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까지 갔던가. 나는 꿈을 꾸었던가.
‘머나먼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왔다. 단지 나 자신이 되기 위하여.
"어떤 직업을 갖고 싶나요? 장래 희망을 쓰세요"
어릴 적 학교에서 나눠주던 설문지에는 이런 질문들이 꼭 있었다. 친구들은 척척 그 칸을 잘도 메꾸었다. 망설임 없이 빈칸을 채우는 친구들이 신기했다. 아이는 한 번도 커서 무엇이 되고 싶다고 무엇을 하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랬다. 나는, 꿈이 없는 아이였다.
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집안, 1등을 놓치지 않았던 딸에게 아빠는 높은 기대를 품었었다. 모두 아빠 자신의 희망이었고 아빠가 이루지 못한 꿈이었다. 그러나 딸은 아빠가 바라고 세상이 기대하는 것을 꿈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모두가 잠든 밤, 뜬눈으로 밤을 지새며 바람을 느끼고 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우주여행을 할 거야. 세상을 탐험할 거야'
인형놀이도 수다 떨기도 재미없던 아이의 관심사는 ‘나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남들과 같은 웃음을 웃지 않는 나를, 같은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나를 아이는 이해하고 싶었다. 삶이 고통스러운 이유를 알고 싶었다. 엄마의 텅빈 눈을, 죽음 너머의 세상을 알고 싶었다. 그 모든 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 만이 아이의 눈을 반짝이게 했다. 그러나 현실은
‘세상 모르고 꿈이나 꾸는 아이’라는 정체성으로 나를 가둬놓았다. 언제든 그만 둘 생각으로 시작한 돈벌이를 놓으려는 나를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세상의 기준에서 나는 ‘철없고 한심한 아이’였기에.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 알았다. 내가 지니고 있던 소망은 매우 드문 사람들이 간직하는 꿈이며 세상에서 이해받기 어렵다는 것을. 그것은 세속을 등진 사람들이나 품는 마음이라는 것을. 아이는 처음으로 꿈이 생겼다. 나는, 출가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게는 책임져야 할 인연들이 있었다. 나는 일곱 살 아이의 엄마였고 한 남자의 아내였다. 아내라는 자리는 그렇다 해도 엄마의 자리를 놓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알게되었다. 수행을 하기 위해 산에 갈 필요가 없음을. 내가 처해 있는 현실이야말로 최고의 수행 자리임을. 나의 시간들은 불교 철학과 마음을 탐구하는 고요한 숲으로 채워져 갔다. 그렇게 나를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만들어진 고요는 오래가지 못했다. 나는 엄연히 세상의 관계 안에 있었고 그것은 항상 더 많은 것들이 요구되는 자리였기에.
처음부터 모든 게 상극이었던 남편과의 괴리는 깊어만 갔다. 관계는 나락으로 치달았다. 불편하고 외롭기만 했던 이국살이에서 맞이한 불화. 나는 어둠의 한 복판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온몸이 부서진 채로 한 생각을 하였다. 어릴 적 자주 했던 생각, 생을 그만 놓고 싶다고. 매일같이 다투는 행복해 보이지 않는 엄마 아빠를 결이 예민한 아이는 견디지 못했다. 아이의 고통을 바라보는 내 심장은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누구도 아닌 내가 내 아이를 지옥으로 데려갔다는 자각은, 지금껏 알지 못한 고통의 끝으로 나를 떠밀었다.
깊은 어둠 속으로 침몰할 때 떠오른 단 하나의 충동이 있었다. 글을 쓰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십 대에 시를 썼던 것과는 다른 차원의 솟아남이었다. 나는 끝없이 쏟아지는 문장들을 받아 적기 시작했다. 나의 기쁨과 슬픔을 아픔과 행복을 말하였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내 존재의 기쁨을 펼쳤다. 그렇게 세상을 만났다.
2019년 5월 11일, 나는 브런치에 첫 글을 썼다. 나의 완전히 새로운 글쓰기가 시작되었다.
나의 브런치 첫 글
내가 느끼는 외로움
* 메인 그림 : Francesco Clemente, <씨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