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이 풀어준 개

by 남킹


목을 옥죄는 압박감이 절정에 달했다. 폐 속의 마지막 공기 한 방울까지 짜내어지자, 시야가 터널처럼 좁아지며 그 끝에서 붉은 빛이 아른거렸다. 그것은 죽음의 빛이 아니었다. 그것은 혁명의 빛, 피의 빛, 광기의 빛이었다. 기억의 영사기는 1966년 여름, 중국 대륙을 뒤덮었던 그 거대한 붉은 물결의 한가운데로 나를 데려다 놓았다.

나는 천안문 성루 위에 다시 서 있었다. 17년 전, 건국을 선포하던 그 자리였다. 하지만 풍경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광장은 이제 붉은 완장을 찬 수백만의 홍위병(紅衛兵)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손에 작은 붉은 책, 『마오 주석 어록』을 들고 미친 듯이 흔들며 함성을 질렀다. 그들의 얼굴은 젊음의 열기와 맹목적인 신념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그들은 십대 소년 소녀들이었지만, 그들의 눈빛은 낡은 세계를 파괴하기 위해 태어난 신의 군대처럼 광기로 번뜩였다.

“마오 주석 만세! 조반유리(造反有理)!”

반란에는 이유가 있다. 그가 홍위병들에게 내려준 이 한마디는, 모든 권위와 질서를 파괴할 수 있는 면죄부가 되었다. 학생들은 스승을 구타하고, 자식들은 부모를 고발했다. 수천 년 동안 중국 사회를 지탱해온 모든 가치와 윤리는 하룻밤 사이에 ‘봉건의 잔재’가 되어 박살 났다. 사원은 불탔고, 고서는 찢겼으며, 지식인들은 ‘우귀사신(牛鬼蛇神, 온갖 잡귀신)’으로 몰려 인민재판의 제물이 되었다. 중국 전체가 거대한 광란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광란의 지휘자였다.

나는 군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평범한 군복이 아니었다. 나는 내 몸에 맞게 허리선을 잘록하게 고치고, 여성미를 강조하는 디자인으로 개조한 옷을 입었다. 그것은 나의 새로운 갑옷이자, 나의 권위를 상징하는 무대 의상이었다. 내 옆에는 그가 서 있었다. 그는 나이 들어 보였지만, 자신을 향한 맹목적인 숭배의 함성을 들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이 거대한 혼돈의 배후에 있는 신(神)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뜻을 지상에 실현하는 대리인이자, 가장 열성적인 여사제였다.

나는 마이크를 잡았다. 수백만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나는 더 이상 그의 그림자 속에 숨어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나는 당당히 그의 옆에 서서, 혁명을 이끄는 지도자였다. 중앙문화혁명소조 제1부조장. 그것은 나의 공식적인 직함이었다. 실질적으로, 나는 류사오치나 덩샤오핑 같은 당의 최고 원로들보다 더 큰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홍위병들의 공격 목표가 되어 실각 직전에 몰려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내 목소리는 확성기를 통해 천안문 광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혁명 동지 여러분! 어린 홍위병 전사 여러분!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혁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속, 낡은 습관을 타파해야 합니다! 당내에 숨어 있는 자본주의의 길을 가는 당권파들을 끌어내어 박살 내야 합니다! 마오 주석의 위대한 사상으로 온 세상을 붉게 물들입시다!”

내 연설이 끝나자, 광장은 다시 한번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홍위병들은 내 이름을 연호했다. “장칭 동무 만세!”

아, 그 순간의 희열이란! 상하이의 작은 극장에서 받았던 박수 소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한 나라 전체를, 8억 인민의 운명을 내 손안에 쥐고 흔드는 듯한 전능감이었다. 20년간 억눌려왔던 나의 모든 욕망이, 나의 모든 분노와 복수심이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완벽하게 정당화되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개인적인 복수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위해, 마오 주석을 위해, 그리고 역사의 발전을 위해 ‘해로운 벌레’들을 청소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날, 내 안에 남아있던 마지막 한 조각의 양심마저 완벽하게 불태워버렸다. 나는 기꺼이 괴물이 되기로 결심했다. 아니, 나는 이미 괴물이었다. 다만 이제야 내 본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완벽한 무대를 만났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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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문화혁명소조의 사무실은 댜오위타이(釣魚臺) 국빈관의 한 건물에 마련되었다. 그곳은 나의 왕국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장춘차오, 야오원위안, 그리고 새롭게 발탁된 상하이의 노동자 출신 왕훙원(王洪文)과 함께 ‘4인방(四人幫)’이라 불리는 권력의 핵심을 형성했다. 우리는 매일 밤 모여, 다음에 제거할 ‘적’들의 명단을 작성했다.

우리의 첫 번째 목표는 문화 예술계였다. 그것은 나의 전문 분야이자, 나의 가장 깊은 원한이 서려 있는 곳이었다. 나는 상하이 시절 나를 무시하고 멸시했던 모든 배우, 감독, 작가, 평론가들의 이름을 잊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작품을 ‘독초’로 규정하고, 그들을 ‘반혁명 수정주의 분자’로 낙인찍었다.

홍위병들은 나의 충실한 사냥개였다. 내가 손가락으로 목표를 가리키기만 하면, 그들은 떼로 몰려가 상대를 물어뜯었다. 한때 중국 최고의 배우로 칭송받던 자오단(趙丹), 상하이 시장을 지냈던 연극계의 거물 천이(陳毅)의 동료들. 그들은 모두 조리돌림을 당하고, 머리를 깎이고, 얼굴에 먹칠을 한 채 ‘나는 인민의 적이다’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목에 걸고 거리를 끌려다녔다. 그들의 집은 약탈당했고, 그들의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많은 이들이 굴욕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는 그들의 비참한 최후를 보고받으며, 차가운 만족감을 느꼈다. 이것은 정의의 실현이었다. 감히 나, 장칭을 무시했던 자들의 당연한 말로였다.

나는 특히 전통 예술에 대한 파괴에 앞장섰다.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경극(京劇)은 ‘봉건 지배계급의 사상을 담은 쓰레기’로 규정되었다. 나는 모든 전통 경극의 상연을 금지시켰다. 대신, 나는 ‘혁명 현대 경극’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냈다. ‘홍등기(紅燈記)’, ‘사가병(沙家浜)’ 같은 작품들이었다. 그 내용은 한결같았다. 노동자, 농민, 병사가 주인공이 되어, 마오쩌둥 사상으로 무장하고 계급의 적들과 싸워 승리한다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인간의 복잡한 감정이나 예술적 깊이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정치적 구호와 흑백논리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문화의 파괴자’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고 있다고 믿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위한, 오직 혁명만을 위한 순수한 예술. 나는 스스로를 예술의 혁명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심,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전통 예술을 파괴하는 진짜 이유는, 내가 그 세계에서 결코 최고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의 재능은 그 수백 년의 깊이를 따라갈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예 그 무대 자체를 부숴버리고, 나만이 규칙을 정할 수 있는 새로운 무대를 만들었던 것이다.

문화계를 초토화시킨 나의 칼날은 이제 당과 정부의 고위 간부들을 향했다. 그들은 ‘약법삼장’으로 나를 옭아맸던 바로 그 원수들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복수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나의 가장 큰 목표는 국가 주석 류사오치와 그의 아내 왕광메이(王光美)였다. 류사오치는 대약진운동의 실패 이후 그를 대신하여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해온 인물이었다. 그는 그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이자, 잠재적인 위협이었다. 하지만 내가 류사오치를 증오한 이유는 단순히 정치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나는 그의 아내, 왕광메이를 병적으로 질투하고 증오했다.

왕광메이는 내가 갖지 못한 모든 것을 가진 여자였다. 그녀는 명문 푸런(輔仁) 대학 출신의 물리학도였고,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지식인이었다. 그녀는 명문가의 딸로 태어나 우아한 기품과 세련된 매너를 지니고 있었다. 1963년, 그녀가 류사오치와 함께 인도네시아를 방문했을 때, 몸에 딱 붙는 하얀 치파오를 입고 진주 목걸이를 한 그녀의 사진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사람들은 그녀를 중국의 재클린 케네디라고 불렀다.

나는 그 사진을 보고 분노에 치를 떨었다. 감히, 나의 자리를 넘보다니! 중화인민공화국의 퍼스트레이디는 나, 장칭이어야만 했다. 저 여자처럼 자본주의적 허영에 물든 여자가 아니라. 나는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고 싶었다. 그녀의 아름다움, 그녀의 명성, 그녀의 남편, 그리고 그녀의 자존심까지.

나는 류사오치를 ‘당내 최대의 자본주의 길을 가는 당권파’이자 ‘중국의 흐루쇼프’로 규정하고 총공세를 펼쳤다. 홍위병들은 나의 지휘 아래 중난하이로 몰려가 류사오치의 집을 포위하고 밤낮으로 구호를 외치며 그를 비난했다.

그리고 나는 왕광메이를 위한 특별한 무대를 준비했다.

1967년 4월, 나는 칭화(淸華) 대학에서 30만 군중이 모인 가운데 왕광메이 비판 대회를 열었다. 나는 홍위병들에게 그녀가 인도네시아에서 입었던 바로 그 몸에 딱 붙는 치파오와 하이힐, 그리고 진주 목걸이를 찾아오게 했다. 물론, 진주 목걸이는 가짜였다. 진짜는 이미 홍위병들이 그녀의 집을 약탈할 때 사라진 뒤였다. 나는 가짜 진주 목걸이 대신, 탁구공을 꿰어 만든 우스꽝스러운 목걸이를 그녀의 목에 걸게 했다.

왕광메이는 수십만 군중 앞에 끌려 나왔다. 그녀는 억지로 그 ‘부르주아적’인 옷을 입고, 탁구공 목걸이를 건 채 고개를 숙여야 했다. 홍위병들은 그녀에게 돌을 던지고 침을 뱉으며 “타도 왕광메이!”를 외쳤다. 나는 주석단 위에서 그 광경을 내려다보며, 내 평생 가장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한때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던 그 우아한 여인이, 이제 나의 발아래서 벌레처럼 짓밟히고 있었다.

류사오치는 모든 직위에서 박탈당하고 감금되었다. 그는 혹독한 고문과 학대 속에서 지병인 당뇨병 치료도 받지 못한 채, 1969년 감옥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왕광메이 역시 12년간 감옥에 갇혔다. 그녀가 풀려났을 때, 그녀는 고문 후유증으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폐인이 되어 있었다.

나는 나의 가장 큰 정적을 제거했다. 하지만 나의 복수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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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광기는 끝이 없었다. 나는 내 과거의 모든 상처를 들쑤셔, 그 상처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찾아내어 파멸시켰다.

상하이 시절, 내가 탐냈던 연극 배역을 차지했던 여배우 왕잉(王瑩)이 있었다. 그녀는 나보다 연기도 잘했고 인기도 많았다. 심지어 미국으로 건너가 백악관에서 루스벨트 대통령 부부를 위해 공연까지 했다. 나는 그녀를 ‘미국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체포했다. 그녀는 감옥에서 7년간의 고문 끝에 옥사했다. 나는 그녀가 죽었다는 보고를 받고, 며칠 동안 기분이 좋았다.

저우언라이의 양녀였던 여배우 쑨유스(孫維世)도 나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녀는 모스크바에서 유학한 재원으로, 빼어난 미모를 자랑했다. 그가 한때 그녀에게 관심을 보였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가 죽을 이유는 충분했다. 나는 그녀가 ‘소련 수정주의 스파이’라고 모함했다. 그녀는 체포되어 7개월간 온갖 잔혹한 고문을 당했다. 나중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녀는 간수들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한 뒤 머리에 대못이 박혀 죽었다고 했다. 나는 그 소문을 듣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감히 나의 남자를 넘본 여자의 당연한 최후라고 생각했다.

나의 과거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나의 숙청 대상이 되었다. 상하이 시절의 동료, 애인, 나를 취조했던 국민당 경찰, 심지어 나의 집에서 일했던 하녀까지. 나는 그들이 나의 치부를 폭로할까 봐 두려웠다. 나는 그들을 모두 감옥에 가두거나, ‘사고’로 위장하여 죽여 버렸다. 나는 나의 과거를 완벽하게 세탁하고, 오직 위대한 혁명가 장칭의 역사만을 남기고 싶었다.

나의 잔혹함은 당의 원로들에게까지 미쳤다. 한때 ‘약법삼장’으로 나의 결혼을 반대했던 주더, 펑더화이, 천이 같은 인물들은 모두 홍위병들의 비판 대상이 되어 공개적인 모욕을 당하고 실각했다. 나는 특히 저우언라이를 제거하고 싶었다. 그는 언제나 점잖고 신중한 태도 뒤에 날카로운 비수를 감추고 있는, 나의 가장 껄끄러운 상대였다. 그는 그와 나의 세력 사이에서 교묘하게 줄타기를 하며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주변 인물들을 하나씩 숙청하며 그의 숨통을 조여갔지만, 그는 용케도 살아남았다. 그는 그가 가장 신임하는 방패막이였기 때문이다.

권력의 정점에 오르자, 나는 이전보다 더 심한 편집증과 불안감에 시달렸다. 나는 언제나 암살의 위협에 떨었다. 낯선 사람이 다가오거나 갑작스러운 소리가 들리면 경기를 일으키며 쓰러졌다. 나는 내가 머무는 댜오위타이의 경비를 삼엄하게 만들었다. 내가 먹는 모든 음식은 독이 들었는지 검사해야 했고,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몸수색을 받아야 했다.

나의 생활은 사치의 극을 달했다. 인민들은 굶주리고 있었지만, 나는 홍콩에서 공수한 최고급 식자재로 만든 음식을 먹었다. 모든 인민들에게 애완동물을 기르는 것이 금지되었지만, 나는 원숭이와 개를 길렀다. 나는 사진 촬영이라는 새로운 취미에 빠졌다. 내가 사진을 찍기 위해 좋은 구도를 원한다고 말하면, 군함이 동원되어 대공포를 쏘아 배경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나는 수영을 하기 위해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광천수를 끌어와 개인 수영장을 만들었다. 내가 이동할 때면 전용기와 전용 열차가 항상 대기했고, 나의 변덕 때문에 전국의 항공과 철도 교통이 마비되는 일이 잦았다.

나는 이런 행동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하게 생각했다.

“내가 잘 쉬고 좋은 시간을 보내야, 인민을 위해 더 잘 봉사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진심으로 내가 인민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고 믿었다. 내가 제거하는 모든 ‘적’들은 인민의 피를 빠는 해충들이고, 내가 누리는 모든 사치는 위대한 혁명 지도자에게 마땅히 주어져야 할 보상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권력이라는 독에 중독되어, 현실 감각을 상실한 괴물이 되어 있었다. 나는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하인처럼 부리고, 도구처럼 이용했다. 내 비서는 훗날 이렇게 증언했다. 내가 서서 말하면 건방지다고 화를 냈고, 쪼그리고 앉아서 말하라고 명령했다고. 내가 큰 소리로 빠르게 말하면 머리가 아프다고 화를 냈고, 작은 소리로 느리게 말하면 알아들을 수 없다고 짜증을 냈다고.

그는 나의 이런 광기를 모두 알고 있었다. 그는 때때로 나의 지나친 행동을 제지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방관했다. 그는 내가 필요했다. 그의 손을 직접 더럽히지 않고, 그의 정적들을 제거해 줄 더러운 개가 필요했다. 그는 나의 광기를 이용하여 자신의 절대 권력을 공고히 하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이용하는 완벽한 공생 관계였다. 하지만 나는 몰랐다.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주인에게 가장 먼저 버려진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사냥의 끝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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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의 광풍이 10년간 중국 대륙을 휩쓸었다. 그 기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얼마나 많은 문화유산이 파괴되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수백만, 혹은 수천만. 그것은 숫자로 헤아릴 수 없는 거대한 비극이었다.

1971년, 예상치 못한 사건이 터졌다.

그의 후계자로 공식 지명되었던 국방부장 린뱌오(林彪)가 쿠데타를 기도했다가 실패하고, 소련으로 도망치던 중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한 것이다. 이 사건은 중국 전체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가장 충성스러운 동지이자 후계자가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는 사실에, 그는 깊은 충격과 배신감에 빠졌다. 그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린뱌오의 몰락은 우리 4인방에게는 새로운 기회였다. 권력의 공백이 생긴 것이다. 우리는 그 공백을 차지하기 위해 더욱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우리는 ‘비림비공(批林批孔, 린뱌오와 공자를 비판한다)’ 운동을 일으켜, 린뱌오의 잔당을 숙청한다는 명분 아래 우리의 잠재적 정적들을 공격했다. 우리의 주된 목표는 저우언라이와, 그가 병상에서 복권시킨 덩샤오핑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우리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10년간의 혼란과 파괴에 인민들은 지쳐 있었다. 그들은 안정을 원했다.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이 추진하는 실용주의 노선은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었다. 반면, 끝없는 투쟁과 숙청을 외치는 우리 4인방은 점점 고립되어 갔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그의 태도 변화였다.

그는 늙고 병들었다. 그는 더 이상 혁명의 불길을 통제할 힘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죽은 뒤에 중국이 어떻게 될지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는 우리가 나라를 안정적으로 이끌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서서히 우리를 경계하고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내게 “당신은 야심이 너무 크다”, “4인방을 만들지 말라”고 여러 차례 경고했다. 그는 나의 정치 활동을 제한했고, 심지어 중난하이에 있는 자신의 집에 출입하는 것조차 막았다. 나는 다시 20년 전의 그 그림자 속으로 밀려나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나는 그의 애첩들에게 잘 보여야만 간신히 그의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1976년 1월, 저우언라이가 암으로 사망했다. 인민들은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했다. 수백만의 군중이 자발적으로 거리로 나와 그의 영구차를 따랐다. 그의 장례식에서, 나는 슬픈 표정을 짓는 대신 오만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러자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저 마녀를 두들겨 패라!” 그 함성은 순식간에 번져나갔다. 나는 그들의 증오 어린 눈빛을 보며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인민들이 나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같은 해 4월, 인민들은 저우언라이를 추모하기 위해 천안문 광장에 모였다. 이 추모 집회는 곧 우리 4인방을 비판하고 덩샤오핑을 지지하는 반정부 시위로 발전했다. 우리는 이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것이 1차 천안문 사태다. 우리는 덩샤오핑을 이 사태의 배후로 지목하고 그를 다시 실각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이것은 우리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1976년 9월 9일. 그가 죽었다.

나의 신, 나의 주인, 나의 방패막이. 나를 괴물로 만들고, 나의 광기를 이용했던 그 남자가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의 임종을 지켰다. 그의 숨이 멎는 순간, 나는 슬픔보다 더 큰 공포를 느꼈다. 태양이 사라진 것이다. 이제 나를 지켜줄 그림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그의 죽음을 애도할 틈도 없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움직였다. 나는 그의 후계자로 지명된 화궈펑(華國鋒)을 무시하고, 내가 그의 유일한 계승자라고 주장했다. 나는 상하이의 군사력과 언론을 장악하고, 마지막 결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때는 너무 늦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있었다. 군부의 원로 예젠잉(葉劍英), 당의 새로운 실세 화궈펑, 그리고 실각했지만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덩샤오핑의 세력. 그들은 나를 제거하기 위해 비밀리에 손을 잡았다.

10월 6일 밤. 나는 중난하이에 있는 내 거처에서 체포되었다. 그들은 총을 든 군인들과 함께 들이닥쳤다. 나는 저항했다.

“감히 누구의 명령으로 나를 체포하는 것이냐! 주석의 시신이 채 식기도 전에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냐!”

나의 절규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흩어졌다. 그들은 나를 돼지처럼 끌고 나갔다. 나의 왕국은 하룻밤 사이에 무너져 내렸다. 내가 휘두르던 칼은 이제 나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주인이 풀어준 개. 사냥이 끝나자, 주인 없는 개는 사냥꾼들의 손에 붙잡혔다. 그들은 나를 우리에 가두고, 모든 죄를 뒤집어씌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문화대혁명이라는 거대한 사냥터에서 흘려진 모든 피에 대한 책임을.

…기억의 영사기가 멈추고, 다시 붉은 안개가 시야를 가렸다. 그래, 나의 연극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가장 화려했던 순간, 가장 잔인했던 순간, 그리고 가장 비참했던 순간. 모든 것이 한 편의 악몽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는 주인의 개였을 뿐이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도 알고 있었다. 나는 단순한 개가 아니었다. 나는 개이기를 선택했고, 그 역할을 즐겼으며, 주인이 명령한 것 이상으로 수많은 죄를 저질렀다.

이제 그 모든 죄의 값을 치를 시간이 온 것이다.

(5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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