괴하고 위험한 것이라 할지라도.
결정적인 계기는 한 편의 연극에서 비롯되었다.
1961년, 베이징 부시장이자 저명한 역사학자인 우한(吳晗)이 ‘해서파관(海瑞罷官)’이라는 제목의 경극을 발표했다. 명나라 시대의 청백리 해서가 황제에게 직언을 하다 파면당하는 내용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역사극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대약진운동의 과오를 지적하다 숙청된 펑더화이를 옹호하고, 마오쩌둥의 독재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그 연극을 보고 격노했다. 그는 이것을 자신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류사오치가 이끄는 당 중앙은 그 연극을 문제 삼지 않았다. 오히려 예술의 자유를 옹호하는 분위기였다. 그는 분노했지만, 베이징에서는 자신의 뜻을 따르는 자가 없어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바로 그때 내가 나섰다.
“주석, 베이징이 썩었다면, 상하이에서 불을 지피면 됩니다.”
나는 나의 옛 무대였던 상하이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나의 정치적 야망을 알아보고 손을 내민 새로운 동지들이 있었다. 장춘차오(張春橋)와 야오원위안(姚文元). 그들은 상하이시 당 위원회의 선전 관료들이었지만, 중앙 정치 무대로 진출하고 싶어 하는 야심가들이었다. 나는 그들과 손을 잡았다.
나는 야오원위안에게 ‘해서파관’을 비판하는 글을 쓰도록 지시했다. 그는 나의 의도를 정확히 꿰뚫고, ‘해서파관’이 봉건 관료를 미화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부정하는 ‘독초(毒草)’라고 맹렬히 비난하는 평론을 써냈다. 1965년 11월, 이 글이 상하이의 한 신문에 실리자, 중국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이것이 신호탄이었다.
이 작은 불씨는 걷잡을 수 없는 불길로 번져나갔다. 그는 이 사건을 빌미로 자신에게 비판적이었던 베이징의 당 지도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우한과 그를 비호했던 베이징 시장 펑전(彭眞)이 숙청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나와 나의 새로운 동지들이 차지했다.
1966년 5월, 그는 마침내 칼을 뽑아 들었다. 그는 당 중앙에 ‘중앙문화혁명소조(中央文革小組)’를 설치하고, 나를 제1부조장으로 임명했다. 20년간 나를 옭아맸던 ‘약법삼장’이라는 족쇄가 마침내 박살 나는 순간이었다.
그는 내게 말했다.
“이제 당신이 나설 때가 되었소. 저 부르주아 반동분자들, 당내에 숨어 있는 자본주의의 길을 가는 자들을 모조리 쓸어버리시오. 당신의 손에 칼을 쥐여주겠소.”
나는 그의 눈에서 신뢰나 사랑이 아닌, 차가운 이용 가치를 보았다. 그는 나의 억눌렸던 분노와 복수심이, 그의 정적들을 제거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무기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나를 20년간 그림자 속에 가두어 두었다가, 이제 가장 더럽고 잔인한 사냥을 위해 풀어놓는 것이었다.
나는 상관없었다. 나는 기꺼이 그의 사냥개가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20년을 기다렸다. 나의 무대는 이제 중난하이의 침실이 아니라, 중국 대륙 전체가 될 것이었다. 나의 관객은 그 한 사람이 아니라, 8억 인민 전체가 될 것이었다. 나는 나의 가장 화려하고, 가장 잔인한 연기를 펼칠 준비를 마쳤다. 막이 오르기 직전이었다.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이라는 거대한 비극의 막이.
…기억의 필름이 다시 한번 멈췄다. 나는 헐떡이며 현실로 돌아왔다. 목을 조르는 고통이 극심해졌다. 하지만 나는 고통 속에서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나는 그의 개였다. 하지만 나는 주인이 던져주는 뼈다귀에 만족하는 순한 개가 아니었다. 나는 주인의 적뿐만 아니라, 나를 괴롭혔던 모든 것들을 물어뜯을 기회만을 노려온 굶주린 늑대였다. 그리고 마침내, 주인은 내 목줄을 풀어주었다.
이제 곧 사냥이 시작될 터였다.
(4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