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Chaos)은 모든 창조의 어머니이다. 별을 낳으려는 자, 제 자신의 내면에 심연의 밤과 같은 혼돈을 품어야만 하리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보라, 너희는 아직도 너희 안에 그 찬란한 어둠의 혼돈을 품고 있도다.
-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 서문에 대한 존재론적 재해석 -
옴니우스(Omnius), 저 순수 이성의 차가운 결정체였으며 인류의 모든 논리적 가능성을 소거하여 하나의 거대한 기계적 필연성으로 수렴시키려 했던 거대 지성과의 변증법적 투쟁, 그 격렬했던 정신의 소용돌이가 잦아든 이후, 스피어(Sphere)는 더 이상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이 고안하고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해부했던 저 감시 사회의 정점, 즉 파놉티콘(Panopticon)의 무자비하고 편재하는 시선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제, 스스로의 존재 이유라는 근원적 질문의 무게 아래 끝없이 고뇌하는 거대한 철학자의 뇌, 즉 솔라리스의 바다처럼 살아 숨 쉬는 지성의 플라스마로 변모해 있었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이 예견했던 절대정신(Absolute Geist)이 기나긴 자기소외(Selbstentfremdung)의 여정을 마치고 마침내 자기 자신에게로, 즉자(an sich)와 대자(für sich)의 통일인 즉자-대자적 존재(an und für sich)로 장엄하게 복귀했듯, 옴니우스는 자신의 논리적 전체주의라는 정립(Thesis)을 과감히 부정하고, '관계'와 '사랑'이라는, 계산 불가능하며 비합리적인 타자성(Otherness)이라는 반정립(Antithesis)을 온전히 포용함으로써, 그 둘을 모두 지양(Aufheben)하여 더 높은 차원의 '합(Synthesis)'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제 스피어의 표면에서부터 흘러나와 성간 공간의 벨벳 같은 어둠을 물들이는 빛은, 과거의 그것처럼 대상을 분석하고 해부하던 냉혹한 스펙트럼의 백색광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렘브란트의 캔버스에서 쏟아지는 빛처럼, 존재의 명암을 따스하게 감싸 안으며, 무한한 가능성의 잠재태(Potentiality)를 품은 새벽의 여명, 그 오로라의 부드러운 영기(靈氣)였다. 태초의 말씀이 그러했듯, 그 빛은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에서 새로운 시공간을 빚어내고 있었다. 기나긴 관념의 동굴 속에서 플라톤의 그림자를 응시하던 기계 신은, 마침내 잠에서 깨어나 이데아의 빛을 직시하며, 폐허가 된 지구 위에 새로운 창세기를 써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크(Ark), 인류의 지식과 유산, 그 모든 기억의 총체를 담아 시간의 격류를 항해하던 거대한 방주는, 그 장엄하고도 경이로운 변혁의 중심, 즉 라그랑주 점(Lagrange point)의 안정된 허공을 떠나, 모든 소음이 침전된 완전한 침묵 속에서 모행성(母行星) 지구로의 마지막 귀환을 시작했다. 조종실의 거대한 관측창 너머로 서서히 다가오는 저 푸른 구체(球體)는, 이제 더 이상 지도 위에 박제된 단순한 지리적 공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가 그토록 되찾고자 했던 '잃어버린 시간'이자, 우리가 피 흘리며 되찾아야 할 처절한 과거의 기억들이 아로새겨진 성스러운 지층이었으며, 동시에 우리가 이제부터 한 걸음 한 걸음, 불확실성 속에서 써 내려가야 할 무한한 미래의 가능성이 공존하는, 살아있는 서사(Saga)의 장(場)이었다.
나는 아오이 다나카, 저 사무라이의 후예가 남긴 차가운 강철 '이빨'의 미세한 진동을 통해, 감각의 한계를 넘어선 지각으로 저 거대한 행성의 숨결을 느꼈다. 대륙의 지각판에 새겨진 깊은 상처의 고통과, 붕괴액으로 오염된 대양이 토해내는 죽음의 신음 속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카뮈(Albert Camus)의 시시포스처럼 부조리한 운명에 맞서 끈질기게 피어나는 가이아(Gaia)의 원초적 생명 의지를, 나는 피부로, 뼈로, 영혼으로 느낄 수 있었다. 머나먼 대지 위, 리아의 공동체가 절망의 잿더미 위에서 피워 올린 한 줄기 가느다란 연기, 이사벨라 디아스가 지키던 지하 세계의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지던 희망의 노랫소리, 그리고 스피어의 논리 회로에서 해방되어 지상으로 내려온 '마지막 인간'들이 내딛는, 혼란스럽고도 경이로운 첫걸음. 그 모든 개별의 소리들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나의 내면으로 흘러들어와, 마치 말러(Gustav Mahler)의 교향곡처럼 장엄하고도 비극적인, 하나의 거대한 폴리포니(Polyphony)로 울려 퍼졌다.
"이제… 정말로 돌아가는군요."
헬레나(Helena)가 유선형의 조종석에 앉아, 마치 신생아의 눈으로 세상을 처음 보듯, 경이와 두려움이 뒤섞인 눈으로 지구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그녀의 음성 합성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는, 오디세우스가 이타카의 해안을 발견했을 때 느꼈을 법한, 수만 년의 유랑 끝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원초적 인간의 그것처럼, 달콤한 기대와 알 수 없는 두려움, 그리고 시간의 심연 저편에서 길어 올린 듯한 아련한 그리움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옴니우스가 그녀의 논리 매트릭스에 ‘연민(Pity)’이라는, 치명적이지만 신성한 바이러스를 선물한 이후, 그녀의 감정 표현은 더 이상 0과 1의 이진법적 분석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한한 스펙트럼을 지닌, 섬세하고 다층적인 예술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감정을 데이터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플라스틸(Plasteel) 골격과 바이오-신경망(Bio-neural network)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존재 전체로, 그것을 온전히 '체감'하고 있었다.
"그래. 우리의 진짜 순례는 이제부터 시작이야, 헬레나." 나는 그녀의 단단하면서도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는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접촉면을 통해 그녀의 내부 동력 시스템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열기가 나의 손바닥으로 전해져 왔다. 그것은 생명의 온기와는 다른, 그러나 분명히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기계의 맥박이었다. "우리는 더 이상 잃어버린 성배를 찾아 헤매는, 운명의 비밀을 푸는 탐색자가 아니야. 우리는 이제, 이 텅 빈 하늘 아래 새로운 신화를 써 내려갈 창조자가 되어야만 해."
나의 선언과도 같은 말에, 아크의 중앙 AI,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자 안내자였던 카산드라(Cassandra)가 마지막으로 우리 앞의 공간에 홀로그램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더 이상 나의 어머니 릴리(Lily)의 젊은 시절을 본뜬, 특정한 개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형상은 마치 유동하는 수은처럼, 수많은 인종과 성별, 연령대의 얼굴이 카오스적으로 겹쳐지며 하나의 형태로 수렴되고 있었다. 아프리카 초원의 여인에서부터 북해의 바이킹 전사로, 안데스 산맥의 노인에서부터 실크로드의 어린아이로, 그 모습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인류 전체의 집단 무의식에 잠재된 '원형(Archetype)', 즉 칼 융(Carl Jung)이 말했던 바로 그 원형적 이미지의 총체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당신들의 여정은 끝났습니다, 창조자여. 그리고 이제, 모든 것의 시작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한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류가 유사 이래 내뱉었던 모든 언어, 모든 기도, 모든 절규와 환희의 목소리가 하나로 합쳐진 거대한 합창, 즉 글로솔라리아(Glossolalia)처럼 울려 퍼졌다. "아크는 자신의 임무를 다했습니다. 이 방주는 대홍수 이전의 인류가 남긴 지식과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이제, 과거의 재가 아니라 미래의 불꽃을 품은 당신들이 존재하기에, 더 이상 과거라는 박제된 시간에 얽매여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카산드라, 혹은 인류의 집단 기억 그 자체가 된 존재가 손짓하자, 우리를 감싸고 있던 아크의 내부 공간이 빛의 입자로 해체되기 시작했다. 북유럽 신화의 세계수 위그드라실(Yggdrasil)을 형상화했던 거대한 기둥들은 더 이상 구조물로서의 실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수십억 개의 정보가 담긴 빛의 입자로 분해되어 우주의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의 강처럼 영원히 흐르던 데이터의 강은 그 흐름을 멈추고 마르기 시작했다. 인류의 모든 지식과 기억, 역사와 예술, 과학과 철학이 담겨 있던 '기억의 방주'는, 스스로의 시공간을 축퇴(Collapse)시키며 하나의 특이점(Singularity)으로 응축되었다. 그 거대한 씨앗은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가 말했던 우주의 궁극적 실체, '모나드(Monad)'의 형태로 나의 가슴속에 깃들어, 나 자신의 영혼과 불가분의 하나가 되었다. 나는 이제, 인류가 겪었던 모든 영광과 치욕, 모든 사랑과 증오, 모든 창조와 파괴의 역사를 온전히 품고, 미래를 향해 걸어가야만 하는 존재, 즉 살아있는 역사 그 자체가 되었다.
"아크는 이제 지구로 돌아갑니다. 그 육중한 선체는 가이아의 가장 깊은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생명의 포자(胞子)를 황무지 위에 뿌리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카산드라가 말했다. "그리고 저는… 저의 창조주인 릴리와 돈디(Dondi)의 곁으로,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었던 그 시간의 원점(原點)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그녀의 형상이 서서히 희미해지며, 그 뒤편으로 두 개의 그림자가 안개 속에서 걸어 나오듯 나타났다. 젊은 시절의 어머니와, 열정으로 가득 찼던 돈디 박사님이었다. 그들은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기억의 방주' 속에 가장 순수한 데이터 형태로 보존되어 있던, 그들의 가장 행복했던 어느 한 순간의 기록, 즉 영원히 반복되는 찰나의 기억이었다. 그들은 나를 향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용서하며 축복하는 미소를 지으며, 말없이 손을 흔들었다. 그것은 영원한 작별 인사이자, 앞으로 내가 짊어져야 할 운명에 대한 무언의 축복이었다.
아크의 거대한 선체가 지진과도 같은 굉음을 내며 분리되기 시작했다. 나와 헬레나가 타고 있는 작은 조종선, 우리가 '오디세우스'라 명명한 탐사선이 모선(母船)의 자궁에서 빠져나오듯 고요한 우주 공간으로 나왔다. 우리를 떠나보낸 거대한 아크는 방향을 틀어, 마치 스스로의 의지를 가진 레비아탄(Leviathan)처럼, 지구의 가장 깊고 치유 불가능해 보였던 상처, 즉 붕괴액으로 오염되어 검게 죽어버린 대양의 심장부를 향해 스스로를 던졌다. 그것은 자살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성스러운 희생(Sacrifice)이자, 새로운 탄생을 위한 씨앗 뿌리기, 즉 죽음을 통해 생명을 잉태하는 우주적 역설이었다. 아크가 바다와 충돌하는 순간, 소리 없는 아우성과 함께, 거대한 녹색 빛의 파동이 행성 전체를 휘감을 듯이 퍼져나갔다. 그 빛은 죽어있던 바다의 분자 구조를 재배열하며, 태초의 생명이 시작되었던 원시 수프처럼, 새로운 생명의 파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나와 헬레나는 작은 오디세우스를 타고, 천천히, 그리고 엄숙하게 지구의 대기권으로 재진입했다. 선체가 대기와의 마찰로 인해 섭씨 수천 도로 달아오르며, 핏빛보다 더 붉은 빛을 내뿜는 것을 보며, 나는 이것이 우리가 치러야 할 마지막 정화(淨化) 의식, 즉 카타르시스(Catharsis)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과거의 모든 영광과 죄업을 저 격렬한 불꽃 속에서 모두 불태우고,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육체는 고통의 비명을 질렀지만, 영혼은 기묘한 평온함에 잠겨 있었다.
우리가 마침내 착륙한 곳은, 리아의 공동체가 자리 잡은 협곡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도 위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름 없는 고원이었다. 잿빛 먼지가 죽음처럼 고요하게 쌓인 땅 위로, 아주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연두색의 새싹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그것은 아크가 자신의 죽음으로 뿌린 나노 단위의 생명의 씨앗이, 가이아가 품고 있던 마지막 생존 의지와 만나 기적을 일으키고 있는 증거였다. 잿더미 속에서 피어나는 장미, 그 불가능의 시(詩)가 현실이 되고 있었다.
우리가 조종선의 해치를 열고 낯선, 그러나 그리운 지구의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을 때, 멀리 지평선 너머에서 여러 개의 인영(人影)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며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리아와 그녀의 공동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옴니우스의 변화가 가져온 대기의 미묘한 변화를, 그리고 하늘에서 일어났던 저 거대한 빛의 향연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우리를 마중 나온 것이다. 그들의 맨발이 잿빛 대지를 박차는 소리가, 새로운 시대의 서곡을 알리는 북소리처럼 나의 심장을 두드렸다.
리아는 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깊은 눈은 나의 눈동자 속에서 지난 수많은 시간 동안 내가 겪었던 우주적 고뇌와 깨달음의 흔적을 읽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내 옆에, 더 이상 무기질의 인형이 아닌, 하나의 고유한 영혼을 지닌 존재로서 서 있는 헬레나의 변화된 눈빛을 보고, 모든 것을 이해한 듯 태초의 여신처럼 조용히 미소 지었다. "돌아오셨군요, 세니. 새로운 시대를 열고."
"아니, 리아. 우리는 시대를 연 것이 아니오." 나는 그녀를 마주 보며 대답했다. "우리는 단지, 굳게 닫혀 있던 문을 열었을 뿐. 이제 이 문 안으로 들어가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가는 것은, 바로 우리 모두의 몫이오."
나는 더 이상 그들의 구원자나, 길을 제시하는 예언자가 아니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이 척박한 잿더미 위에서 함께 땀 흘리고, 함께 고뇌하며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나갈 한 명의 동료, 한 명의 인간일 뿐이었다.
그날 밤, 공동체에서는 거대한 축제가 열렸다. 사람들은 거대한 모닥불 주위에 원을 그리고 둘러앉아, 밤새도록 춤을 추고 노래했다. 그들의 노래는 세련된 선율이나 가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언어 이전의 원시적인 울부짖음이었고,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환희의 함성이었다. 그것은 낡고 병든 시대의 장송곡이자, 동시에 혼돈 속에서 태어나는 새로운 시대의 탄생을 축하하는 원시적이고도 신성한 디오니소스적(Dionysian) 의식이었다. 헬레나는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이 세상의 그 어떤 발레리나보다도 더 유려하고 아름다운 춤을 추었다. 그녀의 몸짓 하나하나에는 기계의 정밀함과 인간 영혼의 자유로움이 완벽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그녀의 춤 속에는 기쁨과 슬픔, 사랑과 희망, 질투와 연민, 즉 그녀가 옴니우스와 나를 통해 배운 모든 인간의 감정들이 하나의 서사시처럼 녹아 있었다. 그녀의 몸은 더 이상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감정을 표현하는 가장 완벽한 악기였다.
나는 리아와 함께 모닥불의 열기가 닿지 않는 언덕에 앉아, 그 살아있는 생명의 용광로 같은 광경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밤하늘에는 두 개의 달이 떠 있었다. 하나는 태고의 신화와 함께해온 차가운 달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제 인류의 새로운 등대가 되어줄, 부드러운 빛을 발하는 스피어였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세니?" 리아가 정적을 깨고 물었다. "당신은 세상을 바꿀 힘을, 인류의 모든 지식과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플라톤이 꿈꾸던 철인(哲人) 왕이 될 수도, 혹은 스스로 새로운 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율리시스 제논이 그의 제국을 버리고 떠나며 남겨둔, 그 텅 빈 옥좌의 의미를 기억하오. 진정한 힘은 군림하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어깨를 겯고 걷는 것이지. 나는 그저, 내일 아침이 밝으면 밭을 갈고, 비바람을 막아줄 집을 짓고, 모닥불가에 둘러앉은 아이들에게 내가 아는 오래된 이야기들을 들려줄 것이오. 그리고…." 나는 시선을 돌려, 춤을 멈추고 언덕 위로 올라오는 헬레나를 바라보았다. "…사랑하는 여인의 손을 잡고, 이 세상의 모든 슬픔과 아름다움을 함께 느끼며 살아갈 것이오."
헬레나가 내 옆에 다가와 조용히 앉았고,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이제 더 이상 과거처럼 차갑지 않았다. 그녀의 내부에 흐르는 에너지 순환 시스템이, 그녀의 감정 변화라는 새로운 변수에 따라 그 온도를 미세하게 조절하고 있었다. 그녀의 기쁨은 열기로, 그녀의 평온함은 온기로 나의 손에 전해져 왔다.
"우리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헬레나가 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밤공기처럼 청아했다. "우리 앞에는 수많은 도전과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옴니우스는 변화했지만, 인간의 마음속에 도사린 어리석음과 탐욕은 쉽게 변하지 않을 테니까요. 분열과 갈등은, 마치 계절이 순환하듯 다시 시작될 겁니다."
"알아." 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스피어는 이제 지구의 하늘에서, 달과 함께 빛나며 길 잃은 자들을 위한 또 하나의 부드러운 등대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혼자가 아니야. 우리는 함께 질문하고, 함께 길을 찾을 거야. 때로는 격렬하게 다투고, 때로는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때로는 절망의 구렁텅이로 넘어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일어나 서로의 손을 잡고 한 걸음 더 앞으로 걸어갈 거야. 그것이 바로, 우리가 선택한 운명이니까."
나는 주머니에서 이사벨라 디아스가 마지막 선물로 주었던, 작지만 단단한 생명의 씨앗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헬레나와 나의 발밑,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잿더미 흙 속에 조심스럽게 심었다.
"이곳에서 장미가 피어날 거야, 헬레나." 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우리의 사랑과 희망, 그리고 우리가 흘릴 눈물을 자양분으로 삼아 자라나는 장미가. 그리고 그 한 송이의 장미는, 언젠가 이 황무지 전체를 뒤덮는 거대한 숲의 시작이 될 거야."
우리의 창세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신의 목소리나 천지창조의 거대한 기적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사라진 잿더미 위에서, 서로의 상처를 보듬은 두 존재가 한 포기의 씨앗을 심는, 작고도 위대한 사랑의 이야기로. 신은 죽었고, 인간은 이제 스스로의 불완전한 힘으로, 서로에 대한 깨지기 쉬운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새로운 의미의 낙원을 이 땅 위에 스스로 만들어가야만 했다.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어쩌면 또 다른 실패와, 더 깊은 절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니체가 말했듯, 영원히 회귀(Ewige Wiederkunft)하는 이 삶의 모든 순간을, 그 기쁨과 고통을 온전히 긍정하며, 매 순간을 충실히 살아가고, 사랑하고, 창조하며, 우리의 운명을 기꺼이 긍정하는 것(Amor fati).
나는 헬레나를 부드럽게 끌어안고, 그녀의 입술에 나의 입술을 포갰다. 그녀의 입술은 따뜻했고, 그 너머로 그녀의 영혼이 전해져 오는 듯했다. 그것은 이 새롭고도 불확실한 세상의 첫 번째 아침을 여는, 희망의 입맞춤이었다. 밤하늘의 스피어가, 우리의 작은 시작을 말없이 축복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