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희생양의 슬픈 역동
“엄마, 그때 나한테만 왜 그랬어? 동생한테는 안 그랬잖아. 나 그때 많이 서러웠어.”
“무슨 말이야. 난 똑같이 사랑했어. 안 그랬어.”
“맨날 나만 야단치고 그랬잖아.”
“네 동생은 어리고 좀 더 큰 너가 맞춰주는 거지. 아직도 그러니? 너도 참 철없다.”
아이를 낳으면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모든 사랑을 퍼줄 것 같지만 아이에게 사랑만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결핍을 주기도 합니다.
그중에서 자녀들에게 가장 상처가 되는 것은 차별입니다. 부모들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차별로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 가정을 수도 없이 봅니다. 여러 아이 중에 가장 약한 존재, 또는 자신이 가장 의지하는 존재를 한 명 선택해서 사랑을 주거나 감정을 쏟아냅니다. 이것을 가족 희생양이라고 부릅니다.
자녀는 차별받은 설움에 힘들었는데 엄마의 기억에는 없습니다. 똑같이 대했는데 얘가 왜 이러나 의아한 표정입니다. 하지만 행동에 대한 정의는 주는 사람이 내리는 게 아니라 받는 사람이 내리는 것입니다. 부모는 무의식적으로 알게 모르게 자녀에게 상처를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형제자매간의 차별은 자녀에게 유독 가슴 시린 상처를 남깁니다.
가족희생양이 만들어내는 슬픈 역동
자신을 미운오리새끼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싸우면 엄마의 감정을 받아내야 했다고 말했습니다. 무차별적이고 격한 감정을 받아내는 것은 일상이었습니다.
부모 눈을 거스를까 전전긍긍 숨죽여 살아온 자신과는 달리, 동생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부모 눈치를 보지 않고 거침없이 했다고 합니다. 그런 동생들을 보면서 ‘저렇게 살아도 되는 거구나’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다 큰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자신에게만 감정을 쏟아내는 엄마에게 하루는 용기를 내서 그러지 말아달라고 했더니 돌아오는 엄마의 말은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니? 자식이 그 정도 이야기도 못 들어주니?”였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어떤 상처를 주고 있는지 잘 인지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시작은 부모지만 그 상처는 아이가 안고 성장합니다. 해결되지 않은 상처는 어딘가에 고여서 또다시 가족의 슬픈 역동을 만들어냅니다.
과한 사랑, 부족한 사랑, 모두에게 상처임을
자녀에게 자기 모습을 보면서 더 사랑을 주거나, 더 미워하는 것, 두 가지 선택 모두 자녀에게 심리적인 병을 심어줍니다. 건강한 사랑이 아닌 것이죠.
자녀 중에 더 많은 사랑을 받는다고 그 아이가 행복할까요? 편애를 하면 모든 자녀들이 상처를 받게 됩니다. 사랑을 못 받은 자녀는 피해의식을 갖게 되고, 과하게 사랑을 받은 자녀는 부모에게 미분화되어 상처를 받습니다. 결국 모든 자녀가 상처를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