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을 일관성 있게 관통한 하나의 감정이 있다. 그것은 '외로움'이었다.
그게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생겨났는지 몰랐지만 어린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다르다는 것을. 나는 남들과 같은 웃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내게 행복은 남들과 다른 의미라는 것을.
유년시절의 나는 극도로 내성적인 아이였다. 말이 없었고 표정도 없었고 자기주장도 없었다. 그렇게 언제나, 나의 의견을 말하기보다 남의 의견을 따랐고, 나의 감정을 표현하기보다 남의 감정에 동조해주었다.
친구도 나 좋다는 친구와 놀았다. 주인공이 되고 싶은 친구들 뒤에서 기꺼이 배경이 되어주었다. 나는 그렇게 '있는 듯 없는 듯한 조용한 아이'였다. 모범생 반장이라는 수식어와는 별개로.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나의 감정을 억누르고 나 자신을 속이며 살아온 시간들이 많이 힘들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되었다. 그리고 중학교 입학 직전, 나는 친하게 지내던 여자 친구들 무리에서 왕따를 당한 적이 있었다. 이유는 모른다. 어쨌든 나는 서러웠다.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생각했다. 시내 각지의 학교에 흩어져있는 그 친구들에게 '복수'하겠노라고. 그 아이들에게 할 수 있던 가장 큰 복수는, 내 이름이 그 아이들을 앞질러 훨훨 날아다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 마음으로 학교 시험을 쳤다. 그리고 덜컥 전교 1등을 해버렸다. 그 큰 학교에서.
그 소문은 삽시간에 온 시내에 퍼졌다. 너무나 통쾌했다. 그 친구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위치에 내가 올라간 것이. 그 뒤로도 나는 전교 1등을 몇 번 더 했다. 온 선생님들의 찬사와 친구들의 부러움이 쏟아졌다. 부모님과 가족들의 기대가 자라났다. 미국에 사는 삼촌은 내게 손가락 걸며 약속을 받아가기까지 했다. "너는 꼭 하버드에 가야 한다"
그때 알았다. 내가 아주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정말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것을.
친구들이 나를 바라보는 '경외감 가득한 시선'도 가족들의 '결연에 찬 기대의 눈빛'도 다 불편했다. 나는 사실 그런 걸 원한 게 아니었는데, 그냥 복수를 하고 싶을 뿐이었는데, 이건 일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고 느껴졌다. 나는 시험 전날마다 일부러 학교 앞 오락실에 죽치고 앉아 테트리스와 핵사를 완파하는 모습을 친구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말해주고 싶었다, 너희들 그렇게 나 바라볼 필요 없다고, 나는 실은 그런 게 하나도 행복하지 않다고.
하지만 결국 누구에게도 그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나의 감정을 말하는 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화려한 중학시절'을 마치고 곧바로 마음을 바꿔먹었다. 남들에게 '우러름'을 받는 것은 한 번의 경험이면 충분하다 생각했기에. 더구나 입시모드로 전환되어 돌아가는 학교 생활은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이건 도저히 사람 사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도 말없이 규칙을 따랐다. 그래야만 하는 줄 알았었기에. 딱 한번 집에 와서 대자로 뻗은 채 엄마 앞에서 통곡을 한 적이 있었다. 나 학교 안 다닌다고 못 다닌다고. 그때 학교를 그만두었어야 했다.
야간 자율학습 시간마다 혼자 학교 주변 논두렁을 배회하고 다녔다. 실내화를 신은 채로 몰래 빠져나와 그냥 무작정 정처 없이 걸어 다녔다. 결국 고3 때 크게 아파버렸고 대학 진학에 실패했다. 그렇게 기대를 하던 '집안의 기둥'이 맥없이 꺾여버리는 모습에 부모님은 이만저만 실망한 게 아닌 눈치였다. 재수를 했다. 대학은 꼭 가야 하는 건 줄 알았기에. 하지만 나는 공부하지 않았고 연애를 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세상의 '주류'에 편입되지 않겠다고. 그 흐름 안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모두가 원하는 '주인공'이 되지 않겠다고. 그저 한쪽에 비껴 서서 '세상을 관조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그렇게 나는 다시 있는 듯 없는 듯한 아이가 되어 살았다.
그 후로 오랫동안 나는, 내가 삶을 바라보는 관점을 세상에 이해시킬 수 없는 채로 살아갔다. 더구나 세상의 관점에서 '관조자'로 살겠다는 생각 같은 건, 혈기 왕성한 청춘에게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무기력한 단어일 뿐이었기에.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돈을 벌어야 했기에 직장인이 되었지만, 사실 나는 마음속에 늘 다른 것을 품고 살았었다. 그것에 닿기 위해 나는 언제나 내 진짜 모습을 다락방에 숨겨두고 살아야만 했다. 세상의 관점은 나를 '위험하게'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 날, 그러한 내 외로움의 감정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한 사람을 만났다. 나의 융.
"외로움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남들에게 이해시킬 수 없거나, 다른 사람들은 용납할 수 없는 관점을 유지하는 데서 온다"
그때 단 한 사람이라도, 나의 말을 들어주고 너를 믿으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너를 이해한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나의 외로움은 더 일찍 그 힘을 잃었었을까.
여전히, 나를 세상에 이해시키는 것은 어렵다. 세상의 언어로는 나의 마음을 다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괜찮다. 외롭다는 건 쓸쓸한 것이지 슬픈 것은 아니기에. 그리고 세상이 꼭 나를 이해할 필요도 없기에. 융이 평생 느꼈을 그 외로움을 그저 함께 나눈다고 생각하면 좀 더 괜찮아진다. 그 아이는 오래된 내 친구일 뿐이기에. 융은 또한 말해주었다. 내가 가진 고독의 아름다움을.
"고독이 진정한 고독이 될 수 있는 때는, 자신의 자아가 하나의 사막이 되는 때 뿐이다"
이제 더이상, 누군가 내게 '너 자신을 믿으라고 너를 이해한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 지금 나는 누구보다 나를 잘 알고 있고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외롭지만 그 외로움은 내가 선택한 '즐거운 외로움'이다. 나만의 사막 위에서 오롯한 나를 만나는 일이 나에게는 무엇보다 큰 기쁨이기 때문이다.
나의 맑은 고독 앞에, 오늘도 조용히 미소 짓는다.
내 작은 행복, 나의 기쁨
* 메인 사진 : Camille Claudel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