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을 마친 학생들에게게
오래전, 정말로 이제는, 세상에서 그만 나를 놓아주어야겠다고 생각했던 날들. 깊고 깊은 분노와 슬픔 속을 걸으며 나는 결론을 내렸었다. 우리 현실 속의 고통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인간적인 인식'으로도 해결될 수 없다고.
그때 우연히 명상이란 것을 접하게 되었다. 물론, 따끈한 방석 위에 가부좌 틀고 앉아 차크라를 떠올리는 것 같은 '고상한' 방식 또는 '틀에 박힌' 방식 같은 것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나는, 그 어떤 틀도 없는 길, 아무런 방식도 없는 그런 것을 원했다. 그것은 나를 고통으로부터 즉각적으로 꺼내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했고, 가장 자유분방한 날 것의 접근법이어야 했다.
살기 위해서. 그때도 역시 살기 위해서 나는 또 다른 길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명상이라는 형태만이, 인간의 얕은 인식을 넘어선 '최초의 정신'과 직접 접속 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알게 되었던 인연 중에 한 분이 내게 했던 이 마지막 말이 늘 마음 깊이 남아있었다.
"넌 잡초지. 일어나고 또 일어나는..."
사실 나만 보면 늘 타박하시고, 한마디를 해도 꼭 불편한 말을 툭툭 던지셨던 분이었기에, 그분의 저 말을 들었을 때 마음이 묵직하게 울려왔던 것을 기억한다. 누구도 알아준 적 없던 그 마음을, 누군가 알아주었다는 고마움. 더구나 나의 이야기들을 알고 계셨던 분이었기에 그 고마움은 더 컸다. 그리고 정말 저 말처럼, 잡초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자, 김치통 세일 들어갑니다. 세 통에 만원~ 지금이에요 어머니!"
온 거리가 꽁꽁 얼어붙어있던 한 겨울, 백화점 야외 매장에서 한 여학생이 김치통을 팔고 있다. 설날을 며칠 남겨놓지 않은 날이었다. 마침 국내에는 미국의 유명 플라스틱 주방용픔 브랜드가 막 들어왔고, 여학생은 연신 손을 호호 불어대며 큰 소리로 외친다. 마치 매일 그 김치통을 팔아왔던 것처럼.
대학생 때 백화점에서 종종 아르바이트를 하곤 했었다. 남들처럼 과외는 못하고, 그렇다고 찔끔찔끔 받는 최저임금 알바는 영 적성에 안 맞고. 그런 면에서 백화점 알바는 내게 딱이었다. 다리가 아파도 잠깐 며칠을 뛰면 짧은 시일에 적지 않은 돈을 벌 수 있었다. 처음에는 플라스틱 김치통을 파는 것으로 시작했다. 나는 정말 온 힘을 다해 세일을 외쳐대었고, 그때마다 밍크코트를 입은 어머님들은 내게 다가와 말씀하셨다.
"아니, 얌전하게 생긴 아가씨가 왜 이렇게 김치통을 잘 팔아? 나도 좀 사줄게. 이거 다 줘봐요."
매일 저녁 마감을 할 때마다, 주인아저씨는 입이 방긋해져서 나를 칭찬해주곤 했다. "못할 줄 알았는데, 잘하네? 다음에도 나올 수 있지?" 그렇게 나는 몇 번을 더 그분의 김치통을 혼신을 다해 팔아주었다.
그 외의 날들엔 친동생과 함께 '새벽 인력시장'에 나가곤 했었다. 줄을 선 차례대로 일감이 주어지는데, 주로 우리 같은 대학생들은 피로연이나 단체손님이 예약되어있는 대형 식당에 투입이 된다. 식당 청소를 하고 테이블 위에 종이를 깔고 세팅을 하고, 끝없이 몰려드는 손님들이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하지만 이 일은 손이 빨라야 했다. 그러나 나는 손이 빠른 사람이 아니었다. 돈을 받으면서도 미안했다. 다른 일을 찾아야 했다.
주말에는 '웨딩 알바'를 뛰었다. 결혼식장에서 신부 드레스 펴주고 신부를 케어해주는 일. 이것은 그야말로 꿈의 알바였다. 일당이 백화점의 두 배이면서 시간은 반나절뿐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끝나면 신부가 팁까지 따로 챙겨준다.
프랑스에 와서, 아이가 조금 크고 난 다음 처음으로 일을 한 곳이 한국식당이었다. 몇 번 밥을 먹으러 갈 때마다 나를 좋게 본 사모님이, 내가 일을 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을 때 바로 나를 나오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그 식당은 지배인을 찾고 있었고, 나는 점심시간에만 하는 조건으로 갔다.
문제는 사장님이었다. 사장님은 첫날부터 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편하게 부려먹을 어린애가 왔어야 했건만 사모님으로 모셔줘야 할 사람이 왔기 때문이었다. 직접 하지는 못하고 내 또래의 거친 남자애를 시켜 나를 면박주게 하고 호통치게 하고, 그래도 성이 안차면 어린 학생들 앞에서 나를 대놓고 구박하였다. 물론 실실거리며 농담인 듯.
나는 다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늘 웃었다. 그리고 그 서슬 퍼런 농담들에 짓궂은 말들로 맞장구를 쳐줬다. 그리고 사장님 앞에서는 항상 더 크게 웃었다. 처음 해보는 식당 일이었던지라 그 몇 시간이 너무 고되고 힘들었지만,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 손으로 돈을 벌고 싶었다. 그리고 적어도 한 달은 채워야 돈을 받을 수 있었다.
남편에게 다른 곳을 알아봐야겠다고 할 때마다 남편은 말했다. '얼마 해보지도 않고' 나약한 소리 한다고. 내가 두 달 만에 일을 관두고 처음으로 남편과 그곳에 식사를 하러 갔을 때, 남편이 사장님 얼굴을 보자마자 내게 말했다. "여기서 어떻게 일했어? 나는 절대 못해. 저런 사람이랑. 당신 대단하다"
그때, 그 말이 생각났었다. '잡초 같은 사람'
물론 항상 그렇지는 못했다. 아니, 더 자주 나는 뿌리째 흔들렸었고 뽑혀 버려졌었다. 하지만 나는 다시 그 씨를 심었다. 그것은 영롱한 꽃이 피는 씨도 신비의 약이 되는 씨도 아니다. 그냥, 잡초다.
여기저기 어디라도 모든 땅에서 솟아나는 풀. 모두에게 밟혀도, 끄떡하지 않는 존재.
나는 내가 그런 사람이었으면 했다. 볼 것도 없지만 또 일어서는 사람. 아무도 보지 않아도 뿌리를 가꾸는 사람. 어떤 흔들림에도 개의치 않는 사람. 끝없이 소란스러운 세상 안에서도 홀로 멈추어 있는 사람.
그런, 잡초 같은 사람.
26년 전 나는 수능을 망치고 교실에서 통곡을 하며 울었다. 세상이 무너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재수를 했다. 그러나 재수 시절 제대로 공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더이상 나를 가두는 철장이 없어졌기 때문이고 더이상 책 속에 나를 구겨 넣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도 또 방황했었다. 그리고 원치 않던 대학에 입학하여 원치 않는 공부를 했다. 원치 않던 직장생활도 했다.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때 내가 수능에 성공하고 원하는 대학에 가고 원하는 직장에 들어갔어도, 결국 지금의 내 자리로 돌아왔을 거라는 것을 말이다. 사람은 자신이 가야할 길을 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길은 수능과 입시의 성패가, 대학 간판과 직장 타이틀과 연봉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은 끝이 아니다. 시작이다. 진짜 나의 길을 가기 위한 미약한 시작. 수능이 첫단추가 될 수는 있지만 우리 삶의 진정한 가치의 중심에 있지는 않다. 우리는 그보다 더 귀한 것을 찾으려고 태어난 존재기 때문이다.
우리는 실패할 권리가 있고 다시 일어설 권리가 있다. 그러니 오늘의 실패는 인생의 실패가 아니다. 우리는 밟아도 일어나고 죽어도 살아나는 존재.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존재기 때문이다.
수능일. 어김없이 매우 추운 날이었다고 들었다.
오늘 수능을 친 모든 학생들이, 오늘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잡초'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