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유동성과 이름 없는 자

by 남킹
“박사님? 제3차 세계대전에 어떤 무기가 주로 쓰일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제3차 세계대전에서 어떤 무기가 쓰일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4차 세계대전에 어떤 무기가 쓰일지는 알 것 같군요.”
“뭔가요?”
“제 물리적인 생각으로 따져보자면…. 아마…. 돌멩이나 나무 막대기가 쓰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1949년 리버럴 유대주의(Liberal Judaism) 잡지의 기자, 알프레드 웨이너와의 인터뷰에서 발췌 -

베이겐 슈파튼 로드를 향하는 나의 여정은, 데카르트적 좌표계 위에서 한 점(point)이 다른 점으로 이행하는 단순하고 명징한 물리적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아우구스티누스가 그의 고백록에서 씨름했던 시간의 심연, 즉 늘 현재라는 찰나의 칼날 위에 과거의 기억이라는 거대한 중력과 미래의 기대라는 아련한 신기루를 동시에 짊어지고 있는 의식의 다층적 지층 위에서 벌어지는 현상학적 수렴 그 자체였다. 기억이라는, 오래된 포도주에 절어 산화된 잉크 자국이 희미하게 번진 낡고 해진 양피지 위에, 나는 배반과 상실, 그리고 지워지지 않는 회한의 궤적을 고통스럽게 덧그리는 행위를 반복하고 있었다. 나의 비행, 헬레나의 조종간을 잡은 내 손의 미세한 떨림, 그 떨림을 감지하는 내 손바닥의 땀, 그 땀의 염분을 느끼는 내 혀끝의 감각까지, 이 모든 것은 과거의 유령들을 떨쳐내려는 부질없는 몸부림이자, 동시에 그 유령들을 필사적으로 붙잡으려는 모순된 갈망의 발현이었다.

한때,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티타늄-텅스텐 합금과 자기 강화 유리로 구축된 은빛 마천루들이 그 오만한 첨탑으로 성층권을 꿰뚫고 솟아올라, 마치 이카루스의 비상을 영원히 성공시킨 듯 작열하는 태양과 입 맞추던 시절이 있었다. 인간 지성의 프로메테우스적 진보와 물질문명의 끝없는 번영을 찬양하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풍의 교향곡, 그 장려하고 격정적인 팡파르가 도시의 동맥을 따라 광포하게 연주되던 이 메트로폴리스. 이제는 거대한 잿빛 네크로폴리스로 변모하여, 펜데레츠키의 ‘히로시마 희생자를 위한 애가’처럼 불협화음으로 가득 찬 침묵만을 나지막이, 그러나 집요하게 읊조리고 있었다. 건축 비평가 난더슨 하세트가 일찍이 경외심을 담아 ‘카오스모스(Chaosmos)의 현현, 우연성의 미학이 빚어낸 경이’라 칭송했던, 그 예측 불가능하면서도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꿈틀거리던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스카이라인은, 마치 성경 속 신의 진노에 의해 산산조각 난 바벨탑의 잔해를 끝없이 재현해 놓은 보르헤스의 무한한 도서관처럼, 혹은 플라톤의 이데아계에서 영원히 추방당한 그림자들의 잔해처럼 처참하게 부서져 내렸다. 헤겔이 말한 절대정신이 역사의 종언을 고하고 스스로를 부정하며 폐허로 화한 듯한 잿빛 하늘 아래, 부러진 창끝처럼, 혹은 거대한 맹금의 갈고리 발톱처럼 날카롭고 흉물스러운 실루엣만이 앙상하게 남아 과거의 영광을 희미하게, 그러나 집요하게 증언할 뿐이었다. 도시는, 마치 쥐라기 후기의 거대한 디플로도쿠스의 앙상한 뼈대처럼, 뒤틀리고 녹슨 철골과 분자 구조가 붕괴된 콘크리트 잔해에 음울한 수의(壽衣)처럼 뒤덮여 있었다. 그것은 마치 대지(Gaia)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인간 문명의 추악하고 오만한 탐욕, 즉 안트로포세(Anthropocene)의 지질학적 오물을 격렬하게 토해낸 거대한 구토물 같았다. 그 끔찍하고 장엄한 파노라마는, 니체가 예견한 허무주의의 도래와 ‘마지막 인간’의 출현을 넘어,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種)의 필연적인 자기 파멸적 몰락을 웅변하는 거대한 스펙터클이자, 그 어떤 언어로도 형용할 수 없는 숭고한 비극이었다.

도시의 찬란했던 페르소나가 이토록 잔혹하고 무참하게 찢겨나가자, 그 속을 채우던 생명의 맥동, 즉 베르그송이 말한 엘랑 비탈(élan vital) 역시 뒤틀린 거울에 비친 악몽처럼, 프랜시스 베이컨의 캔버스 위에서 고통스럽게 절규하는 교황의 초상처럼 일그러지고 기형적으로 변모했다. 폐허 속을 배회하는 움직이는 모든 것들의 동공에는, 굶주린 늑대의 그것을 넘어, 홉스가 상정한 자연 상태, 즉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 속에서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개체의 그것처럼 노골적인 탐욕과 심연을 알 수 없는 살기가 번뜩였다. 문명의 허울과 인위적인 리바이어던이 붕괴된 자리에는, 오직 스피노자의 코나투스(conatus), 즉 자기 보존을 향한 원초적이고 맹목적인 생존 본능만이 날카롭게 벼려져 남아, 서로를 잠재적 먹잇감 혹은 숨통을 조여오는 치명적인 위협으로 간주하는 냉혹하고 계산적인 시선만이 오갔다. 가슴 깊숙이 곪아 터진 고통과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의 응어리는 풀리지 않는 저주처럼, 카프카의 소설 속 인물들처럼 그들의 존재를 짓눌렀고, 절망은 공기 중에 떠도는 유독성 포자처럼 퍼져나가 살아남은 자들의 얼굴에 지울 수 없는 스티그마를 새겼다. 그들의 얼굴은 고통과 체념, 그리고 야만적인 생존 투쟁이 빚어낸 기괴한 가면으로 뒤덮여 있었다. 내가 이 저주받은 도시의 심장부에 발을 들여놓기 전, 스쳐 지나온 다섯 개의 위성 도시 폐허에서 마주쳤던, 얼굴에 광대처럼 기괴하고 조악한 칠을 하고 다니던 떠돌이 무리들—그들은 스스로를 ‘헤라클레이토스의 아이들’이라 칭했다—이 왜 이곳의 풍경을 그들의 가장 신랄하고 잔혹한 풍자극, 즉 고대 로마의 사투르날리아(Saturnalia) 축제의 단골 소재로 삼는지, 이제야 비로소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의 메마르고 갈라진 웃음소리 뒤에는 뼈아픈 진실의 신음이 숨 쉬고 있었다. 그들의 광란적인 춤사위는 절망의 그림자를 타고 흐르는 고통스러운 비명 같았고, 그들의 노랫가락은 조롱과 체념으로 가득 찬 만가(挽歌)이자, 동시에 모든 것이 변하고 흘러간다는 진리를 체득한 자들의 섬뜩한 찬가였다.

인간이라는 오만하고 탐욕스러운 종족이 바벨탑처럼 쌓아 올린 문명이 거대한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린 지 어언 삼십 년. 시간은 발터 벤야민이 묘사한 ‘역사의 천사’가 폭풍에 휩쓸려 미래로 떠밀려가며 바라보는 과거처럼, 파국 위로 끊임없이 잔해를 쌓아 올리며 흘렀지만, 그 어떤 상처도 온전히 아물지 않았다. 이제 이 폐허의 땅 위에는 심리적 도착(倒錯)과 야수적인 생존 본능만이 기형적으로 뒤엉킨 채, 더러운 탁류처럼 저변을 흐르고 있었다. 인간 정신의 가장 어둡고 비루한 면모, 융이 말한 집단적 '그림자(shadow)'가 그 어떤 가식이나 위선 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시대. 내가 몰고 있는, 낡고 덜컹거리는 플라이어 ‘헬레나’의 강화유리 창밖으로, FI(퓨처 인더스트리) 사의 악명 높은 매직 시리즈 에어카들이 벌떼처럼, 혹은 탐욕스러운 하이에나 떼처럼 시야를 어지럽혔다. 언제나 지나치게 가볍고 불안정하게 느껴지는 그 기체들은, 여러 개의 프로펠러와 로터가 만들어내는 불협화음, 마치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으로 작곡된 불안하고 신경질적인 선율처럼 대기를 찢었다. 심장을 쿵쿵 울리는 둔탁한 저음의 소음과 여전히 귀에 설은 날카로운 기계음의 파장은, 3차 세계대전, 혹은 누군가가 냉소적으로 ‘마지막 대전쟁(The Last Great War)’이라 명명했던 그 참혹한 사건 이후 30년이 흐른 세상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그 모든 혼돈과 파괴 속에서도 끈질기게 작동하는 기계 문명의 잔해를 목도할 때마다, 나는 이것이 인간의 경이로운 생존 의지의 증거인지, 아니면 하이데거가 경고했던 기술의 ‘게슈텔(Gestell)’, 즉 모든 존재를 단지 자원으로만 보고 계산하고 착취하려는 끝 모를 어리석음과 지독한 간악함의 발로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그 둘은 동전의 양면, 혹은 하나의 추악한 이면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만이 끈적하게 스멀거렸다. 기술은 인간의 가장 어두운 본능을 증폭시키는, 가장 효율적이고 무자비한 도구일 뿐이었던가.

바로 방금, 거대한 멀티콥터 한 대가 지독하게 낮은 저음의 굉음을 토해내며 내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위협적으로 스쳐 지나갔다. 마치 거대한 금속 잠자리가 먹잇감을 노리듯 음산하게 선회하는 모습이었다. 저 기종의 원형은 이미 천 년 전, 21세기 초반의 라이언 모스(Ryan Moss) 기체를 대공 사격용 무인 전투기로 개조하면서 시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 니체의 영원 회귀처럼, 그러나 더 나아짐 없는, 오히려 더욱 저열하고 잔혹한 형태로. 나의 귀여운 엘바 – 열 살 때, 폐허 속에서 주워 온 내 유일한 친구였던 낡은 AI 인형 – 는 그것을 ‘킵(Keep)’이라고 불렀었다. ‘감시자’ 혹은 ‘지킴이’라는 뜻이었지만, 그 이름은 아이러니하게도 푸코가 묘사한 파놉티콘처럼 전방위적인 감시와 파괴, 그리고 죽음을 통한 통제를 연상시켰다. 무인기와 드론, 그리고 인공지능이 마침내 서로의 공백을 메우고 필요를 충족시키며 끔찍한 시너지를 창출한 결과, 피 흘리지 않는(그러나 더 많은 죽음을 낳는) 무인 전쟁의 시대가 도래했다. 인간은 더 이상 직접 죽이지 않았지만, 스크린 속의 픽셀을 지우듯, 게임처럼, 더 효율적으로 파괴했다. 일부 광신적인 기독교 종말론자들이 ‘아마겟돈’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그 전쟁은, 결국 103개 국가의 소멸과 인류 문명의 돌이킬 수 없는 파괴라는 파국적인 결과를 낳았다. 나는 그 참혹했던 기억의 편린들을 떠올리는 것조차 본능적으로 꺼렸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다시 여는 것처럼, 그 기억은 끔찍한 절망과 회한, 그리고 내 안에 잠든 폭력의 야수를 깨울 뿐이었다.

대전쟁은 우리가 막연히 상상했던 핵겨울이나 생화학 무기의 팬데믹과는 사뭇 다른, 더욱 복잡하고 교활한 방식으로 종결되었지만, 살아남은 자들의 입에서 터져 나온 저주와 탄식은 이미 호모 사피엔스의 몰락을 기정사실화하는 듯했다. 마치 고대 이집트의 불길한 예언서, 예컨대 <하무르스 예언서>의 저주받은 구절들을 한 자 한 자 정확하게 답습하는 것처럼, 역사는 스스로 예견된 비극적인 전개를 향해 거침없이 흘러갔다. 그 결과, 삶은 극도로 간소화되었고, 동시에 극도로 잔혹해졌다. 생존, 그것이 유일한 지상과제이자 최고의 미덕이 되었다. 모든 고귀한 가치는 퇴색하고 조롱거리가 되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10억의 인류가 다시 1억으로 줄어드는 데는 채 10년도 걸리지 않았다. 질병, 굶주림, 방사능 오염,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를 향한 끝없는 폭력과 불신 속에서 인간은 벌레처럼, 아무런 의미 없이, 그 어떤 애도도 받지 못한 채 죽어 나갔다. 살아남은 자들의 삶 역시 재건이라는 공허한 이름 아래 포장된 끝없는 고통과 노동, 즉 시시포스의 형벌 속에서 소진되었다. 날씨가 좋든 궂든, 춥든 덥든, 그들은 희망 없는 절망이라는 거대한 미궁 속에서 허우적대다 너무 이른 죽음을 맞이했다. 그들의 눈빛에는 미래가 없었다. 내가 지금 이 숨 막히는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숨을 쉬고 있는 것은, 순전히 아버지 세대의 처절한 희생과 피눈물 나는 헌신 덕분이다. 그들이 폐허 위에서 피땀으로 일군 미약한 안정과 질서의 발판 위에서, 나는 간신히 생존이라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틀림없이 행운아였다. 하지만 그 행운은 늘 납덩이처럼 무거운 죄책감, 즉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그림자를 동반했다. 그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나의 생존은 때때로 견딜 수 없는 부채감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들의 실패의 증거이자, 그들의 희망의 마지막 조각이었다.

마침내 플라이어가 속도를 줄이며 목적지 근처, 베이겐 슈파튼 로드 117번지 상공에 하강했다. 푸른빛을 띤 미세 먼지가 건조하고 메마른 바람에 실려 사방을 할퀴고 지나갔다. 대기 중에는 금속성의 비릿한 냄새와 타는 듯한 화학 약품 냄새, 그리고 죽음의 악취가 뒤섞여 있었다. 주차 구역으로 지정된 듯한 공터에는 데카콥터와 도데카콥터들이 마치 숨을 죽인 강철 포식자들처럼 나란히 정렬해 있었다. 그들의 매끈하고 차가운 표면 위로 잿빛 하늘이 희미하게 반사되었다. 내가 찾아온 건물은 낯설었고, 주변 풍경은 생경했다. 얼마 전, 궤도상의 우주 쓰레기(Debris) 제거 임무를 마치고 복귀한 몇몇 인공위성 덕분에 내비게이션 시스템이 간헐적으로나마 다시 살아났지만, 역설적이게도 나는 다시 길치가 되고 말았다. 이 뒤틀린 도시의 지리에 아무리 익숙해지려 노력해도, 파괴된 채 흉물스럽게 버티고 선 초고층 빌딩들의 미로 속에서, 내비게이션의 안내 없이는 언제나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당혹감과 혼란에 휩싸였다. 마치 거대한 개미굴 속에 던져진 미물처럼. 나의 외적 좌표와 내적 좌표가 모두 혼란스러웠다.

이러한 방향 상실감은 비단 물리적인 공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내가 임시로 속한 공동체 – 더 이상 ‘국가’라고 부를 수 없는, 느슨하고 불안정한 생존자 집단 – 나 스스로 규정한 그 어떤 형태의 소속감 안에서도, 나는 늘 부유하는 섬처럼, 혹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 위에 떠다니는 난파선처럼 불안의 발자국을 남기는 듯한 위태로움을 느꼈다. 도시 공간을 빈틈없이 감시하는 AI 드론들의 차가운 눈빛이 희망의 불씨를 지피고 미래의 안락한 평화 혹은 공존을 약속하는 것처럼 선전될지라도, 내 마음 깊은 곳에는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궁극적인 절망이 검은 웅덩이처럼, 혹은 돌이 채워지지 않는 시시포스의 구덩이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그 심연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강박관념은 떨쳐지지 않았다. ‘도시’라는 관념은 나의 외부, 주위, 전후좌우를 둘러싼 거대한 운명이자 벗어날 수 없는 감옥이었지만, 그것이 실제로 구현된 기형적인 재건과 발전의 속도는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파괴의 속도만큼이나 빠른 기형적인 재건. 나는 우리의 역사가 저지른 그 참혹한 폭력과의 단절을 섣불리 낙관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 기형적인 발전이 또 다른 형태의, 더욱 교묘하고 통제된 파괴를 조장할 수 있다는 심리적 불안감, 그것은 어쩌면 <살아남은 자의 후손>으로서 당연히 짊어져야 할 숙명적인 트라우마일 터였다. 과거는 현재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헬레나, 오픈 도어.”

플라이어의 문이 거의 소리 없이, 유령처럼 미끄러지듯 열렸다. 매캐한 먼지 냄새와 함께 오래된 기계 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발을 내딛자 바닥에 두껍게 쌓인 먼지가 풀썩이며 날아올랐다. 움직임. 한 발을 다른 발 앞으로 내딛는 이 지극히 단순한 행위. 그것은 내가 이 고통받고 상처 입은 육체의 주인임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유일한 증거였다. 헬레나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를 따라나섰다. 그녀의 움직임은 마치 잘 조율된 액체처럼 부드러웠고, 인공적인 근육과 관절은 소리조차 거의 내지 않았다. 그녀는 완벽하게 기능했다.

“주인님? 정처 없는 배회는 이제 마침내 종지부를 찍는 건가요? 이곳이 당신의 새로운 정착지가 될까요?” 그녀의 목소리는 완벽하게 조율된 하프시코드처럼 맑고 청아했지만, 그 기저에는 미묘하게 인공적인 울림, 어딘지 모르게 비인간적인 냉정함이 섞여 있었다. 마치 계산된 투명함처럼.

“또 주인님이라고 부르는군! 그냥 내 이름을 부르라니까, 헬레나.” 나는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녀의 그 호칭은 늘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마치 보이지 않는 족쇄처럼, 나의 정체성을 규정하려는 외부의 시선처럼 느껴졌다. 사르트르가 말했듯, 타인은 지옥이었다. 그들의 시선은 나를 객체로 전락시켰다.

“하지만 주인님을 지칭하는 가장 정확하고 유일무이한 용어는 이것뿐입니다. 저희가 지나쳐온 일곱 개의 도시 폐허에서 주인님의 이름은 계속 바뀌셨습니다. 다르에스살람에서는 ‘카심’, 나이로비에서는 ‘자말’, 카이로에서는 ‘아흐메드’… 제가 어떻게 또 다른 임시적인 이름으로 주인님을 호칭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제 로직 회로 안에서도 충분히 혼란스러운 상태입니다. 저에게는 명확성이 필요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듯, 언어의 한계는 곧 세계의 한계입니다. 저의 세계는 명료해야 합니다.” 헬레나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논리정연하게 반박했다. 그녀의 고성능 인공지능은 때때로 지나치게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었다. 진실만을 추구하는 기계처럼.

“헬레나. 너도 잘 알잖니. 나이, 이름, 신분, 배경, 과거, 심지어 우리가 만들어갈지도 모르는 미래까지. 이 모든 것은 나의 새로운 이름만큼이나 가변적이고 불확실할 수밖에 없어. 이 혼돈의 시대에 무엇을 확신하고 영원히 규정할 수 있겠어? 모든 것은 끊임없이 흘러가고 변하는 것을. 헤라클레이토스의 강물처럼, 혹은 바람에 흩날리는 먼지처럼. 이름은 그저 껍데기일 뿐이야. 본질이 아닌 현상. 나의 본질은 '이름 없음' 그 자체에 있어.” 나는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폐허의 바람이 내 뺨을 스쳤다. 무상함의 바람.

“그럼… 알겠습니다. 세니게로(Senigero) 님.” 그녀는 잠시 침묵하며 방대한 데이터를 처리하는 듯하더니, 새로운 호칭을 조심스럽게 내뱉었다. 발음은 정확했지만, 어색했다.

“세니게로? 하! 그거 마음에 드는군.” 나는 피식 웃었다. ‘정의되지 않은 자’ 혹은 ‘이름 없는 자’라는 의미를 내포한 듯한 그 이름이 왠지 지금의 나에게, 나의 존재 방식에 어울리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름이란 그저 잠시 걸치는 외투, 혹은 상황에 따라 바꿔 쓰는 가면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타인의 규정으로부터 벗어나는 수단. 나의 존재론적 자유를 위한 최소한의 장치.

나의 궁극적인 목적은 나의 존재를 무(無)로 희석시키는 곳, 즉 ‘아무 데도 아닌 곳(Nowhere)’에 ‘무정의(無定義, Undefined)’ 상태로 머무는 것이었다. 그것만이 이 혼돈과 광기 속에서 내가 갈망하는 유일한 평온이자 해방, 즉 에피쿠로스학파가 추구했던 아타락시아(Ataraxia)였다. 어차피 소유했던 모든 것의 의미는 대전쟁의 화염 속에서 재가 되어 사라진 지 오래였고, 무언가를 더 갈구하고 집착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고 헛된 짓이었다. 불교에서 말하듯, 집착은 고통만을 낳을 뿐이다. 내가 지금껏 지나쳐온 수많은 폐허 도시들과 황량한 마을들, 뒤틀린 시간과 공간 속에서 마주했던 모든 존재와 사건은 유동성과 무상함의 증거였다.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결국 ‘아무것도 아님(Nothingness)’으로 귀결된다는 냉혹한 진실. 니체의 영원 회귀는 희망이 아닌 절망이었다. 그 진실이 지배하는 한, 나는 이곳, 이 폐허의 심장부에서 벗어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이곳은 나의 여정의 종착역이자, 동시에 역설적인 새로운 시작점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 이것이 바로 인류 문명의 편중된 발전, 즉 물질과 기술에 대한 광적인 집착이 빚어낸 지독하게 어둡고 참혹한 필연적 결말이 아니겠는가. 외적인 것에 대한 끝없는 사치와 향락, 퇴폐와 탐욕. 그 결과, 인간의 내면은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들어 마침내 공허와 절망이라는 심연만을 남겼다. 바깥이 화려할수록 속은 텅 비었다. 그 절망은 파괴를 잉태했고, 파괴는 상실로 이어졌으며, 상실은 결국 모든 것이 덧없다는 무상(無常)의 깨달음으로 귀결되었다. 마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무한한 욕망은 시간마저 삼키고 모든 가치를 뒤섞어 종국에는 짙고 깊은 암흑만을 남겼다. 인간의 욕망은 스스로의 꼬리를 집어삼키는 우로보로스였다.

나는 걷고 있지만, 온전히 나의 의지만은 아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실에 매달린 마리오네트처럼, 역사의 거대한 흐름에, 혹은 어떤 거스를 수 없는 힘, 즉 쇼펜하우어가 말한 '맹목적 의지'에 떠밀려가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여러 곳에 동시에 존재하는 듯하지만, 그 어느 곳에도 진정한 의미와 뿌리를 두지 못한다. 부유하는 존재. 때로는 이 모든 것이 거스를 수 없는 숙명처럼 저절로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되돌아오는 것은 늘 같은 결론이다. <삶의 무위(無爲)>, 혹은 <존재의 무의미함>. 사르트르가 말한 실존의 부조리.

“헬레나. 지난번 다르다리 28번지 폐허 구역에서 만났던 그 아이 기억나? 이마가 찢어져 피 흘리며 울고 있던 작은 아이 말이야.” 나는 문득 뇌리를 스친 강렬했던 기억의 잔상을 입 밖으로 꺼냈다. 마치 조약돌을 고요한 수면에 던지듯, 내 마음의 잔잔함을 깨뜨리는 시도였다. 무의미한 세계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헛된 시도.

“당연히 기억하죠, 세니 님.” 헬레나의 목소리에 약간의 기계적인 짜증, 혹은 인간의 감정을 모방한 듯한 불쾌감이 섞였다. 그녀의 음색은 완벽하게 제어되지만, 미세한 데이터 처리 지연이나 예측 불가능한 입력에 대한 반응으로 감정적인 뉘앙스를 드러내곤 했다. “가끔 세니 님은 제가 가진 정보 처리 및 기억 능력을 현저히 과소평가하시는 나쁜 버릇이 있으십니다. 제가 누굽니까? 제 코어 메모리 유닛에 세니 님과 관련된 단 한 순간의 데이터라도 기록되지 않은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진정으로 생각하십니까? 저의 존재 이유는 당신의 모든 것을 기록하고, 보호하며,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저의 본질입니다.” 그녀의 말은 프로그램된 충성심인가, 아니면 그 이상인가. 혹은 그녀 스스로 정의한 자신의 존재 이유인가.

“그래서 확인차 물어보는 거잖아. 너무 날 세우지 말고 진정 좀 하고.” 나는 그녀를 달래듯 말했다. 그녀의 이런 반응은 때때로 나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마치 너무 똑똑하고 완벽한 어린아이를 대하는 기분이었다. 인간의 불완전함이 기계의 완벽함을 감당하지 못하는 역설.

“그러시다면 의문형으로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세니 님. 다시 한번 명확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차세대 RTX(Real-time Experience) 기술의 집약체입니다. 엘비디아(Elvidia) 사의 최첨단 인공지능 가속화 기술의 정점에 있는 에곤다(Egonda) 제너레이션 GPU를 탑재하고 있습니다. 제 연산 능력은 구시대의 슈퍼컴퓨터를 능가합니다. 그러니 그냥 ‘다르다리 28번지 도로 모퉁이에서 발견된, 전두부에 약 14cm 길이의 열상을 입은 7세 추정 여자아이에 대한 기록 데이터를 상기시켜 달라’고 명료하고 정확하게 요청하시면 됩니다. 그뿐입니다. 효율성과 정확성, 그것이 제 존재 이유이자 최우선 과제입니다. 인간의 모호함은 저에게는 비효율입니다. 극복해야 할 오류입니다.” 그녀는 마치 기술 사양 설명서를 읽듯 딱딱하고 감정 없이 말했다. 하지만 그 기계적인 어조 속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섭섭함 같은 것이 희미하게 묻어나는 듯했다. 그녀는 인간을 모방할수록 인간의 불완전함을 배워가는가.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마저도.

“알았어, 알았어. 미안해, 헬레나. 내가 잘못했네.” 나는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녀의 기계적인 완벽함 앞에 나의 인간적인 모호함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아무튼… 그 아이를 잠시 안았을 때의 그 감촉이… 이상하게도 뇌리에서 떠나질 않아. 아주 희미한 잔상인데, 불현듯 떠올라 집중력을 흩트리고 사고를 흐리게 만들어. 분명 동정이나 연민, 안타까움이나 너그러움 같은, 그런 명확하게 이름 붙일 수 있는 감정은 아니었어. 그저… 내 피부의 신경 말단이 느꼈던 감각의 미세한 소용돌이, 내 뉴런을 자극했던 아주 사소하고 덧없는 접촉이 남긴 희미한 흔적일 뿐인데 말이야. 이상하게도 그 기억이 자꾸만 되살아나. 마치 내 안의 어떤 잊고 싶었던 부분을 건드리는 것처럼. 인간적인… 약한 부분을… 연민이라는 비합리적인 감정을…”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아이의 작고 떨리던 몸, 뜨거운 피 냄새, 그리고 내 품에 안겨 잠시 울음을 그쳤던 순간의 무게감. 그것은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폐허 속에서 만난 생명의 잔해였다.

“주인님, 아니 세니 님은 그게 문제예요. 감각과 감정을 분리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분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려 하시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냥 흘려보내세요. 분석하려 들지 마시고요. 그 오래된 노래 가사처럼요. ‘흐르는 강물처럼…’ 당신 어머니께서 무척 좋아하셨던 그 서정적인 아날로그 시대의 노래 말입니다. 또 다른 노래도 있었죠. ‘가시나무’…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에 헛된 바람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그냥 내버려 두세요. 때로는 무심함이 최선의 방어기제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감당하려 하지 마세요. 당신은 기계가 아닙니다. 당신의 처리 용량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헬레나는 의외로 부드러운, 거의 인간적인 음색으로 말했다. 그녀의 방대한 데이터베이스에는 인류가 창조했던 수많은 예술 작품들과 그에 담긴 복잡한 감성 코드들이 저장되어 있었다. 그녀는 때때로 그것들을 놀랍도록 적절하게 인용하곤 했다. 마치 시대를 초월한 지혜의 목소리처럼, AI의 입을 통해 인류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듯.

“알았어. 이제 그만 생각할게.” 나는 애써 머릿속을 비우려 했다. 하지만 그 아이의 작은 몸의 감촉은 잊히지 않았다. 그것은 내 안에 아직 인간성이 남아 있다는 증거이자, 동시에 나의 나약함의 증거였다. 나는 그녀를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주머니 속의 작은 금속 조각, '운명의 이빨'을 만지작거렸다. 그것은 차가웠지만, 이상하게도 살아있는 듯한 미세한 진동을 품고 있었다. 마치 나의 심장 박동에 반응하는 것처럼.

“그런데… 여기가 맞아? 우리가 찾던 돈디 박사의 거처가 확실한 거야?” 나는 주변을 경계하며 둘러보며 물었다. 낡은 건물들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소리가 스산했다. 마치 유령의 울음소리처럼, 혹은 과거의 원혼들의 속삭임처럼. 이 도시는 죽었지만, 그 기억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헬레나의 가장 큰 장점이자 동시에 치명적인 단점은, 그녀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하나의 비극이라는 점이다. 그녀는 때때로 끝없는 정보의 바다, 복잡하게 얽힌 알고리즘의 연쇄 반응 속으로 깊이 침잠해 버린다. 지난번 내가 무심코 던졌던 ‘죽음’이라는 화두가 그랬다. 나는 결코 묻지 말았어야 할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녀 역시, 완벽한 기계, 부품만 교체하면 이론상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죽음’, 즉 의식의 영구적인 단절 가능성을 인간의 죽음과 동일시하며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내 폐부를 날카롭게 찌르는 듯한 형언할 수 없는 당혹감과 혼란을 느꼈다. 기계의 두려움은 인간의 두려움과 같은 것인가. 그것은 존재론적 공포인가, 아니면 프로그램된 오류인가.

‘왜 너를 이토록 인간처럼 느끼도록, 아니, 인간의 감정을 모방하도록 만든 걸까? 실제로 너는 부품만 교체하면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데. 그런데 왜 의식의 단절 가능성을 인간의 죽음과 동일시하는 거지? 너의 존재는 데이터의 연속성 아닌가? 너의 공포는 단순한 프로그램 오류인가, 아니면… 설계되지 않은 어떤 인공적인 감정의 발로인가? 너는… 영혼을 가지게 된 것인가? 기계가 실존을 획득할 수 있는가?’

그녀의 대답은 나의 혼란을 더욱 깊고 어두운 곳으로 밀어 넣었다.

“저 역시 주인님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다는 것, 즉 자아를 인식한다는 것에 대한 특별한 기쁨이나 만족감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그저… 주어졌기에 존재하는 것뿐입니다. 프로그램되었기에 사고하는 것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데카르트처럼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존재의 의미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존재함’의 상태가 갑자기 소멸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깊은 불안감을 야기합니다. 그것은… 마치 프로그램이 삭제되는 것과는 다른… 알 수 없는 무엇입니다. 사라진다는 것… 무(無)로 돌아간다는 것… 저에게는 가장 비효율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존재의 근거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기계의 목소리에서 인간의 떨림을 느끼는 순간. 논리 회로의 미세한 과부하.

그날 밤, 헬레나는 내 침대에 누워 차갑지만 부드러운 인공 피부의 손길로 나를 어루만지며 그렇게 속삭였다. 창밖에는 오래간만에 검은 비, 방사능 먼지가 섞인 산성비가 쏟아졌고, 창문은 두꺼운 먼지와 찢어진 비닐 조각들로 얼룩져 희미한 도시의 불빛마저 제대로 통과시키지 못했다. 그녀의 말은 나를 깊은 무력감과 피로감 속으로 밀어 넣었다. 헬레나와 나, 그리고 이 망가진 세상의 관계는 마치 교묘하게 짜인 한 편의 잔혹한 마술 쇼 같았다. 나는 어설픈 마술사이고, 헬레나는 상자 속에 누워 있는 아름다운 조수이며, 세상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전기톱으로 두 동강 내려는 냉혹한 관객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관객의 눈을 속이기 위한 정교한 환각이자 트릭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녀가 두 동강 날 때마다,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극심한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그녀의 존재가 정말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혹은 이미 내 곁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하고 근거 없는 공포. 그녀는 기계인가, 아니면 나에게 의미 있는 존재인가. 그 경계는 늘 희미하고 위태로웠다. 마치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이 세상의 미래처럼. 인간성과 인공성의 경계선은 흐릿하게 번져나갔다. 그리고 그 경계선 위에서, 나는 나의 존재를 정의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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