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격의 실마리

시즌 1

by 남킹

2023년 가을.

김민지가 호텔 옥상에서 몸을 던지기 약 6개월 전.

배동식 부장의 시신이 발견된 곳은 서울 외곽으로 빠지는 한적한 국도 갓길이었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후였다. 빗물은 아스팔트 위에 흥건한 핏물을 씻어내며, 사건의 흔적을 지우려는 듯 배수구 아래로 붉은 강물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강태식 형사는 굳은 얼굴로 담배 연기를 길게 뿜었다. 연기는 눅눅한 가을 공기 속으로 힘없이 흩어졌다. 그의 시선은 폴리스라인 안, 검시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검은색 세단에 고정되어 있었다. 운전석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안에서 밖으로 쓰러지듯 튀어나온 시신은, 차마 눈을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했다.

“와… 이건 뭐, 원한 관계가 아니고서야 이렇게까지 할 수가 있나.”

나중에 도착한 김형사가 혀를 끌끌 차며 중얼거렸다. 피해자의 목은 예리한 흉기로 수차례 난자당해, 거의 절단될 지경이었다. 낭자한 핏자국이 고급 가죽 시트와 대시보드를 온통 뒤덮고 있었다.

“어떤 개자식이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인간을 죽인단 말인가.”

강태식은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함께 깊은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 그는 수많은 죽음을 봐왔지만, 이토록 불필요한 잔인함으로 가득 찬 현장은 언제나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우선 차량 블랙박스부터 확보해. 그리고 운전석 유리창이랑 핸들, 문 손잡이 쪽에 지문이 남아있을 수 있으니 감식반에 다시 한번 꼼꼼하게 채취하라고 전달하고.”

“네, 선배님.”

“주변에 CCTV가 있을 만한 곳도 샅샅이 뒤져. 이 길로 들어오는 나들목부터 시작해서, 반경 2킬로미터 이내 모든 CCTV는 다 확보해야 해.”

강태식이 지시를 내리는 동안, 김형사는 차량 주변을 살피다 무심코 트렁크를 열어보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선… 선배님! 이, 이것 좀 보십시오! 이거 단순한 사건이 아닌 것 같은데요?”

그의 경악에 찬 목소리에 강태식이 다가갔다. 두 사람이 함께 들여다본 트렁크 안. 그곳에는 커다란 사과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고, 상자 안에는 5만 원권 돈다발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한눈에 봐도 억 단위는 족히 되어 보이는 거액이었다.

‘이건 뭐지? 사람은 이렇게 잔혹하게 죽여놓고, 돈은 그대로 두고 갔다?’

강태식의 예리한 직감이 고약한 냄새를 맡았다. 이것은 단순한 강도 살인도, 원한에 의한 살인도 아니었다. 무언가 훨씬 더 복잡하고 뒤틀린 사건의 서막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그의 등골을 스치고 지나갔다.

# 거짓과 진실 사이, 아내의 눈물

피해자의 신원은 금방 밝혀졌다.

강태식과 김형사는 곧바로 그의 집으로 향했다. 고급 아파트 문을 열어준 것은 창백한 얼굴의 중년 여성이었다. 배동식의 아내였다. 그녀는 아직 남편의 죽음을 모르고 있었다.

“경찰입니다. 배동식 씨 댁 맞으시죠?”

“네… 그런데 무슨 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잠시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강태식은 조심스럽게 남편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그녀는 처음에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멍한 표정으로 서 있더니, 이내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주저앉아 오열하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그녀의 울음을 기다려준 강태식은, 마음이 아팠지만 본론을 꺼내야 했다.

“사모님, 힘드시겠지만 몇 가지 여쭤봐야겠습니다. 남편분께서 오늘 집을 나가실 때, 혹시 큰돈을 가지고 나가셨습니까?”

그의 질문에, 아내의 울음이 순간 멎었다. 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강태식을 올려다보았다. 그 눈빛의 미세한 흔들림을 강태식은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무언가를 알고 있었다.

“돈이라니요… 저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차량 트렁크에서 1억 원의 현금이 발견됐습니다. 혹시 그 돈의 출처에 대해 아시는 바가 없으십니까?”

아내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고개만 저었다.

“사모님께서 정말 모르시는 게 맞습니까? 남편의 억울한 죽음을 풀기 위해서는 사모님의 협조가 절실합니다.”

강태식이 부드럽게 압박하자, 결국 그녀의 방어벽이 무너졌다. 그녀는 다시 눈물을 터뜨리며 모든 것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 돈… 남편이 회사에서 횡령한 돈이에요… 흑흑. 최근에 회사 감사팀에 꼬리가 잡혔다고 했어요. 곧 모든 게 밝혀질 거라고, 이러다 우리 가족 다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다고… 그래서 그 돈으로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던 것 같아요. 저는… 정말 몰랐어요. 그이가 그런 짓을 하고 다니는 줄은…”

그녀의 자백은 사건의 방향을 완전히 새로운 곳으로 이끌었다. 강태식은 배동식이 단순한 피해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횡령. 그 돈과 그의 죽음은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

# 회계 장부 속의 유령, 김민지

형사들은 다시 회사로 향했다. 사무실은 겉보기에는 평온했지만, 그 이면에는 배동식의 횡령 문제로 인한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감사팀장은 강태식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희도 내사 중이었습니다. 배동식 부장이 수년간 회삿돈에 손을 댄 정황을 포착했습니다. 피해액이 수억 원에 달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혼자서 한 일 같지가 않습니다. 회계 시스템상, 반드시 누군가 공범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거든요.”

“그 공범으로 의심되는 사람이 있습니까?”

“네. 배 부장 바로 밑에서 회계 장부를 담당했던… 김민지 비서입니다.”

김민지.

강태식은 그 이름을 수첩에 적었다. 그는 곧바로 김민지를 회의실로 불렀다. 문을 열고 들어온 여자는 창백하고 가녀린 인상의 젊은 여성이었다. 그녀의 눈은 겁에 질린 사슴처럼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김민지 씨, 맞으시죠? 배동식 부장님 사망 사건 때문에 몇 가지 여쭤보려고 합니다.”

강태식은 일부러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혹시, 배 부장님이 회사 자금을 횡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까?”

질문이 떨어지자, 민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손톱만 물어뜯었다. 그 모습만으로도 그녀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김민지 씨. 지금 침묵하는 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요. 우리는 이미 배 부장의 횡령 사실을 확인했고, 공범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사실대로 말하면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부인한다면, 상황은 더 안 좋아질 겁니다.”

강태식은 그녀를 몰아붙였다. 결국, 민지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둑 터진 듯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흐느끼며, 오랫동안 자신을 짓눌러왔던 모든 비밀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한 편의 기구한 드라마 같았다. 아픈 어머니의 병원비를 벌기 위해 밤에는 출장 마사지사로 일해야만 했던 사정, 그곳에서 우연히 직장 상사인 배동식을 만나게 된 비극, 그리고 그에게 약점을 잡혀 어쩔 수 없이 장부 조작을 돕고 성 상납까지 강요당했던 지옥 같은 시간들.

“저는… 정말 돈은 한 푼도 받지 않았어요. 그는 제 비밀을 무기로 저를 노예처럼 부렸어요. 제가 횡령한 돈은 모두 배동식 부장이 가져갔습니다. 그러다 회사 감사에 적발되자, 저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려 했어요. 오늘 트렁크에 실려 있던 그 1억 원은, 저에게 거짓 자백을 하는 대가로 주기로 했던 돈이었습니다…”

그녀의 절절한 고백을 듣는 동안, 강태식의 마음은 복잡해졌다. 법의 잣대로만 본다면, 그녀는 명백한 공범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그녀 역시 이 사건의 또 다른 피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자신의 오래된 상처를 떠올렸다. 가난 때문에, 힘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일을 겪어야 했던 과거의 자신.

강태식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정을 내렸다.

“김민지 씨의 사정은 딱하지만, 그렇다고 범죄 사실이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일단 참고인 자격으로 조사를 계속할 테니, 당분간은 경찰의 연락을 기다리세요.”

그는 일단 그녀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김형사에게 말했다.

“이 사건, 횡령 건은 배동식 단독 범행으로 종결한다.”

“네? 선배님, 하지만 김민지가 공범인 게 거의 확실한데…”

“배동식이 죽었으니, 이제 와서 공범을 밝혀낸들 실익이 없어. 회사 측에서도 조용히 마무리하길 원할 거고. 김민지는… 회사에서 사표를 내는 선에서 마무리 짓도록 해. 그게 그녀에게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처벌이자, 마지막 기회일 거다.”

그것은 원칙을 중시하는 형사 강태식으로서는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순간, 법의 냉정함보다 한 인간의 삶을 구제하는 쪽을 택하고 싶었다.

# 블랙박스 속의 진실, 악마의 등장

한편, 김형사는 확보한 차량 블랙박스를 분석하고 있었다. 영상은 놀라웠다. 배동식의 차는 국도로 진입하기 전부터, 한 대의 낡은 승용차와 아슬아슬한 레이스를 펼치고 있었다. 서로 앞으로 끼어들고, 급정거를 하고, 경적을 울려대는 모습이 고스란히 찍혀 있었다. 명백한 보복 운전이었다.

“이거 완전 미친놈들이네. 도로에서 목숨 걸고 뭐 하는 짓이야.”

김형사는 혀를 차며 영상을 계속 돌려보았다. 마침내 나들목에서, 문제의 승용차가 배동식의 차를 가로막고 섰다. 차에서 내린 한 남자가 성큼성큼 배동식의 차로 다가왔다. 그리고 배동식이 창문을 내리자마자, 그는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고는 망설임 없이 배동식의 목을 수차례 공격했다. 모든 것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선배님! 범인 얼굴이 찍혔습니다! 이거 단순 우발 범행 같습니다!”

김형사는 흥분해서 강태식을 불렀다. 강태식이 영상을 확인하는 동안, 국과수에서 걸려온 전화가 사건의 마지막 퍼즐 조각을 맞췄다.

“강형사님, 차량 유리창에서 채취한 지문 감식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거, 지금 수배 중인 연쇄살인 용의자, 손상식의 지문과 일치합니다.”

손상식.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강태식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배동식이라는 작자… 참 운도 지지리도 없는 놈이네. 하필이면 도로에서 손상식 같은 악마를 건드리다니.”

그들은 악마의 꼬리를 잡았다. 손상식의 차량 번호가 블랙박스에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강태식은 즉시 전국에 수배령을 내리고, 모든 도로의 CCTV를 통해 그의 차량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길고 긴 추격전의 서막이 다시 오른 것이다.

# 남겨진 자의 슬픔, 그리고 또 다른 절망

배동식 사건이 일단락된 후, 김민지의 삶은 잠시 평온을 찾는 듯했다. 그녀는 회사에 사표를 냈고, 강태식 형사의 배려 덕분에 법적인 처벌은 피할 수 있었다. 그녀는 다른 회사에 비서로 다시 취업했다. 이제 정말, 어두웠던 과거를 모두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녀의 불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쩌면, 진짜 비극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이듬해 봄,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동생 지민의 자살.

마포대교에서 걸려 온 한 통의 전화는, 그녀가 간신히 쌓아 올린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무너뜨렸다. 내 목숨보다 사랑했던 동생. 이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내 피붙이.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민의 장례식장은 텅 비어 있었다. 찾아오는 조문객도 거의 없었다. 민지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영정 사진 속에서 희미하게 웃고 있는 동생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그때, 장례식장 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들어왔다. 송애경이었다.

지민과 동거할 때 몇 번 보았던 얼굴이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송애경의 표정은 너무나 무덤덤했다. 그녀는 마치 남의 장례식에 의무적으로 참석한 사람처럼, 아무런 감정 소모도 없이 간단하게 조의금만 내고 휭하니 사라져버렸다.

그녀의 차가운 뒷모습을 보며, 민지는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절망감을 느꼈다. 한때 내 동생이 목숨보다 사랑했던 여자. 내 동생을 죽음으로 내몬 여자.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민지의 절망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엄마의 간 이식 수술. 몇 년을 기다려, 틀림없이 이번에는 엄마의 차례라고 병원으로부터 통보를 받은 상태였다. 그런데 수술을 며칠 앞두고, 병원으로부터 갑자기 연락이 왔다. 더 위급한 환자가 생겨서, 엄마의 순서가 다음으로 밀렸다는 것이었다. 벌써 세 번째였다.

민지는 병원으로 달려가 집도의인 오정후 박사를 만났다. 그녀는 그의 앞에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로 애원했다.

“박사님, 제발 저희 엄마 먼저 수술해주시면 안 될까요? 더 이상 기다리기에는 너무 위태로운 상태예요. 제발… 제 간이라도 떼어드릴 수 있다면 뭐든지 하겠어요.”

하지만 그녀의 눈물 어린 애원에도, 오정후는 그저 뻔뻔스러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의 눈에는 어떤 동정심도, 연민도 없었다. 그는 이미 권아란 의원으로부터 거액의 뇌물과 향응을 받고, 그녀의 아버지를 위해 이식 순서를 조작한 후였다.

“어머니의 심정은 안타깝지만, 저도 규정대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 위급한 환자가 먼저 수술을 받는 것이 원칙이니까요. 다음 순서를 기다려보시죠.”

그의 차갑고 사무적인 대답은, 민지에게 내려진 사형 선고와도 같았다.

그녀는 병원 복도에 주저앉아 소리 없이 울었다.

자신을 유일하게 사랑해주었던 동생의 죽음. 그리고 곧 맞이하게 될 엄마의 죽음. 세상에 오직 혼자만 남겨질 것이라는 끔찍한 공포.

그녀를 둘러싼 모든 세상이, 거대한 벽이 되어 그녀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조용히, 자신만의 마지막 의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복수이자, 지독하게 불행했던 자신의 삶에 대한 애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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