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의 헌정, 예술의 메아리

by 남킹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리를 낸다. 행성의 공전은 들을 수 없는 천상의 조화(musica universalis)를 연주하고, 결정체(結晶體)의 성장은 분자 구조의 엄격한 푸가를 이룬다. 살아있는 모든 것의 근저에는 진동이 있다. 그러나 인간의 시대에 이르러, 소리는 언어라는 오만하고 기만적인 질서에 의해 포획되었고, 음악은 그 언어의 시녀로 전락하는 모욕을 감수해야 했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에게, 19세기 독일은 바로 이 지적 타락의 정점을 보여주는 거대한 소음의 전시장이었다. 헤겔의 변증법은 실체의 공허함을 감추기 위한 언어의 현란한 곡예였고, 낭만주의 시인들의 서정성은 개체적 자아(自我)의 하찮은 고통을 우주적 비극인 양 과장하는 감상적 소음에 불과했다.

그의 프랑크푸르트 서재는 이 소음의 세계에 맞서 구축한, 침묵과 순수음(純粹音)의 마지막 성소(聖所)였다. 그곳에서 그는 모차르트 악보의 투명한 기하학 속에서, 혹은 로시니 아리아의 생동감 넘치는 흐름 속에서, 언어의 오염을 거치지 않은 ‘의지(Wille)’ 그 자체의 직접적인 계시(啓示)를 들었다. 음악은 다른 모든 예술과 그 격(格)을 달리했다. 회화와 조각, 시가 현상계의 그림자인 이데아(Idea)를 다시 한번 모방하는, 즉 그림자의 그림자를 그리는 2차적 행위라면, 음악은 이데아의 단계를 건너뛰어 ‘의지’라는 ‘물자체(Ding an sich)’의 심연과 직접적으로 교통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그것은 철학이 더듬거리며 설명하려는 것을, 남김없이, 그리고 압도적으로 드러내주는 형이상학 그 자체였다.

1854년의 어느 늦가을 오후, 이 침묵의 성소에 이질적인 물질이 침입했다. 그것은 취리히에서 발송된, 묵직하고 거대한 소포였다. 포장을 뜯는 그의 늙고 마디 굵은 손가락은 불쾌감과 미미한 호기심으로 떨렸다. 안에서 나온 것은 벨벳으로 장정되고 금박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한 권의 악보집이었다. 책장을 넘기자, 장중하고 과시적인 필체로 쓰인 헌사(獻辭)가 나타났다.

“존경과 감사를 담아,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박사께. 위대한 사상의 해방자에게, 리하르트 바그너 올림.”

리하르트 바그너. 그 이름은 아르투어에게 낯설지 않았다. 그는 혁명에 가담했다가 수배자가 되어 망명 생활을 하는 정치적 소란분자이자, 전통적인 오페라의 형식을 파괴하고 ‘음악극(Musikdrama)’이라는 거창한 이름 아래 연극과 음악, 시를 뒤섞은 잡종 예술을 창조하려는 야심가로 알려져 있었다. 아르투어는 본능적으로 이런 종류의 인간을 경멸했다. 그것은 순수한 진리 탐구자가 아니라, 세상의 주목을 갈망하고, 자신의 예술을 통해 세계를 제압하려는, ‘의지’의 가장 강력하고 위험한 화신(化身)의 전형이었다.

그는 헌사를 비웃으며 책장을 넘겼다. 『니벨룽겐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 북유럽 신화와 게르만 영웅 서사시를 뒤섞어 만든, 신과 거인, 난쟁이와 용이 등장하는 거대한 서사시의 대본과 악보 일부였다. 그는 먼저 대본을 훑어 읽었다. 그의 미간 주름이 경멸감으로 더욱 깊게 패였다. 이것은 시(詩)가 아니었다. 이것은 조잡한 알레고리와 과장된 감정, 그리고 철학적 사변을 어설프게 버무려놓은, 문학적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었다. 보탄의 고뇌, 지크프리트의 영웅주의, 브륀힐데의 사랑. 이 모든 것이 그의 눈에는 ‘의지’의 가장 통속적인 발현 형태들을 신화의 의상으로 치장해놓은 유치한 인형극처럼 보였다.

"가사가 너무 많아."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먼지 쌓인 방 안에서 건조하게 울렸다. "음악은 언어라는 목발에 의지해서는 안 되네. 음악은 스스로 말해야 하거늘, 이 자는 음악을 제 자신의 연극적 허영심을 위한 삽화(illustration)로 격하시키고 있구나."

그는 악보를 들여다보았다. 불협화음의 대담한 사용, 끝없이 이어지는 선율(unendliche Melodie), 특정 인물이나 사물을 상징하는 유도 동기(Leitmotiv)의 집요한 반복. 그의 음악적 감각은 모차르트의 균형 잡힌 형식미와 로시니의 명료한 선율에 길들여져 있었다. 바그너의 음악은 그의 귀에 혼돈 그 자체, 즉 형식을 파괴하고 감정의 격류를 아무런 제어 없이 쏟아내는 음향의 야만 상태처럼 들렸다. 그것은 마치 잘 가꾸어진 프랑스식 정원에 난데없이 밀어닥친 원시림의 폭풍과도 같았다.

그는 책을 덮어 책상 구석으로 밀쳐버렸다. 마치 불결한 물건을 만진 듯 손을 털었다. 바그너라는 자는 자신의 철학을 완전히 오해했다. 그는 자신의 ‘음악의 형이상학’을, 저런 시끄럽고 야만적인 Gesamtkunstwerk(총체예술)의 알리바이로 사용하려 드는 지적 날강도에 불과했다. 자신의 철학은 의지의 ‘부정(Verneinung)’을 통한 해탈을 가르치는데, 저 자의 음악은 의지의 ‘긍정(Bejahung)’, 그것도 가장 격렬하고 광적인 형태의 긍정을 부추기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구원이 아니라, 파멸의 교향곡이었다.

며칠 후, 그의 하녀가 또 다른 방문객을 알렸다. 로베르트 호른슈타인(Robert Hornstein)이라는 이름의 젊은 작곡가. 그는 자신을 리하르트 바그너의 제자라고 소개했다. 아르투어는 내키지 않았지만, 그 이름에 담긴 도발적인 호기심 때문에 마지못해 그를 서재로 들였다.

호른슈타인은 스승의 광적인 열정을 그대로 물려받은 듯, 초조하고 흥분된 모습이었다. 그는 늙은 철학자 앞에 서서, 마치 신도가 교황을 알현하듯 경외감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선생님," 호른슈타인은 거의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제가 선생님을 직접 뵙게 되다니, 이 영광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저희 스승님, 바그너 각하께서는 선생님을 칸트 이후 가장 위대한 사상가라고, 인류에게 나타난 진정한 예언자라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선생님의 음악 철학은, 저희 스승님의 모든 후기 작업을 가능하게 한 빛과도 같았습니다."

아르투어는 안락의자에 깊숙이 기댄 채,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그의 육체는 미동도 없었으나, 그의 정신은 이 젊은 광신도의 언어 속에 숨겨진 모든 허영과 과장, 그리고 진실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있었다.

"빛이라." 아르투어의 목소리는 마른 나뭇잎이 바스러지는 소리 같았다. "자네 스승이 내 책에서 발견한 것이 진정 빛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제 자신의 거대한 그림자를 정당화해 줄 어둠이었는지 나는 의심스럽네만."

"아닙니다, 선생님!" 호른슈타인은 열정적으로 반박했다. "스승님의 최신작, 『트리스탄과 이졸데』야말로 선생님의 철학, 즉 사랑이라는 환상을 통해 개체화의 원리를 파괴하고, 마침내 밤과 죽음이라는 이름의 근원적 합일, 의지의 소멸에 이르고자 하는 열망을 완벽하게 구현한 작품입니다! ‘사랑을 통한 죽음(Liebestod)’의 마지막 장면은, 선생님의 철학이 없었다면 결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침내 아르투어의 눈이 완전히 떠졌다. 그 안에서 차가운 불꽃이 이글거렸다. "사랑을 통한 죽음? 젊은이, 자네와 자네 스승은 내 철학의 표피조차 이해하지 못했군. 내가 말하는 의지의 부정은, 성욕(性慾)이라는 의지의 가장 강력한 긍정 행위가 그 절정에서 좌절됨으로써 맞는 파국적 소멸 따위가 아닐세. 그것은 성스러운 무지(無知)와 자발적 고행을 통해, 삶에의 의지 자체를 뿌리부터 고사(枯死)시키는, 조용하고 점진적인 과정이란 말이네. 자네 스승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해탈한 성인(聖人)이 아냐.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해 안달이 난, 두 마리의 발정 난 짐승에 불과하네. 그들의 죽음은 구원이 아니라, 욕구불만의 신경증적 발작일 뿐이야!"

그의 언어는 채찍과도 같았다. 호른슈타인의 얼굴은 충격과 모욕감으로 하얗게 질렸다. 그의 육체는 마치 찬물을 뒤집어쓴 듯 움츠러들었다. 그는 스승이 신처럼 떠받드는 이 철학자로부터 이런 신랄한 독설을 들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아르투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늙고 쇠약했지만, 그가 서재를 천천히 가로지르는 모습은 마치 우리 안을 어슬렁거리는 늙은 사자처럼 위엄이 있었다. 그는 피아노 뚜껑을 열고, 먼지 쌓인 건반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았다.

"음악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는 건반을 치지 않은 채, 허공을 향해 말했다. "모차르트의 G단조 교향곡을 들어보게. 그 첫 악장에는 불안과 투쟁, 즉 의지의 고통이 담겨 있지. 그러나 그 고통은 결코 감상적인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네. 그것은 완벽한 형식미 속에서 객관화되고, 관조의 대상이 되지. 그것이 바로 예술을 통한 구원일세. 감정의 격류에 휩쓸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 격류를 강둑 위에서 고요히 내려다보는 것. 그런데 자네 스승은 무엇을 하는가? 그는 강둑을 무너뜨리고, 청중을 그 격류 속으로 밀어 넣어 함께 익사하자고 소리치고 있네.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 집단 히스테리야!"

그는 격렬하게 피아노 뚜껑을 닫았다. 그 소리가 서재의 침묵을 날카롭게 갈랐다.

"자네 스승에게 돌아가 전하게. 나는 그의 존경 따위는 필요 없다고. 그리고 내 철학을 자신의 연극적 소음의 명분으로 삼는 것을 중단하라고 말일세. 그는 음악에 재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연극과 무대 장치, 그리고 대중을 선동하는 데 재능이 있는 것 같으니, 차라리 정치가가 되는 편이 나을 걸세."

호른슈타인은 거의 울상이 되어 서재를 물러났다. 그는 자신이 신탁을 들으러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을 찾았다가, 되레 신의 저주를 받고 쫓겨난 순례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가 떠난 후, 서재에는 다시 깊은 침묵이 찾아왔다. 아르투어는 승리감에 차 있어야 했다. 그는 또 한 명의 어리석은 숭배자를, 그의 지성의 칼날로 무참히 베어버렸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는 기이한 공허함과 불편함이 앙금처럼 가라앉고 있었다. 그의 육체는 논쟁의 흥분으로 달아올랐다가, 이제 급격히 식어가며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심장은 불규칙하게 뛰었고, 호흡은 가빴다.

그날 밤, 그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호른슈타인이 남기고 간 말들, ‘트리스탄과 이졸데’, ‘사랑을 통한 죽음’이라는 단어들이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마지못해 침대에서 일어나, 서재로 향했다. 촛불 하나에 의지한 채, 그는 낮에 구석으로 밀쳐두었던 바그너의 악보집을 다시 꺼내 들었다.

그는 대본을 건너뛰고, 악보 그 자체에만 집중했다. 그는 소리 내어 읽지 않았다. 그는 눈으로, 그의 내면의 귀로 음악을 들었다. 그리고 그 혼돈스럽고 격렬한 음들의 흐름 속에서, 그는 마침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어떤 것을 발견했다.

바그너는 그의 철학을 ‘이해’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자신의 예술적 야망을 위한 도구로 왜곡하고 남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다른 그 어떤 철학자나 예술가도 해내지 못했던 방식으로, 쇼펜하우어가 평생 언어로 설명하려 애썼던 바로 그 ‘의지’의 지옥 같은 심연을, 소리 그 자체로 '체현(體現)'해내고 있었다.

『트리스탄』의 첫 화음, 그 끝없이 해결을 유예하며 듣는 이의 영혼을 고통스러운 갈망 속에 매달아 놓는 그 불협화음 속에서, 그는 영원히 만족을 모르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의지’의 본질적인 모습을 들었다. 『반지』의 유도 동기들이 복잡하게 얽히고 변주되며 거대한 음향의 태피스트리를 짜 나가는 과정 속에서, 그는 개체화의 원리를 통해 무수한 현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의지의 거대한 파노라마를 보았다.

이것은 모차르트의 고귀한 슬픔이 아니었다. 이것은 베토벤의 영웅적인 투쟁도 아니었다. 이것은 더 원초적이고, 더 어둡고, 더 위험한 소리였다. 이것은 문명의 얇은 껍질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혼돈의 용(龍)이 내지르는 포효였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의 육체는 공포와 경외감이 뒤섞인 전율에 휩싸였다. 그는 평생 동안 의지의 본질을 해부하고 설명해왔다. 그는 자신이 그 괴물의 주인이거나, 최소한 그 괴물의 비밀을 간파한 유일한 인간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지금, 이 악보 속에서, 그는 자신이 설명했던 그 괴물이 실제로 살아서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바그너는 그 괴물을 설명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 괴물 자체를 소환해낸 것이다.

그는 조용히 책을 덮었다. 그는 바그너를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공개적으로 그를 계속해서 비난하고 경멸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조차 완전히 인정하기 두려운, 하나의 진실이 자리 잡았다.

그의 철학은 메아리를 얻었다. 비록 그가 원했던 방식의, 이성적이고 명료한 메아리가 아니라, 그의 통제를 벗어난, 거대하고 위험하며 야만적인 예술의 메아리였지만. 고슴도치는 자신의 굴 속에서 안전하다고 믿었지만, 바깥세상에서 누군가가 그의 가장 깊은 내면의 언어를 훔쳐내어, 온 세상이 들을 수 있는 거대한 교향곡으로 증폭시켜버린 것이다.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위안이 아니라, 그의 고독한 영혼에 가해진 가장 심오한 형태의 침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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