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푸르트의 괴짜, 아트만과의 산책

by 남킹

1831년, 역사의 거대한 유기체는 눈에 보이지 않는 포자(胞子)에 의해 다시 한번 경련을 일으켰다. 갠지스강의 더러운 물에서 발원한 콜레라(Cholera), 그 이름은 ‘담즙’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으나 실은 담즙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를 쥐어짜내는 아시아의 신(神)이었다. 그 신은 비단길을 따라, 군대의 행렬을 따라, 무역상의 탐욕을 따라 서쪽으로, 서쪽으로 진군했다. 모스크바의 얼어붙은 대지를 넘어, 바르샤바의 가을 안개를 뚫고, 마침내 프로이센의 심장부 베를린에 당도했다. 도시는 공포라는 이름의 투명한 종(鐘) 아래 갇혔다. 죽음은 더 이상 노년이나 질병의 점진적인 과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갑작스러운 탈수, 푸른빛으로 변하는 피부, 쌀뜨물 같은 배설물과 함께 찾아오는, 극도로 추하고 비천한 생리적 붕괴였다.

이 혼돈 속에서,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기이한 평온함을 느꼈다. 그에게 콜레라는 재앙이 아니라, 그의 철학에 대한 가장 끔찍하고도 완벽한 실물 교재였다. 보라, 이것이 바로 ‘의지(Wille)’의 맨얼굴이다! 이성도, 도덕도, 신의 섭리도 없는, 그저 생존하고 번식하려는 맹목적인 미생물의 충동이, 헤겔이 그토록 찬미했던 ‘절대정신’의 현현인 국가와 그 수도를 일거에 마비시키고 있지 않은가. 헤겔 자신도 이 보이지 않는 적 앞에서 공포에 떨며 시골로 피신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리고 실제로 다음 해에 그 역병으로 죽었다.) 아르투어는 이 아이러니에 지독한 희열을 느꼈다. 세계정신은 변증법이 아니라, 박테리아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도피는 헤겔의 그것처럼 공포에 기반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합리적 계산과 경멸에 근거한 선택이었다. 그는 어리석은 대중과 함께 멸망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생명, 즉 이 위대한 진리를 담지하고 있는 유일한 그릇을 보존해야 할 형이상학적 의무가 있었다. 그는 베를린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어디로 갈 것인가? 그는 국가의 후원을 받는 대학 도시나 왕족의 변덕이 지배하는 궁정 도시를 피했다. 그는 익명성을 원했다. 지적인 간섭으로부터의 자유, 정치적 이데올로기로부터의 중립. 그는 자유 제국 도시(Freie Reichsstadt)였던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Frankfurt am Main)을 선택했다. 그곳은 철학이 아니라 돈이, 관념이 아니라 거래가 지배하는 도시였다. 로트실드 가문이 유럽의 금융을 주무르고, 박람회에는 온갖 상품들이 넘쳐나는, 실용적이고 세속적인 도시. 그런 곳이야말로 진정한 철학자가 인간이라는 동물을 가장 순수한 형태로 관찰할 수 있는 최적의 동물원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마인강 변의 ‘쇠네 아우시히트(Schöne Aussicht, 아름다운 전망)’라는, 그 이름의 낭만성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실용적인 건물에 자신의 마지막 보루를 구축했다. 그의 거처는 요새이자, 실험실이었으며, 수도원이었다. 그는 외부 세계의 모든 우연성과 비합리성을 차단하고, 자신의 삶을 칸트의 정언명령(kategorischer Imperativ)처럼 엄격하고 보편적인 법칙 아래 두려는 듯, 철저한 규칙성을 강제했다. 이 규칙성이야말로 혼돈스러운 ‘의지’의 세계에 맞서 인간 이성이 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벽이었다.

그의 삶은 이제 하나의 정교한 기계장치처럼 움직였다. 아침 7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냉수로 몸을 씻고, 아침 식사 전에 세 시간 동안 고독한 집필에 몰두했다. 이 시간 동안 그의 정신은 플라톤의 동굴에서 풀려나 이데아의 태양을 직시하는 죄수와도 같았다. 그의 펜은 현상계라는 감옥 벽에 비친 그림자들의 허위성을 폭로하고, 그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근원적인 실체, 즉 ‘의지’의 불꽃을 해부했다. 정오가 되면 그는 펜을 놓고 플루트를 들었다. 그것은 의지의 언어인 음악을 통해, 의지의 폭정으로부터 잠시나마 해방되는 역설적인 의식이었다. 오후에는 영국제 고급 레스토랑인 ‘엥글리셔 호프(Englischer Hof)’로 향했다. 그는 그곳의 소란스러움 속에서 오히려 완벽한 익명성을 즐겼다. 그는 결코 다른 손님들이 사용한 잔을 쓰지 않았다. 가죽 케이스에 담아온 자신만의 은잔을 꺼내 와인을 따라 마시는 그의 모습은, 전염병에 대한 병적인 공포와 세상의 모든 오염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정신적 결벽증의 기이한 결합체였다.

그리고 오후의 산책. 이것은 그의 일과 중 가장 중요한, 움직이는 명상(meditatio in motu)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 고독한 의식에는 동반자가 필요했다. 그는 인간을 혐오했다. 인간의 대화는 대부분 허영과 이해타산, 혹은 타인에 대한 험담으로 이루어진 공허한 소음이었다. 인간의 우정은 언제 배신으로 변할지 모르는 위태로운 계약이었다. 그는 더 순수하고, 더 정직하며, 더 본질적인 동반자를 원했다. 그는 개를 선택했다. 구체적으로는 갈색 푸들. 영리하지만 허영심이 강하고, 때로는 신경질적인 그 품종은 어딘지 모르게 자기 자신을 닮아 있었다.

그는 강아지에게 ‘아트만(Atman)’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것은 단순한 애칭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 숨 쉬는 철학적 선언이었다. 힌두 철학에서 ‘아트만’은 개별적 자아인 동시에 우주적 실체인 ‘브라만(Brahman)’과 동일한 본질을 지닌다. 이 작은 짐승이야말로, 인간처럼 이성과 언어라는 기만적인 베일로 자신을 치장하지 않은, 순수한 ‘삶에의 의지’의 가장 적나라한 현현이었다. 아트만의 눈동자 속에서, 아르투어는 자신과 똑같은, 살고자 하는 맹목적이고 처절한 욕망의 불꽃을 보았다. 그러나 그 불꽃은 인간의 그것처럼 죄의식이나 위선으로 더럽혀지지 않은, 원초적인 순수함을 지니고 있었다. 아트만은 꼬리를 흔들며 기쁨을 표현했고, 으르렁거리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의 감정은 투명했다. 그는 결코 아르투어를 속이려 들지 않았고, 그의 재산을 탐하지도 않았으며, 그의 철학을 비웃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존재할 뿐이었다. 이 순수한 존재 앞에서, 아르투어는 복잡한 인간관계에서 결코 느껴보지 못한 종류의 평온함을 느꼈다.

그리하여 프랑크푸르트의 명물, 즉 괴짜 철학자와 그의 충실한 푸들의 산책이 시작되었다. 매일 오후 두 시, 아르투어는 수십 년간 입어 낡아빠진, 유행이 한참 지난 프록코트를 걸치고 중절모를 눌러쓴 채 아트만과 함께 집을 나섰다. 그의 걸음걸이는 마치 메트로놈처럼 규칙적이었고, 그의 시선은 전방의 한 점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주변의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꿰뚫어 보고 있었다. 마인강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그는 헤라클레이토스의 강이 아니라, 영원히 생성하고 소멸하며 결코 만족을 모르는 ‘의지’의 흐름을 보았다. 분주하게 오가는 상인들의 얼굴에서 그는 부(富)를 향한 욕망이 아니라, 그 욕망이 채워지는 순간 새로운 권태와 결핍으로 고통받게 될 시시포스의 운명을 읽었다. 젊은 여인들의 화사한 웃음과 장식된 옷차림 속에서 그는 개인의 행복 추구가 아니라, 종족 보존이라는 ‘의지’의 교활한 미끼에 걸려든 무의식적인 희생양들의 비극을 목격했다.

그는 종종 큰 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그것은 대화 상대가 없는 자의 외로운 중얼거림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머릿속에서 들끓는 사상들이 외부 세계의 구체적인 현상과 부딪히며 일으키는 격렬한 불꽃이었다.

“보게, 아트만.” 그는 자신의 발치에서 경쾌하게 걷고 있는 푸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행인들은 저 노인이 개에게 말을 건다고 생각하며 기이한 눈초리로 쳐다보았지만, 그는 사실상 자기 자신에게, 혹은 우주 전체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저 여자를 보게. 저 여자는 지금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고 믿고 있겠지. 하지만 저것은 사랑이 아닐세. 저것은 ‘종(種)의 의지’가 저 가련한 개체의 뇌에 주입한 환각일 뿐이야. 그녀는 지금 자신의 행복을 위해 저 남자를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녀의 난자와 저 남자의 정자가 결합하여 자신들의 유전적 특성을 가장 잘 보존할 수 있는 새로운 개체를 만들어내도록,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네. 그들은 곧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리고 환상에서 깨어나 서로의 존재가 지옥임을 깨닫게 되겠지. 비극이야, 아트만.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비극일세.”

그의 독백은 때때로 격렬한 분노로 변했다. 마차가 일으키는 소음, 행상인의 외침, 채찍 소리. 모든 불필요한 소음은 그의 예민한 신경을 날카롭게 할퀴었다. 그에게 소음이란, 타인의 어리석고 무감각한 ‘의지’가 자신의 사유라는 신성한 공간을 침범하는 가장 폭력적인 행위였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고 말했다면, 아르투어에게는 “소음은 생각을 살해한다, 고로 소음은 존재를 파괴한다”였다. 그는 소음을 내는 자들을 향해 저주를 퍼부었고, 때로는 지팡이로 땅을 치며 분노를 표출했다. 프랑크푸르트의 주민들에게 그는 점차 ‘그 미친 노인(der tolle Alte)’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의 편집증은 집 안에서도 계속되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강박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모든 재산 관련 기록은 타인이 알아볼 수 없도록 영어로 기재했으며, 중요한 서류들은 그리스어나 라틴어로 암호화했다. 귀중품은 책장 뒤 비밀 공간에 숨겨두었고, 침실에는 항상 장전된 권총 한 자루와 예리하게 벼린 칼을 두었다. 그는 이발사조차 믿지 못해, 면도를 할 때면 거울을 통해 이발사의 손이 자신의 목에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지 감시했다. 이 모든 것은 단순히 부유한 독신남의 신경과민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철학의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만약 모든 인간이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의지’의 노예라면, 타인을 신뢰한다는 것만큼 어리석은 행위는 없었다. 홉스가 말했듯, 자연 상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이며, 문명이란 그 야만성을 가까스로 봉인해놓은 얇은 얼음판에 불과했다. 그는 그 얼음판이 언제든 깨질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의 편집증은 비관주의의 실천적 형태였다.

이 고독한 요새에도 균열이 생기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의 바로 옆방에 카롤리네 마르케트(Caroline Marquet)라는 이름의 재봉사 여인이 이사를 왔다. 그녀는 생계를 위해 밤낮으로 재봉틀을 돌렸고, 친구들을 불러들여 수다를 떨었다. 그 소음은, 마치 고문 기구처럼, 벽을 뚫고 들어와 아르투어의 신경을 갉아먹었다. 재봉틀의 단조롭고 규칙적인 소음, 여인들의 의미 없는 웃음소리와 수다. 그것은 그의 정신을 난도질하는 음향의 채찍이었다. 그는 수차례 항의했지만, 여인은 그의 예민함을 이해하지 못했다.

마침내 1821년의 어느 여름날, 그의 인내심이 폭발했다. 여인의 방에서 흘러나오는 소음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는 이성을 잃고 뛰쳐나갔다. 그의 육체는 분노라는 화학물질에 완전히 점령당했다. 아드레날린이 혈관을 타고 흘렀고, 심장은 광포하게 날뛰었으며, 눈앞이 붉은 막으로 뒤덮이는 듯했다. 그는 여인의 방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그곳에는 카롤리네와 그녀의 친구들이 차를 마시며 웃고 있었다.

그의 등장은 축제에 나타난 죽음의 사신과도 같았다. 그는 이성을 잃고 고함을 질렀다. "이 무지하고 저급한 것들! 당신들의 그 텅 빈 두개골에서 나오는 소음이, 한 위대한 정신의 작업을 어떻게 방해하고 있는지 알고나 있소?"

여인들은 놀라 비명을 질렀고, 카롤리네는 당돌하게 그에게 맞섰다. 말다툼은 순식간에 몸싸움으로 번졌다. 아르투어는 자신의 신성한 고독을 침해한 이 불결한 존재를 자신의 영역 밖으로 밀어내려는 원초적인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는 여인의 팔을 붙잡고 복도로 끌어내려 했다. 여인은 저항했고, 그 과정에서 그녀는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이 사건은 그의 삶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카롤리네 마르케트는 그를 폭행죄로 고소했고, 길고 지루한 법정 싸움이 시작되었다. 아르투어는 자신의 행위가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그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여인에게 평생 동안, 그녀가 죽을 때까지 분기별로 연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그것은 재정적인 타격인 동시에, 끔찍한 형이상학적 굴욕이었다. 그가 그토록 경멸해 마지않았던 저 어리석고 저급한 ‘의지’의 현현인 한 여인과, 그는 이제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경제적 사슬로 묶이게 된 것이다. 그는 연금을 지불할 때마다 장부에 라틴어로 ‘Obit anus, abit onus(노파가 죽으면, 짐도 사라지리라)’라고 적으며 저주를 퍼부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여인은 그보다 훨씬 오래 살았다.)

이 사건 이후, 그의 고슴도치 가시는 더욱 단단하고 날카로워졌다. 그는 이제 외부 세계와의 모든 불필요한 접촉을 끊었다. 그의 집은 완벽한 요새가 되었고, 그의 산책길은 더욱 엄격하게 정해졌으며, 그의 혼잣말은 더욱 빈번해졌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완전히 격리시킴으로써만 평화를 얻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의 고독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 되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의 거리를 배회하는 살아있는 유령, 제 자신의 철학의 화신(化身)이 되어갔다. 그는 아트만의 부드러운 털에 얼굴을 묻고 속삭였다. "오직 너만이 나를 이해하는구나, 아트만. 너는 소음도, 거짓말도, 소송도 없지. 너는 그저 존재할 뿐. 아,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의 이 지독한 저주여." 푸들은 그의 얼굴을 핥았고, 그 온기 속에서 철학자는 잠시, 아주 잠시 동안, 존재의 근원적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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