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의 기택 말이 옳았다. "가장 완벽한 계획이 뭔지 알아? 무계획이야"
올해 초 글쓰기에 관한 나름 창대한 계획을 세워놓았었다. 작년 초 폭발적으로 쏟아지던 영감들로 마음이 바빠졌던 나는, 1년 전 이미 쓰고 싶은 책 3권에 관한 내용 구상과 목차 정리가 끝나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산속에 들어가 글만 쓰고 싶었다. 그 정도로 내 머릿속은 오직 글로만 가득 차 있었다. 일상에 지장이 있을 만큼 날마다 전기가 파바박 튀었던 날들. 밥을 하다가도 설거지를 하다가도 빨래를 하다가도 내 마음은 키보드 위에서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건만.
두문불출 오피스텔에 짱 박혀 '창작의 고통' 속에만 놓여있는 작가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나의 현실에 그런 사치는 있을 수 없으니. 올 상반기에 '계획대로' 글을 써나갈 수 있으리라던 생각은 말 그대로 계획일 뿐이었다. 산에 들어가기는커녕 '온가족 코로나 집콕'이라는 어마 무시한 변수가 찾아올 줄이야. 지난 두 달반 남편과 아이와 정말 꼼짝마 자세로 24시간 집에 붙어있었다. 낮 시간을 가열찬 글쓰기로 메꿀 수 있으리라던 나의 소박한 꿈은 처참하게 헝클어졌다.
하루 종일 밥을 해대느라 자취를 감춰버린 나의 낮 시간. 아이 학교 공부도 봐줘야 했고 심심해하는 아이 말벗도 돼주어야 했다. 산만한 낮시간에 밀려 글쓰기는 밤이 되어야 가능해졌고 새벽에 잠들게 되고. 리듬이 무너지니 몸을 돌볼 짬도 자꾸 놓치고. 무엇보다 '착착 하리라던' 상반기 계획들이 속절없이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봉쇄가 풀리니 여름이 코 앞이다. 아 계획이여! 무심한 너 계획이여!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던 밤. 잔나비의 노래가 불현듯 듣고 싶었다. 그들만의 독보적인 결. 보컬 최정훈이 내뿜는 압도적 기운과 천재적 감성. 그들 노랫말처럼 '거리를 나뒹구는 쉬운 마음' 같은 그들의 순수한 열정을 수혈받고 싶었다. 존재만으로 위로가 되는 깊고 아름다운 잔상.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She>와 <나의 기쁨 나의 노래>지만 엊그제 내 마음을 어루만져 준 노래는 따로 있었다. 영화 '라붐' 주제곡 <Reality>였다.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 팬들의 신청곡을 받아 오직 팬들을 위해 불러준 커버곡이었다.
잔나비 버전의 Reality 라니! 어쩜 선곡까지 나의 취향 그대로 해줄 수 있는 건지. 중학교 교내 합창대회 학급 반주자였을 때 친구들 퇴장 곡으로 이 곡을 연주했었다. 넓은 강당 높은 무대의 그랜드 피아노에 앉아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연주하던 <Reality>. 내가 선곡한 곡이었기에 더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추억. 잔나비의 결 고운 노래는 곱게 넣어둔 기억을 어루만져주었다. 연노란 표지의 오래된 악보를 펼쳐 문득 이 곡을 연주하고 싶었던 그 밤. 작은 노래 하나만으로 가득 차올랐던 밤.
Dreams are my reality 꿈은 나의 현실이고 the only kind of real fantasy 단 하나의 진실한 환상이야 illusions are common thing 환상은 평범한 것이야 Dreams are my reality 꿈은 나의 현실이고 a different kind of reality 다른 종류의 현실이야 the only kind of reality 단 하나의 진정한 현실이야 I try to live in dreams 나는 꿈을 꾸듯 살아가려 해
글이 좀 늦게 써지면 어떤가. 시간, 너는 다 계획이 있을 터이니. 봄이 가고 있다.
이제 다른 리얼리티는 못 들을 것 같다.
잔나비가 부릅니다. < Reality >
음원출처: Band Jannabi http://bitly.kr/wYmk2yda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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