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1
차은숙(36세)이라는 여자에게 돈은 종교이자 신이었고, 생존 그 자체였다.
그녀가 세상을 보는 방식은 단순했다. 세상은 돈이 있는 자와 없는 자로 나뉘었고, 돈이 없는 자는 있는 자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게 마련이었다. 그녀는 다시는 빼앗기는 쪽이 되지 않겠다고, 15살의 어느 비 오는 날 밤, 흠뻑 젖은 채로 맹세했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의붓아버지의 폭력이라는 지독한 얼룩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는 술에 취하면 으레 그녀를 찾았다. 엄마는 방 안에서 문을 잠근 채 못 들은 척했고, 어린 은숙은 짐승처럼 변한 남자의 주먹과 발길질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그가 그녀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더 이상 그 지옥에 머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그날 밤, 돼지 저금통을 깨서 나온 몇천 원을 들고 맨발로 집을 뛰쳐나왔다.
그 후 그녀의 인생은 닳아빠진 고무줄 같았다. 굶주리지 않기 위해, 얼어 죽지 않기 위해 그녀는 무슨 짓이든 했다.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고, 공장에서 미싱을 돌리고, 다방에서 커피를 날랐다. 하지만 세상은 그녀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어딜 가나 그녀의 어리고 순진한 얼굴을 이용하려는 남자들이 있었고, 그녀는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해져야만 했다.
손버릇이 나빠진 것은 그때부터였다. 동료의 지갑에 손을 대고, 가게의 금전 등록기에서 돈을 빼돌렸다. 한곳에 정착할 수 없는 유령 같은 삶. 그녀는 도시의 뒷골목을 떠돌며, 인간에 대한 불신과 돈에 대한 집착을 키워나갔다.
그러다 서른이 될 무렵, 그녀의 인생에 황정아라는 여자가 나타났다.
두 사람이 만난 곳은 강남의 한 고급 룸살롱이었다. 은숙은 그곳에서 더 이상 어리지 않은 나이 때문에 찬밥 신세였지만, 황정아는 달랐다. 그녀는 은숙보다 열 살이나 어렸고, 현역 대학생이라는 타이틀까지 가지고 있었다.
황정아가 술집에 나오는 이유는 단 하나, 그녀의 끝없는 사치벽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명품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신상 구두부터 한정판 가방까지, 그녀의 SNS는 온갖 사치품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그녀는 예쁘기도 했지만, 남자 손님들을 홀리는 애교와 기술이 남달랐다. 돈 많은 늙은 남자들은 그녀의 발치에 수백만 원짜리 돈다발을 던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차은숙은 그런 황정아를 보며 속이 뒤틀리는 질투를 느꼈다.
‘저년은… 나랑 다른 게 뭐야? 똑같이 몸 팔고 웃음 파는 건데, 왜 저년한테만 돈이 쏟아지는 거지?’
더욱 그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것은, 황정아가 매일같이 최고급 사치품으로 온몸을 도배하고는 대기실에서 그것들을 뽐낸다는 사실이었다.
“언니, 이 구두 어때요? 이번에 새로 나온 건데, 500밖에 안 하더라고. 어제 김 사장님이 사줬어요.”
그 천진난만한 자랑질이, 은숙에게는 칼날이 되어 심장에 박혔다. ‘500밖에.’ 그 가벼운 한마디가 은숙이 평생을 발버둥 쳐도 만져보지 못한 돈의 무게였다.
그날 이후, 은숙은 황정아를 은밀하게 미행하기 시작했다. 며칠간의 미행 끝에, 그녀가 논현동의 한 오피스텔에 혼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완벽한 범죄를 위한 무대가 마련된 것이다.
며칠 뒤, 황정아가 일을 나간 것을 확인한 은숙은 그녀의 집 앞으로 갔다. 그리고 태연하게 열쇠 수리공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저씨, 여기 논현동 OOO 오피스텔인데요. 제가 키를 잃어버려서요. 문 좀 따주실 수 있을까요? 신분증은 집에 있는데…”
수리공은 아무 의심 없이 그녀를 집주인이라 믿고 잠긴 도어락을 열어주었다. 심지어 그녀의 요청에 따라 새로운 비밀번호까지 설정해주었다. 은숙의 심장이 탐욕으로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날 오후 내내, 은숙은 황정아의 모든 것을 자신의 낡은 차로 옮겼다. 옷장 가득한 명품 옷과 가방들, 신발장에 진열된 수십 켤레의 구두, 화장대 위의 값비싼 보석들까지. 그녀는 황정아의 삶을 통째로 훔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기다렸다. 황정아가 돌아오기를.
동이 트기 시작하는 새벽녘, 술과 피로에 지친 황정아는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비밀번호를 누르자, 문은 열리지 않았다. 당황한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문이 안에서 열렸다.
“언니…?”
집 안에는 차은숙이, 황정아 자신의 옷을 입고, 웃고 있었다.
“정아야, 왔어? 네가 하도 안 와서 한참 기다렸잖아.”
“언니가 왜 우리 집에… 이게 다 무슨 짓이야!”
황정아가 소리치는 순간, 은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시끄러. 조용히 해.”
은숙의 눈은 더 이상 그녀가 알던 어수룩한 언니의 눈이 아니었다.
은숙은 겁에 질려 우는 황정아를 협박하여 그녀의 통장 비밀번호를 모두 알아냈다. 그리고 숨겨진 작은 금고를 열게 하여 현금 다발과 보석까지 모조리 빼앗았다. 모든 것을 손에 넣은 후, 은숙은 황정아를 내려다보았다.
“언니, 제발… 돈은 다 가져가도 좋으니까 목숨만은 살려주세요. 네? 신고 안 할게요. 절대…”
황정아는 눈물로 애원했다. 하지만 은숙은 차갑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넌 날 알잖아. 그리고… 난 그냥 돈만 필요한 게 아니거든.”
“그럼… 뭘 원하는데…”
“네가 가진 거 전부. 네 인생까지도.”
은숙은 부엌에서 가져온 밧줄로 황정아의 목을 졸랐다. 황정아의 눈이 공포로 하얗게 뒤집히고, 가녀린 몸이 잠시 허공에서 버둥거리다 이내 축 늘어졌다. 3년 후, 이 사건은 단순 강도 사건으로 종결되었고,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 새로운 가면, 새로운 사냥터
황정아의 모든 것을 훔친 차은숙은 멀리 지방으로 내려가 몇 년간 여왕처럼 살았다. 하지만 계획 없이 쓴 돈은 모래성처럼 금세 허물어졌다. 3년도 되지 않아 다시 빈털터리가 된 그녀는, 또다시 돈을 벌기 위해 움직여야 했다.
그녀의 나이는 이미 서른 중반을 향하고 있었다. 더 이상 룸살롱에서 젊음과 미모를 무기로 삼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 푼돈에는 만족할 수 없는 몸이 되어 있었다. 황정아를 죽이고도 아무런 추적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녀를 더욱 대담하게 만들었다. 완벽 범죄의 성공 경험은 그녀에게 위험한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그녀가 선택한 새로운 직업은 바로 ‘출장 마사지사’였다.
이 직업은 그녀의 목적에 완벽하게 부합했다. 합법적으로 남의 사적인 공간, 즉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집의 구조와 보안 상태, 그리고 돈이 될 만한 물건들을 미리 봐 둔 다음, 나중에 다시 찾아와 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마사지는 범죄를 위한 위장이자 사전 답사였다.
그렇게 초보 출장 마사지사가 된 그녀에게 기술을 전수해 준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김민지였다.
두 사람이 만난 곳은 마사지사들이 대기하는 허름한 오피스텔이었다. 민지는 갓 들어온 은숙에게 아무런 의심 없이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가르쳐주었다.
“언니, 손님 몸은 그냥 주무르기만 하면 안 돼요. 근육의 결을 따라서 부드럽게 압을 줘야 풀려요. 이렇게요. 그리고 손님이랑 대화할 때는 너무 사적인 걸 묻지 말고, 그냥 편안하게 일상적인 이야기만 하는 게 좋아요.”
민지는 진심으로 은숙을 대했다. 자신처럼 힘든 삶을 사는 여자라는 동질감, 그리고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언니라는 생각에 그녀는 더욱 마음을 열었다. 은숙 역시 겉으로는 민지를 따랐다.
“어머, 민지 너는 손끝이 진짜 야무지다. 기술이 장난 아니네. 나도 너처럼 잘할 수 있을까?”
“그럼요, 언니. 하다 보면 금방 늘어요.”
두 사람은 일이 없는 날이면 함께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거나, 서로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고단함을 달랬다. 민지는 은숙에게 자신의 아픈 엄마 이야기와, 미국에서 돌아온 동생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은숙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맞장구를 쳤다.
“아이고, 민지 네 인생도 참 기구하다. 그래도 동생이라도 찾아서 얼마나 다행이야.”
하지만 그녀의 속마음은 차가웠다.
‘흥, 신파 찍고 있네. 동생은 왜 돌아와서 밥만 축내고 지랄이야. 나 같으면 벌써 내쫓았겠다.’
은숙에게 민지는 그저 이용하기 좋은, 순진하고 어리석은 동생일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날카로운 발톱을 숨긴 채, 민지와의 기묘한 우정을 이어가며 새로운 사냥감을 물색하고 있었다.
# 운명을 뒤바꾼 한 통의 전화
그러던 어느 날 오후.
그날따라 유난히 콜이 없었다. 민지와 은숙은 대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지루하게 TV를 보고 있었다.
“아, 심심해 죽겠다. 오늘 이대로 공치는 거 아니야, 우리?” 은숙이 하품을 하며 말했다.
“그러게요, 언니. 월요일이라 그런가.”
바로 그때, 실장의 전화가 울렸다. 이번 콜은 민지의 차례였다.
“김민지 씨! 지금 바로 준비해서 강남 OOO 오피스텔로 가.”
“네, 실장님. 바로 가겠습니다.”
민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외출 준비를 서두르던 순간, 그녀의 개인 휴대폰이 날카롭게 울렸다. 발신인은 ‘배동식 부장’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여보세요.”
“김민지 씨? 어디야, 지금?” 수화기 너머로 술에 취한 배동식의 혀 꼬부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지금 밖인데요, 부장님.”
“그래? 잘됐네. 내가 지금 XX 호텔에 방 하나 잡아놨거든. 심심한데 몸이나 풀까? 당장 이리로 와. 30분 준다.”
그의 일방적인 통보에 민지는 당황해서 대답했다.
“부장님, 저 지금은 정말 안 되는데요. 일이 있어서…”
“안 돼? 뭐가 안 돼! 야, 너 지금 내가 부르는데 토를 다는 거야? 너 내가 출장 마사지 뛰는 거 회사에 다 불어버리기 전에 당장 튀어와. 알았어?”
그의 목소리는 협박으로 돌변했다. 전화기 너머로 여자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다른 여자와 함께 있으면서 자신을 부른 것이다. 수치심과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민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입술을 깨물며 전화를 끊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은숙이 물었다.
“왜 그래, 민지야? 아까 그 상사 새끼야?”
민지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 저런 개쓰레기 같은 놈을 봤나. 어떡할 거야? 가야 해?”
민지는 거의 울상이 되어 말했다.
“어떡해요… 가야죠. 안 그러면 저 회사 잘려요.”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일을 못 하게 되었다고 말하려는 민지의 팔을, 은숙이 붙잡았다.
“가지 마.”
“네?”
“너는 저런 쓰레기 상대하지 마. 내가 대신 갔다 올게, 그 오피스텔.”
은숙의 눈빛이 기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언니가요? 하지만…”
“괜찮아. 어차피 나도 오늘 공칠 뻔했는데 잘 됐지 뭐. 너는 저 상사 놈한테 가서 대충 시간이나 때우다 와. 대신 나중에 나한테 술이나 한잔 사라. 알았지?”
은숙은 민지의 등을 떠밀며 윙크를 했다. 민지는 그런 그녀가 너무나 고맙고 든든하게 느껴졌다.
“언니… 정말 고마워요.”
민지는 몰랐다. 은숙의 친절이, 자신과 그녀, 그리고 또 다른 한 남자의 운명을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몰아넣는 방아쇠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 포식자, 더 강한 포식자를 만나다
차은숙이 도착한 곳은 허름한 다세대 주택이었다. 그녀는 지저분한 건물 외관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젠장, 이런 데 사는 놈이 무슨 돈이 있어서 마사지를 받는 거야? 오늘은 완전히 공쳤네. 기름값도 안 나오겠구만.’
그녀는 투덜거리며 2층으로 올라가 초인종을 눌렀다. 문을 열고 나온 남자는 의외로 깔끔한 차림이었다. 막 샤워를 마친 듯, 비누 냄새가 희미하게 풍겼다.
“안녕하세요. 마사지 불러서 왔습니다.”
“아, 네. 들어오세요.”
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은숙이 집 안으로 들어서자, 남자는 현관문을 닫고는 지갑에서 빳빳한 5만 원짜리 네 장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팁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20만 원. 그녀가 받아본 팁 중에 가장 큰 액수였다. 그녀의 기분이 한순간에 좋아졌다. 실망했던 마음이 기대감으로 바뀌었다.
‘어라? 이놈 봐라? 생긴 건 멀끔하니 돈도 좀 있나 본데?’
그녀는 그를 마사지하며 주변을 꼼꼼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집은 겉보기와 달리 아주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먼지 한 톨 없이 닦인 가구들, 각 잡혀 개어진 옷가지들. 병적인 결벽증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다 그녀의 시선이 방 한구석에 놓인 작은 금고에 멈췄다. 그녀의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그 금고, 예전에 황정아의 집에서 봤던 것과 아주 흡사한 모델이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을까. 현금? 보석? 그녀의 머릿속에서 탐욕의 계산기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래, 오늘은 이놈을 확실하게 내 손님으로 만드는 거야. 그리고 다음번에 이 집을 털자.’
계획을 세운 은숙의 손놀림이 달라졌다. 그녀는 민지에게서 배운 온갖 종류의 마사지 기술을 정성껏 쏟아부으며 아주 친절하게 봉사했다.
“손님, 어깨가 많이 뭉치셨네요. 컴퓨터 앞에 오래 앉아계시나 봐요.”
“아… 네. 그런 편입니다.”
“제가 시원하게 다 풀어드릴게요.”
그녀의 손길은 전문가의 그것처럼 부드러우면서도 강했다. 예약된 한 시간이 끝나갈 무렵, 그녀는 슬며시 그의 몸 위로 올라탔다.
“손님… 혹시 서비스, 필요하세요?”
남자는 대답 대신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은숙은 그의 침묵을 긍정의 신호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지금까지 배운 온갖 종류의 기교를 다 부리며 남자를 만족시키려 애썼다. 그가 만족해야, 다음에 또 자신을 부를 것이고, 그래야 자신의 계획이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격렬한 관계가 끝나고, 두 사람은 나란히 누워 숨을 골랐다. 은숙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자진해서 매니저에게 ‘손님이 연장을 원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이어진 두 번째 관계. 두 사람은 마치 신혼여행을 온 부부처럼 격렬하게 정사를 이어갔다. 은숙은 자신이 이 남자를 완벽하게 홀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완전히 경계를 풀고, 그에게 교태를 부렸다. 승리감에 도취된 그녀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녀는 그와의 거리를 좁히고, 더 친밀한 관계처럼 보이기 위해, 웃으며 물었다.
“아저씨, 이름이 뭐예요?”
그 순간, 남자의 눈빛이 변했다.
따뜻하고 나른하게 풀려 있던 그의 동공이, 면도날처럼 날카롭고 차갑게 수축했다. 그의 입가에 걸려 있던 희미한 미소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는 완벽한 무표정이 자리 잡았다.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손상식이었다.
그리고 그의 살인에는 한 가지 원칙이 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묻는 여자는, 반드시 죽인다. 이름은 곧 정체성이었고, 자신의 정체를 아는 증인은 세상에 남겨둘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은숙은 그 미세한 변화를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그녀는 여전히 그의 팔에 머리를 기댄 채, 깔깔거리며 말했다.
“아하하! 이름이 참 재밌다. 상식… 그럼 상식이 풍부하시겠네요?”
그녀의 웃음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손상식의 팔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그의 거대한 손이 그녀의 가녀린 목을 정확히 움켜쥐었다.
“컥…!”
은숙의 눈이 공포로 하얗게 뒤집혔다. 그녀는 버둥거리며 그의 팔을 붙잡았지만, 강철 같은 그의 손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름…은… 왜… 물어봤어…?”
그가 지옥의 밑바닥에서 올라온 듯한 목소리로 나직이 물었다.
그녀는 대답할 수 없었다. 폐 속의 공기가 모두 빠져나가고, 눈앞이 까맣게 변해가고 있었다. 자신이 사냥꾼인 줄 알았지만, 실은 더 강한 포식자의 덫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어리석은 먹잇감이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죽음의 문턱에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차은숙. 그녀는 그렇게 소리 한번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자신이 그토록 경멸했던 황정아와 똑같은 방식으로, 허무하게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시신은 얼마 후 토막 난 채, 서울 근교의 야산에 버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