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러진 꽃, 어린 신부의 비탄

by 남킹

이전의 두 영혼이 남긴 격렬한 감정의 파고가 가라앉자, 경당의 침묵은 이전과는 다른 성질의 것으로 변모했다. 후작 부인의 회한이 남긴 것이 묵직한 납의 무게였다면, 혁명가의 아내가 남긴 것은 불타는 쇳가루의 매캐함이었다. 그러나 뒤이어 공간을 채운 것은 무게도, 열기도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가을 새벽녘, 거미줄에 맺혔다가 금세 스러져 버릴 이슬방울의 미세한 떨림, 혹은 방금 연주가 끝난 류트(lute)의 현 위에 아직 남아있는 가냘픈 여운과도 같은 것이었다.

새롭게 나타난 형상은 다른 영혼들처럼 어둠을 응축하거나 빛을 발산하여 스스로의 윤곽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빗속에 너무 오래 방치된 수채화처럼, 존재의 경계가 희미하게 번져나가며 주변의 어둠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실체라기보다는 하나의 인상, 혹은 기억의 잔향에 가까웠다. 햇살 아래 반짝이던 금발의 기억이 창백한 금빛의 아지랑이로, 봄의 야생화로 수놓았던 머슬린 드레스의 기억이 찢겨진 달빛 조각들로, 그리고 생전의 웃음소리가 이제는 들릴 듯 말 듯한 유리 풍경 소리로 남아 그녀의 형체를 위태롭게 구성하고 있었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하나의 깨어진 오르골 상자였다. 태엽이 끊겨 멜로디는 멈추었지만, 그 안에는 아직 사랑의 노래가 아련한 향기처럼 배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엘레오노르(Eléonore)였다. 그녀는 왕당파 청년 장교의 아내였으나, 그녀의 비극은 왕관이나 삼색기, 혹은 그 어떤 거창한 이념의 편에도 속해있지 않았다. 그녀의 비극은 너무나 작고, 너무나 사적이고, 너무나 완벽했기에 오히려 이 거대한 혁명의 광기 속에서 가장 이질적이고도 순수한 고통의 결정체로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앙투안의 정신에 닿았을 때, 그것은 마리안의 차가운 수정음도, 소피의 불타는 강철음도 아니었다. 그것은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의 천사가 켤 법한 비올라 다모레(viola d'amore)의 선율처럼, 슬픔으로 공명하는 부드럽고 미세한 진동이었다.

『신부님…』 그 목소리는 기도를 구하는 자의 것이 아니라, 길을 잃은 아이가 제 이름을 잊어버리기 직전에 내뱉는 마지막 속삭임 같았다. 『저는 고해할 죄가 없습니다. 저는 원망할 적도 없습니다. 제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행복했다는 죄입니다. 제게 적이 있다면, 그것은 제 작은 세상을 시기한 시간, 바로 그 자체이겠지요. 저분들처럼, 저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저 그 수레바퀴가 비켜 가는 길가의 작은 정원에서, 저만의 꽃을 피우고 싶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길가의 작은 꽃 한 송이조차 용납하지 않는 거대한 맹수였더군요.』

앙투안의 의식 속에, 엘레오노르의 잃어버린 낙원, 그녀의 '작은 정원'이 펼쳐졌다. 그것은 베르사유의 기하학적 오만도, 루소의 철학적 자연도 아니었다. 그것은 파리 마레(Marais) 지구의 낡은 저택 뒤편에 숨겨진, 담쟁이덩굴이 벽을 감싸고 라벤더와 로즈마리 향기가 햇살 속에 잠자고 있는 작은 뜰, 그녀만의 호르투스 콘클루수스(hortus conclusus), 즉 '닫힌 정원'이었다. 세상의 모든 이념과 광기가 그 돌담 너머에서 포효하는 동안, 그곳은 시간의 흐름마저 멈춘 듯한, 작고 완전한 우주였다.

『사람들은 혁명을 이야기했지만, 제게 혁명은 올리비에(Olivier)의 푸른 눈동자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기억의 강물을 따라 부드럽게 흘러갔다. 『그와 처음 만난 것은, 아직 세상이 찢어지기 전의 마지막 봄이었습니다. 저는 수녀원 학교를 막 졸업한 열일곱 살의 소녀였고, 그는 왕실 근위대의 젊은 소위였지요. 그의 제복에 달린 금실 단추가 봄 햇살에 반짝일 때, 저는 그것이 아폴론의 수금(竪琴)에서 튕겨 나온 빛의 입자라고 믿었습니다. 그가 제 손등에 입을 맞추었을 때, 그의 입술의 감촉은 단순한 육체적 접촉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계시, 제 존재의 모든 세포를 일깨우고 제 영혼의 잠든 현들을 일제히 울리게 하는 신성한 언약이었습니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사랑은 하나의 정교한 의식으로, 감각의 예배로 재구성되었다. 그들의 사랑은 육체의 탐닉 이전에 영혼의 합일을 추구하는 기사도 문학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우리의 결혼 생활은 반년 남짓, 계절이 두 번 바뀌는 찰나의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 속에 영원이 담겨 있었지요. 아침에 눈을 뜨면, 창문으로 스며든 햇살이 그의 금발을 후광처럼 물들이는 것을 보는 것이 저의 기도였습니다. 그의 손가락이 제 머리카락을 빗어 넘길 때, 저는 제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성유(聖油)로 축성받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책을 읽고, 하프시코드를 연주하고, 정원의 늙은 살구나무 아래서 서투른 시를 지어 서로에게 읊어주었습니다. 그의 육체는 제게 탐닉의 대상이 아니라, 제가 길을 잃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유일한 닻이었고, 제 육체는 그의 지친 영혼이 쉬어갈 수 있는 유일한 성소였습니다. 우리의 침대는 전장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두 개의 강이 만나 하나의 바다를 이루는, 고요하고도 완전한 합일의 공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살결 아래에서, 플라톤이 말한 잃어버린 반쪽을 마침내 찾아낸 안도감으로 떨었습니다.』

그녀의 육체에 대한 묘사는 관능적이면서도 성스러웠다. 그것은 장 이브 타디에(Jean-Yves Tadié)가 분석한 프루스트의 문장처럼, 감각적 편린들이 모여 하나의 형이상학적 진실을 구축하는 과정이었다.

『올리비에는 가끔 왕당파 동료들과 만나 시국을 논하곤 했습니다. 그는 국왕 폐하의 신성함과 프랑스의 영광을 믿었지만, 그의 신념은 저 후작 부인의 남편처럼 오만으로 무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신념은 차라리 기사의 맹세처럼, 순수하고 낭만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는 지켜야 할 아름다운 것들—왕비의 미소, 프랑스의 역사, 그리고 저와의 사랑—을 위해 기꺼이 검을 들 준비가 되어 있었지요. 하지만 그는 피를 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저녁이 되면 언제나 제게 돌아와, 화약 냄새 대신 정원의 흙냄새를 묻히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아킬레우스가 아니라, 헥토르였습니다. 영광을 위해 싸우는 영웅이 아니라, 자신의 가정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남자였습니다.』

『저는 정치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지롱드니, 자코뱅이니 하는 말들은 제게 라틴어 문법만큼이나 이질적이고 무의미했습니다. 제게 유일한 법은 올리비에의 심장 박동이었고, 유일한 국가는 그의 팔이 만들어주는 울타리 안이었습니다. 저는 제 행복이 너무나 작고 사적인 것이기에, 역사의 거대한 폭풍우가 감히 넘보지 못하리라 믿는 어리석음을 저질렀습니다. 마치 폭풍우 치는 바다 한가운데서, 자신의 조개껍데기 속은 안전하리라 믿는 소라게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폭풍우는 조개껍데기를 가만두지 않았다. 혁명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소리와 냄새와 감촉으로 그녀의 닫힌 정원을 침범해왔다.

『어느 날부터인가, 돌담 너머의 세상이 낯선 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멀리서 들려오는 군중의 함성이었고, 그 다음에는 밤의 정적을 깨는 경종(tocsin) 소리였습니다. 올리비에는 저를 안심시키려 애썼지만,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제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림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정원의 공기마저 변해갔습니다. 라벤더 향기 속에, 언제부턴가 피와 먼지와 공포의 냄새가 희미하게 섞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담쟁이덩굴 위로 날아와 앉던 새들은 더 이상 노래하지 않았고, 밤이 되면 정체 모를 그림자들이 담벼락 아래를 서성거렸습니다. 우리의 작은 낙원은 보이지 않는 포위망에 갇혀, 서서히 질식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운명의 그날이 왔다. 그날은 9월 학살(September Massacres)의 광기가 아직 채 가시지 않은, 파리의 공기가 피비린내로 질척거리던 어느 오후였다.

『올리비에는 부상당한 동료를 돌보기 위해 잠시 집을 비운 상태였습니다. 저는 창가에 앉아 그의 군복에 떨어진 단추를 달고 있었습니다. 바늘이 천을 꿰뚫는 규칙적인 소리가, 제 불안한 심장을 진정시켜주는 유일한 것이었지요. 바로 그때였습니다. 대문이 부서지는, 마치 거대한 짐승이 뼈를 으스러뜨리는 듯한 끔찍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심장이 발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 손에서 바늘과 골무가 굴러떨어졌습니다. 제 작은 세계의 질서가 무너지는 첫 번째 신호였습니다.』

『그들이 들이닥쳤을 때, 저는 그들을 인간으로 인식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얼굴과 이름과 개성을 가진 존재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의 거대한, 머리가 여럿 달린 히드라(Hydra)였습니다. 땀과 싸구려 와인과 증오의 악취를 풍기는, 수십 개의 팔과 다리를 가진 하나의 끔찍한 육체. 그들의 눈은 이성이나 연민의 빛이 전혀 없는, 오직 파괴와 탐욕의 욕망만이 번들거리는 짐승의 눈이었습니다. 그들은 ‘왕당파의 암캐’를 찾으러 왔다고 소리쳤습니다.』

엘레오노르의 목소리는 이제 가냘픈 비명을 억누르는 듯한, 숨 막히는 떨림으로 가득 찼다. 앙투안의 정신은 그녀가 겪었던 육체적 공포의 모든 감각을 남김없이 공유해야 했다. 이것은 이념의 충돌이 아니라, 문명이 야만에게, 아름다움이 추함에게 무참히 유린당하는 원초적인 장면이었다.

『한 사내의 거친 손이 제 머리채를 움켜쥐었습니다. 두피가 통째로 벗겨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저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졌습니다. 그 순간, 제 몸은 더 이상 제 영혼의 성소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저 그들의 분노와 욕정을 배설할 수 있는 하나의 대상, 하나의 ‘고깃덩어리’로 전락했습니다. 제 드레스가 찢겨 나가는 소리는, 제 피부가 통째로 벗겨지는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차가운 공기가, 그리고 수십 개의 탐욕스러운 시선이 제 맨살에 와 닿았을 때, 저는 제가 겪는 고통보다, 제가 올리비에와 나누었던 가장 신성한 공간이 더럽혀지고 있다는 그 치욕감에 정신을 잃을 것 같았습니다.』

『그들의 손이 제 몸을 더듬었습니다. 올리비에의 손길이 사랑과 경배의 기도였다면, 그들의 손길은 모욕과 약탈의 낙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제 몸의 모든 부분을, 한때는 사랑의 언어가 머물던 그 모든 곳을, 자신들의 더러운 손가락으로 값을 매기고 모독했습니다. 저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구멍에서는 공기 새는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저항하려 했지만, 제 팔다리는 마치 다른 사람의 것처럼 무겁고 무력했습니다. 저는 오르페우스(Orpheus)를 잃고 지옥의 망령들에게 둘러싸인 에우리디케(Eurydice)였습니다. 아니, 저는 차라리 아폴론에게 쫓기다 월계수로 변해버린 다프네(Daphne)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차라리 감각 없는 나무가, 돌이 되기를.』

『한 사내가 제 위로 올라탔을 때, 그의 몸무게는 단순한 물리적 압력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추함과 악의가 제 영혼을 짓누르는 무게였습니다. 그의 숨결에서 풍기는 마늘과 술 냄새가 제 얼굴에 쏟아졌고, 저는 그 순간 제 영혼이 육체로부터 완전히 분리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 몸은 그곳에 남아 찢기고 더럽혀졌지만, 제 의식은 천장으로 떠올라, 마치 낯선 연극을 보듯 그 끔찍한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저 가련한 여자는 누구일까. 왜 저렇게 고통스럽게 몸부림치고 있을까. 아, 저것이 바로 나로구나. 한때는 사랑받았던, 엘레오노르로구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그들이 제 몸에서 자신들의 욕망을 모두 쏟아내고 떠나갔을 때, 저는 부서진 인형처럼 바닥에 버려져 있었습니다. 온몸이 찢어지고 멍든 고통보다, 제 존재 자체가 지워져 버렸다는 공허함이 더 컸습니다. 제 몸은 더 이상 저의 집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폐허가 된 신전, 우상이 파괴되고 제단이 더럽혀진, 버려진 공간이었습니다. 저는 간신히 눈을 떴습니다. 창밖으로, 정원의 살구나무 가지가 보였습니다. 그 나뭇가지에, 얼마 전 올리비에가 저를 위해 매어주었던 작은 리본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 리본을 보는 순간, 저는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녀의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차라리 더 잔인한 비극의 서막에 불과했다.

『바로 그때, 올리비에가 돌아왔습니다. 그는 대문이 부서진 것을 보고, 제 이름을 비명처럼 부르며 뛰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보았습니다. 바닥에 피와 정액으로 범벅이 된 채 쓰러져 있는 저를. 그의 얼굴에 떠올랐던 그 표정을, 저는 죽어서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슬픔도 분노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신이 자신이 창조한 세상이 파괴되는 것을 목격했을 때의, 그런… 절대적인 절망이었습니다. 그는 제게 달려오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아직 집 안에 숨어 있던 마지막 한 놈이, 뒤에서 그의 머리를 쇠막대로 내리쳤습니다.』

『저는 올리비에가 쓰러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마치 거대한 나무가 뿌리째 뽑히듯 무너져 내리는 것을. 그의 푸른 눈동자, 제게는 세상의 모든 하늘이었던 그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제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그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제 의식은… 거기서 끊겼습니다.』

엘레오노르의 영혼은 이제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흐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고통은 앙투안의 심장을 얼음 송곳으로 찌르는 듯했다. 이것은 이념의 희생이 아니었다. 이것은 순수한 악의, 그 자체였다.

『신부님, 저는 제가 어떻게 죽었는지 모릅니다. 과다출혈이었는지, 혹은 그들이 마지막으로 제 목을 졸랐는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의 진짜 죽음은, 올리비에의 눈에서 빛이 사라지는 것을 본 바로 그 순간에 시작되었으니까요. 하지만 제 비극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저의 지옥은 죽음 이후에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깨어났을 때, 여전히 그 방에 있었습니다. 제 몸은 바닥에 싸늘하게 식어 있었지만, 제 영혼은 그 옆에 서서 모든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올리비에는 죽지 않았습니다. 신은 그에게 죽음이라는 자비조차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살아남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시는 세상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짐승의 일격이 그의 시신경을 영원히 파괴해 버렸던 것입니다.』

『그는 이제 눈먼 장님입니다, 신부님.』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끓는 눈물이 넘쳐흐르는 소리였다. 『그는 제가 사랑했던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하늘의 푸른빛을, 정원의 꽃들을, 그리고 제 얼굴조차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손끝의 감각으로 세상을 더듬으며 살아갑니다. 그는 제가 죽은 것을 압니다. 하지만 그는 제가 바로 여기, 그의 곁에서 그를 부르며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는 제가 그의 뺨을 어루만지려 애쓰는 이 유령의 손길을 느끼지 못합니다. 저는 에코(Echo)입니다. 나르키소스(Narcissus)를 사랑했지만, 그의 말을 따라 할 수만 있을 뿐, 제 사랑을 고백할 수 없었던 비운의 님프. 저는 그를 볼 수 있고,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그는 저를 보지도 듣지도 못합니다. 이보다 더 잔인한 지옥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아직도 그 폐허가 된 집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혁명에 반대한 눈먼 왕당파’라고 수군거립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정치 따위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는 매일 밤, 정원으로 나와 더듬거리며 제가 앉아 있던 벤치를 찾습니다. 그리고는 텅 빈 허공을 향해 제 이름을 부릅니다. 엘레오노르… 엘레오노르… 그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제 영혼은 수천 개의 칼날에 다시 찢겨 나갑니다. 저는 그의 곁으로 달려가 ‘나 여기 있어요, 나의 사랑!’이라고 외치지만, 제 목소리는 그에게 닿지 못하고 바람 소리에 흩어질 뿐입니다.』

『신부님, 제게는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저 귀족 부인은 자신의 오만을 회한하고, 저 혁명가의 아내는 배신당한 정의에 분노합니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비극을 설명할 수 있는 거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게는 찢겨진 드레스와, 눈먼 남편의 울음소리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작은 정원의 기억뿐입니다. 제 슬픔은 너무나 작고 보잘것없어서, 이 거대한 역사의 비극 속에서는 이름조차 가질 수 없습니다. 저는 원앙 금침의 온기가 아니라, 제 몸을 더럽힌 낯선 사내들의 정액의 차가운 감촉만을 기억하는 저주받은 영혼입니다. 이 기억을 안고 어떻게 영원을 견뎌야 합니까?』

엘레오노르의 형상은 마침내 희미한 빛의 입자가 되어 흩어졌다. 마치 새벽이 오기 전, 마지막으로 깜박이다 스러지는 별똥별처럼.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는 그 어떤 철학이나 이념의 흔적도 남지 않았다. 그곳에는 오직 순수하고, 근원적이고, 치유 불가능한 슬픔의 향기만이 남아, 경당 안의 모든 돌멩이 하나하나에까지 스며들어 그것들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앙투안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지금껏 수많은 시신을 마주했지만, 단 한 번도 이처럼 벌거벗은 영혼의 고통을 직접 마주한 적은 없었다. 이 밤, 그는 신의 사제가 아니라, 인간의 모든 슬픔을 듣고 기록해야 하는, 저주받은 증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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