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산부인과에 남자 전공의가 들어오자 교수님은 기뻐하셨다. 전공의와 교수님의 관계는 마치 대학원생과 교수님, 그리고 직원과 사장님의 관계가 섞인 것과 비슷하다. 실로 평등하고 멋지며 쿨한 관계가 아닐 수 없다. 남자든 여자든 일손이 늘어나니 누가 들어온들 좋겠지만, 남자라서 좋아하는 건 아마 대학 병원에 '계속' 남아 묵묵히 일해줄 거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래도 남자가 군대식 상명하복 문화를 좀 더 잘 받아들인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회진이 끝난 뒤 보미 선생님과 커피 한 잔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교수님은 역시 생각이 좀 보수적이시네요. 요즘 여자 전공의가 얼마나 일 잘하는데."
"여자 선생님은 열심히 해도 전공의 끝나고 전문의 되자마자 병원 나가서 그래. 아니면 임신, 출산하거나 육아하거나. 교수님은 본인의 손과 발이 되어줄 착실한 노예가 필요하거든~"
"하하... 뭐 남자 의사는 노예가 되어도 괜찮나요?"
"그래도 뭐~ 교수님 시대엔 남자 의사가 교수 되는 게 당연한 문화였으니까. 노예도 뭔가 기대하는 게 있으니 참고 견디는 거지. 여자는 '유리 천장'이란 게 있었다고 하잖아. 그런 환경을 생각하면 원로 여교수님들이 정말 대단하신 거지! 그 당시엔 부부 의사여도 남편이 교수하고 아내는 동네 의사하거나 육아했대. 그러니 여자 의사는 일찌감치 기약도 없이 노예로 일하는 것보단 자기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맞는 전략이었고. 그런 의미로 난 열심히 돈 벌 거니까 산이는 대학병원을 잘 지키고 있으렴! 크크크."
보미 선생님의 말에 틀린 사실은 없겠지만, 논리 전개 방식엔 이견이 있다. 도대체 언제의 유리 천장 얘기를 하는 건가... 적어도 산부인과에서는 유리 천장이 깨진 지 오래다. 과 자체가 침몰한 덕분(?)이다. 노예 생활을 해도 미래가 불투명한 젊은 의사에게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불합리한 희생을 강요하기 어려워졌다. 남자도 여자 못지않게 현재의 행복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진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이 된 지 오래다. 하향평준화인지 상향평준화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평등인 셈이다.
사회가 바뀌면 사람도 바뀐다. 전공과목을 고민하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어머니는 날 낳을 때 주변에 여자 산부인과 의사가 한 명도 없었다고 하셨다. 교수님은 그 시절에 산부인과 의사를 하셨던 분들이다. 교수님은 그땐 산부인과가 최고의 인기과였다고 추억하곤 하셨다. 산부인과 병원은 지금과 차원이 다른 문전성시를 이뤘고, 야망 있는 의사들은 산부인과를 하고 싶어 경쟁했다고 한다. 남자 의사끼리도 경쟁하는데, 여자 의사가 거기서 경쟁한다는 건 그 시절엔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고 한다. 난 그런 과거와 지금의 온도 차가 어이없게 느껴진다. 과거엔 왜 남자 의사들이 산부인과를 기를 쓰고 하려고 했고 지금은 아닌가? 옛날엔 산부인과 의사가 멋있었고 지금은 아니어서? 옛날엔 산부인과 환자들이 고분고분(?)했고 요즘은 죄다 까탈쟁이밖에 없어서? 아니면 옛날 남자 의사들은 완전 변태이고 지금은 아니어서?
즉,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사람들은 느끼는 것이다. 산부인과는 변하지 않았지만, 사회 환경이 변했음을. 이런 식으로 머지않은 미래엔 아마 '우리 때만 해도 다들 의대 가고 싶어서 난리였던 시절이었는데...' 하며 추억을 파먹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은 흐르고 그 위에서 우린 영문도 모른 채 흘러 다닌다. 그 와중에 꿈과 생존 사이에서 아등바등하는 개인을 이기적이라고만 할 순 없겠지. 다 먹고 살자고 택하는 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