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와 표상, 침묵 속의 외침

by 남킹

바이마르와의 결별은 외과적 수술과 같았다. 그것은 단순한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존재론적 단절(ontological severance)이자, 자신을 잉태한 모체(母體)의 세계관으로부터 스스로를 도려내는 의식적인 자기-박리(自己剝離) 행위였다. 요한나의 살롱은 이제 그에게 있어 그리스 신화 속 키르케의 섬과 다름없었다. 그곳에서 인간들은 지성이라는 마법의 약을 마시고 고상한 대화를 나누는 척하지만, 실은 욕망과 허영이라는 돼지의 본성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채 쾌락의 진창을 뒹굴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 섬의 여왕 마법사였다. 그녀는 아들이 자신의 왕국에서 가장 빛나는 돼지가 되기를, 괴테라는 태양의 빛을 반사하여 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는 달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르투어는 이카루스가 되고자 했다. 설령 그 날갯짓이 태양의 진실에 너무 가까이 다가간 나머지 추락으로 끝난다 할지라도, 그는 기만적인 달빛의 삶을 사느니 차라리 한순간 불꽃으로 타오르다 재가 되는 길을 택할 터였다.

마지막 대화는 칼날처럼 차갑고 간결했다. 요한나는 아들의 책상 위에 놓인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경멸적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 먼지 쌓인 관념 덩어리들이 너에게 대체 무엇을 줄 수 있단 말이냐? 살아있는 인간들과의 교류, 권력자들의 눈에 띄는 것, 그것이 바로 현실이란다." 아르투어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마치 책의 각주를 인용하듯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어머니께서 말씀하시는 그 ‘현실’이야말로 제가 보기엔 가장 공허한 관념입니다. 그것은 실재(實在)가 아니라, 개체화의 원리(principium individuationis)가 빚어낸 무수한 환영(幻影)의 집합, 즉 마야(Māyā)의 베일에 불과합니다. 저는 그 베일을 걷어내고 그 뒤에 있는 ‘물자체(Ding an sich)’를 직시하고자 합니다." 그의 언어는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암호였고, 그 단절의 심연 앞에서 요한나는 마침내 아들을 포기했다.

그리하여 그는 드레스덴으로 향했다. 엘베강이 도시의 동맥처럼 흐르는,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들이 마치 시간의 거대한 화석처럼 들어앉은 그 도시로의 이주는 망명이자 귀환이었다. 그는 외부 세계로부터의 망명객이었으나, 동시에 자기 내면의 왕국으로 돌아온 군주였다. 그는 강변의 한적한 하숙집에 거처를 정했다. 방은 수도승의 고행실처럼 엄격하고 간결했다. 육중한 참나무 책상과 의자 하나, 웬만한 도서관의 장서를 옮겨놓은 듯한 책장들, 그리고 밤의 고독을 밝혀줄 촛대와 플루트 한 자루가 가구의 전부였다. 이곳에서,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세상이라는 거대한 소음으로부터 제 영혼의 귀를 막고, 인류 역사상 가장 고독하고도 장엄한 교향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그 악보의 제목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였다.

그의 하루는 천체의 운행처럼 규칙적이고 정밀한 궤도를 그렸다. 새벽의 희미한 여명이 창문을 푸른빛으로 물들일 때쯤 그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의 육체는 밤새 뒤척인 흔적으로 뻣뻣했으며, 신경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예민하게 날이 서 있었다. 그는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며 잠의 마지막 잔재를 씻어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마치 제3의 타자처럼 낯설었다. 움푹 들어간 눈, 광대뼈를 도드라지게 하는 창백한 피부, 진리에 대한 탐구열과 세상에 대한 경멸감이 뒤섞여 영구적인 주름을 만들어낸 미간. 그는 그 얼굴에서 소크라테스의 고집과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고통을 동시에 보았다.

책상에 앉는 행위는 사제(司祭)가 제단 앞에 서는 것과 같은 신성한 의식이었다. 그는 잉크병을 열고 깃펜의 끝을 조심스럽게 다듬었다. 공기 중에는 잉크의 시큼한 철 냄새와 오래된 양피지의 건조한 향기, 그리고 밤새 타다 남은 밀랍초의 희미한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이것이 그의 세계의 냄새였다. 그는 먼저 고대 그리스어로 플라톤의 대화편 한 구절을, 혹은 라틴어로 세네카의 서한을 소리 내어 읽었다. 그것은 정신의 근육을 단련하는 준비운동이자, 시공을 초월한 위대한 영혼들과의 아침 인사였다. 그의 혀는 낯선 언어의 음운을 굴리며 쾌감을 느꼈고, 그의 정신은 수천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아카데메이아의 숲 그늘 아래, 혹은 로마의 스토아학파 현자들의 서재에 당도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집필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저술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연금술이었고, 해부학이었으며, 신성모독이었다. 그는 세계라는 거대한 시신을 자신의 사상이라는 메스로 해부하고 있었다. 그는 우선 칸트가 닦아놓은 길을 따라갔다. 그렇다, 세계는 우리가 인식하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지성은 시공간과 인과율이라는 선험적(a priori) 형식, 즉 색안경을 끼고서야 비로소 혼돈의 감각 데이터들을 질서 있는 ‘표상’의 세계로 구성해낸다. 이 현상계는 거대한 꿈이며, 우리는 모두 그 꿈속을 헤매는 몽유병자들이다. 칸트, 위대한 쾨니히스베르크의 현자는 여기까지 와서 멈추었다. 그는 저 너머, 우리의 인식이 결코 가닿을 수 없는 ‘물자체’의 영역을 미지의 X로 남겨두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아르투어는 코페르니쿠스를 넘어 케플러가 되고자 했다. 그는 칸트가 설정한 마지막 금단의 벽을 부수고 그 너머를 엿보려 했다. 그의 깃펜은 양피지 위를 미친 듯이 질주했다. 때로는 격렬하게 긁어댔고, 때로는 심연을 들여다보는 자의 두려움에 잠시 허공에서 멈추었다. 그의 등 근육은 단단하게 경직되었고, 목덜미는 끊어질 듯한 통증을 호소했다. 그의 눈은 핏발이 서서 촛불의 미세한 흔들림에도 고통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멈출 수 없었다. 그는 인류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진실의 맨얼굴을 목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물자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성도, 신도, 로고스(Logos)도 아니었다. 그것은 맹목적이고, 비합리적이며, 영원히 굶주려 있고, 결코 충족될 수 없는 근원적인 힘, 즉 ‘의지(Wille)’였다. 이 ‘의지’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본질이었다. 행성이 태양 주위를 공전하게 하는 중력의 힘도, 자석이 쇠를 끌어당기는 힘도, 식물이 빛을 향해 자라나는 생장력도, 동물이 교미하고 먹이를 사냥하는 본능도, 그리고 인간이 사랑하고, 증오하고, 탐욕하고, 예술을 창조하고, 철학을 하는 이 모든 행위도, 결국은 이 하나의 거대한 ‘삶에의 의지(Wille zum Leben)’가 제 자신을 객관화하는 다양한 방식에 불과했다.

세계는 신의 숭고한 창조물이 아니라, 이 거대한 의지가 스스로를 잡아먹으며 영원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거대한 투기장이었다. 개체로서의 우리는 이 의지의 노예이자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다. 우리의 자아, 우리의 개성이라 믿는 모든 것은 사실상 허상이었다. 우리는 모두 거대한 파도 위에 잠시 솟아올랐다 사라지는 물거품과 같았다. 파도 자체가 본질인 ‘의지’이며, 물거품은 덧없는 개체인 ‘나’였다. 이 끔찍하고도 장엄한 진실이 그의 뇌리를 강타했을 때, 그는 전율했다. 이것은 단순한 철학적 발견이 아니었다. 이것은 저주받은 예언자의 신탁이었다. 그는 창밖을 보았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마차를 끄는 말, 지붕 위의 비둘기, 그 모든 것이 이제는 다르게 보였다. 그는 그들의 눈동자 뒤에서, 그들의 모든 몸짓과 외침 속에서, 똑같은 맹목적인 의지가 섬광처럼 번득이는 것을 보았다. 세상은 거대한 꼭두각시 극장이었고, 의지는 그 모든 것을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인형사였다.

그는 일어서서 방 안을 서성였다. 그의 육체는 극도의 정신적 긴장으로 인해 탈진 상태에 가까웠다. 그는 동양의 지혜, 그가 괴테의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했던 앙케틸뒤페롱의 라틴어 번역본 『우프네카트(Oupnekhat)』, 즉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인도의 현자들은 이미 수천 년 전에 이 진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 현상계를 ‘마야’라 불렀고, 모든 개별적 영혼(아트만, Ātman)이 근원적 실체(브라만, Brahman)와 다르지 않다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통찰에 도달했다. 아르투어는 자신의 철학이 칸트의 비판철학과 인도의 고대 지혜가 만나는 위대한 합류점임을 직감했다. 그는 서양 이성주의의 정점에서 동양적 직관의 심연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점심이 되면, 그는 잠시 펜을 놓았다. 딱딱한 빵 한 조각과 치즈, 그리고 물 한 잔으로 지극히 간소한 식사를 했다. 음식조차도 ‘의지’의 요구에 굴복하는 행위였기에, 그는 최소한의 양으로 육체의 보존이라는 의지의 명령을 마지못해 따랐다.

그리고 나면 플루트를 들었다. 이 순간만큼은 그가 ‘의지’의 폭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다른 모든 예술, 즉 회화, 조각, 시(詩)는 ‘의지’가 객관화된 어떤 이데아(Idea)를 모방하는, 즉 ‘표상’의 세계를 다시 한번 모방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것들은 여전히 마야의 베일 안에서 이루어지는 유희였다. 그러나 음악은 달랐다. 음악은 이데아를 모방하지 않았다. 음악은 ‘의지’ 그 자체의 직접적인 객관화이자 복사물이었다. 조성(tonality)의 근간을 이루는 으뜸음은 의지의 가장 낮은 단계인 무기물(無機物)의 둔중한 질량을, 화음의 진행은 유기체의 생명 활동을, 선율의 흐름은 의식적 존재의 갈망과 투쟁을, 그리고 마침내 으뜸음으로 회귀하는 종지(cadence)는 죽음을 통한 안식을 상징했다.

그가 플루트에 입술을 대고 숨을 불어넣었을 때, 그의 폐부에서 나온 공기는 단순한 공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내면에 꿈틀거리는 의지의 격동이 음표라는 질서의 옷을 입고 외부 세계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모차르트의 아다지오를 연주할 때면, 그의 영혼은 현상계의 모든 고통을 초월하여 관조적인 슬픔의 평온함에 잠겼다. 로시니의 생동감 넘치는 선율을 불 때면, 그는 삶에의 의지가 지닌 맹목적이고 유쾌한 광기를 온몸으로 느꼈다. 그의 손가락은 플루트의 구멍 위를 춤추듯 오갔고, 입술의 미세한 떨림은 음색에 섬세한 비브라토를 더했다. 이 순간,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라는 개체는 사라지고, 오직 우주적 의지의 흐느낌과 환희만이 그의 육체를 통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음악은 철학이 언어로 설명하려는 세계의 본질을, 소리라는 직관적인 형태로 남김없이 드러내주는 가장 심오한 형이상학이었다.

늦은 오후, 그는 산책에 나섰다. 이것은 사색의 연장이자, 자신의 이론을 검증하는 실험의 시간이었다. 그는 드레스덴의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유령과도 같았다. 그는 츠빙거 궁전의 화려한 조각들 앞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기보다, 그 돌덩어리 속에 잠재된 채 수백 년을 버텨온 ‘의지’의 끈질김을 보았다. 연인들이 속삭이는 사랑의 밀어 속에서 그는 숭고한 감정의 교류가 아니라, 종족 보존이라는 ‘의지’의 교활한 계략이 빚어내는 달콤한 환상을 엿들었다. 시장의 소란 속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 속에서, 장례 행렬의 울음소리 속에서, 그는 오직 하나의 거대한 힘이 연출하는 비극과 희극을 목격할 뿐이었다. 그는 진정 고슴도치였다. 세상의 모든 현상에 가까이 다가가려 할수록, 그 본질에 숨겨진 고통이라는 가시가 그의 영혼을 찔러댔다. 그는 인간들을 사랑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을 너무나도 잘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동족혐오는 이해의 가장 비극적인 귀결이었다.

몇 년의 시간이 그렇게 흘러갔다. 계절이 바뀌고, 세상은 나폴레옹의 몰락과 빈 체제라는 새로운 질서로 재편되었지만, 그의 방 안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무의미했다. 오직 하나의 거대한 건축물, 그의 철학 체계만이 벽돌 한 장 한 장 쌓아 올려지고 있었다. 마침내 1818년의 어느 늦가을 밤, 그는 마지막 문장을 적어 내려갔다.

“...그러나 우리가 의지를 완전히 버릴 때 찾아오는 저 상태, 즉 현상계의 모든 잡다한 충동들이 사라진 무(無)의 상태를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남는 것은, 여전히 의지로 가득 찬 이 세계뿐이다.”

펜을 내려놓는 순간, 그의 온몸을 지배했던 극도의 긴장이 일순간에 증발해버렸다. 그의 육체는 텅 빈 허물처럼 의자에 늘어졌다. 방 안의 침묵이 마치 귀에 압력을 가하는 듯 무겁게 느껴졌다. 수년간의 고독한 항해 끝에, 그는 마침내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가 되었다. 아니, 그는 콜럼버스보다 더 위대했다. 콜럼버스는 이미 존재하는 대륙을 ‘발견’했을 뿐이지만, 그는 세계의 의미 자체를 ‘창조’해냈다. 그는 이 원고 뭉치가 단순한 책이 아님을 알았다. 이것은 인류를 위한 해독제이자, 동시에 가장 지독한 독약이었다. 이것은 고통의 바다를 헤매는 인간들에게 해탈(Nirvana)의 길을 보여주는 복음서이자, 동시에 삶의 모든 가치와 희망을 뿌리 뽑아버리는 저주의 예언서였다.

그는 원고를 가슴에 품었다. 종이의 감촉이, 아직 마르지 않은 잉크의 냄새가 그의 감각을 마비시킬 듯한 희열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신(神)이 된 기분이었다. 창세기의 신이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고 이레째에 쉬었듯, 그도 이제 쉬어야 했다. 그는 확신했다. 이 책이 세상에 나가는 순간, 독일 철학계는 지각변동을 일으킬 것이다. 헤겔이니 피히테니 하는, 국가의 녹을 받아먹으며 애매모호한 궤변으로 대중을 현혹하는 강단 철학의 사기꾼들은 그의 진실의 빛 앞에서 한 줌의 재로 사라질 것이다. 대학들은 그의 책을 교과서로 채택할 것이고, 젊은이들은 그의 이름 앞에서 경의를 표할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바이마르의 이방인이 아니었다. 그는 독일 정신의 새로운 군주가 될 터였다.

그는 라이프치히의 유명한 출판업자 브로크하우스에게 원고를 보냈다. 그리고 기다렸다. 그의 기다림은 승리를 예감하는 장군의 오만한 기다림이었다. 마침내 출판이 결정되고, 책이 인쇄되어 세상에 나왔을 때, 그는 마치 자식을 낳은 아버지의 심정으로 서점에 진열된 자신의 책을 바라보았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그 검고 단단한 표지는 마치 진리를 담은 판도라의 상자처럼 보였다.

그러나 세상은 침묵했다.

하루가 지나고, 한 주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났다.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학술 잡지에는 단 한 줄의 서평도 실리지 않았다. 대학에서는 아무런 논의도 일어나지 않았다. 세상은 마치 그의 책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헤겔의 『논리학』과 셸링의 『초월적 관념론 체계』에 대한 공허한 찬사만을 끝없이 되풀이할 뿐이었다.

1년이 지났을 때, 그는 브로크하우스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의 내용은 정중했으나, 그 내용은 그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지난 1년간, 그의 위대한 역작은 고작 100여 권이 팔렸으며, 창고에 쌓인 나머지 책들은 출판사의 큰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는 완곡한 불평이었다.

백 권.

그 숫자는 그의 뇌리에 인두로 새겨졌다. 그의 신적인 확신, 그의 예언자적 사명감, 그의 지적인 오만이 일순간에 산산조각 나버렸다. 그는 방 안을 미친 사람처럼 서성였다. 그의 육체는 격렬한 모욕감에 부들부들 떨렸고, 얼굴은 피가 몰려 붉게 상기되었다. 그는 편지를 갈기갈기 찢어 벽난로에 던져버렸다. 종이가 불꽃 속에서 검게 오그라들며 재로 변하는 모습은, 마치 세상이 그의 영혼을 조롱하며 태워버리는 것 같았다.

"돼지들! 진주를 던져주었거늘, 너희들은 그것을 알아보기는커녕 그저 진흙탕 속에서 킁킁거리기만 하는구나!"

그의 외침은 텅 빈 방의 벽에 부딪혀 공허한 메아리로 되돌아왔다. 그의 증오는 이제 막연한 인간 혐오가 아니었다. 그것은 명확한 대상을 찾았다. 바로 동시대의 지식인들, 특히 ‘교수 나으리’들이라 불리는 학계의 기생충들이었다. 그들은 진리를 찾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국가와 대중의 입맛에 맞는 지식을 제조하여 판매하는 지식 상인에 불과했다. 그들의 철학은 철학이 아니라, 현상 유지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마취제였다.

그는 절망의 가장 깊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차라리 아버지를 따라 창고 통풍창에서 몸을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다. 그의 고독한 투쟁은 결국 무의미한 독백에 불과했던 것인가?

바로 그때,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여동생 아델레에게서 온 것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바이마르에 머물며 괴테의 며느리인 오틸리에와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편지에는 가문의 소소한 안부와 함께, 무심한 듯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 있었다.

“...얼마 전 오틸리에 부인을 만났는데, 시아버지(괴테)께서 오라버니의 새 책을 아주 흥미롭게 읽으셨다고 전해주더구나. 그분께서는 책의 내용이 매우 심오하여 쉽게 평하기는 어렵지만, 젊은이의 독창적인 사유가 참으로 대견하다고 말씀하셨다고 해. 다만 그 책이 앞으로 꽤 오랫동안 독자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말도 덧붙이셨다더구나...”

아르투어는 편지를 든 채 그대로 얼어붙었다.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독한 고독의 사막에서 마침내 발견한 한 방울의 오아시스였고, 완전한 어둠 속에서 깜박이는 멀고 희미한 별빛이었다.

괴테.

이 세계에서 그가 유일하게 지성을 인정했던 단 한 사람. 그가 알아봐 준 것이다. 비록 대중의 환호도, 학계의 인정도 아니었지만, 이 위대한 영혼의 조용한 긍정 하나가, 세상 전체의 몰이해와 맞설 수 있는 방패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그 눈물은 이내 말라붙었고, 그 자리에 차가운 분노가 다시 차올랐다. 괴테의 인정은 위안이었으나, 동시에 세상의 어리석음을 더욱 극명하게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더 이상 세상의 인정을 갈구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는 세상을 향해 선전포고를 했다. 그는 이제부터 저 기만적인 강단 철학자들과 평생에 걸쳐 전쟁을 벌일 것이다. 그의 펜은 이제 진리를 설명하는 도구를 넘어, 적들의 심장을 꿰뚫는 창이 될 터였다.

그는 다시 책상에 앉았다. 그의 등은 굽어 있었지만, 그 모습은 패배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상처 입은 짐승이 다음 공격을 위해 몸을 웅크리는 모습이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가시를 더욱 날카롭게 벼리기 시작했다. 고슴도치의 길은 외롭고 고통스럽지만, 그것은 또한 스스로를 지키는 유일한 길이기도 했다. 세상이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는다면, 그는 세상이 자신을 필요로 할 때까지, 이 고독한 성채 안에서 묵묵히 기다릴 터였다. 언젠가, 아주 먼 훗날, 인류가 마야의 베일 뒤에 숨겨진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생겼을 때, 그들은 길을 잃고 헤매다 마침내 그의 이름이 새겨진 문을 두드리게 될 것이었다. 그는 그날을 위해, 살아남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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