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워도 끝을 내야 하는 것
피곤해서 눈알이 빠질 것 같은데 막상 잠은 들지 않는 밤이 있다. 오늘이 딱 그날이다. 다행인 건 내일이 토요일이라는 점이다. 아, 물론 프리랜서에게 손가락 쑥 내밀어 찍어야 할 출근 인증 기계 같은 건 없지만, 제약사항이 존재하지 않을 때 시간을 관리하는 건 더 어렵기 마련이다.
껐던 형광등을 켜고 아이맥도 다시 부팅했다. 그리고 닫았던 창문을 드르륵 열었다. 새벽이라 밖은 온통 고요하다. 종종 지나가는 차 소리만 들린다. 이 동네는 조용한 게 아주 큰 매력이지만 아직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은 건 단점이다. 이 조용하고 아늑한 동네에도 가끔 술 취한 젊은이가 주정을 부리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면 쫓아가서 어퍼컷이라도 한 방 날리고 싶지만, 그랬다간 내 손목에 은색 팔찌가 채워질 것이 불 보듯 뻔하기에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 게 좋다.
냉장고를 열어 캔으로 된 카스 맥주를 꺼냈다. 언제 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한 일주일 정도? 매번 냉장고에 맥주를 넣어두는 편이다. 언제 먹고 싶어질지 알 수 없으니까. 보통은 나중에 먹겠다고 구매해놓고 그 날 밤에 모두 마셔버리지만, 요즘에는 술을 거의 안 먹다 보니까 냉장고에서 맥주를 찾아내는 날도 있다. 잠이 안 올 때 술 한잔 하는 건 참 괜찮은 전략이지만 다음 날의 피로는 감수해야 한다. 술을 마시면서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건 독특한 경험이다. 적당한 취기에서 나오는 집중력은 비교할 대상이 없다. 알딸딸하게 쓰는 글은 거칠지만 솔직하고, 알딸딸하게 읽는 글은 기억은 안 날지언정 빠르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알중(알코올 중독)’이라는 자작곡을 만들 만큼 밤만 되면 술을 마셔댔는데 요즘에는 그 시간에 게임을 하거나 소설책을 보면서 시간을 보낸다. 게임은 오버워치이고 소설책은 주로 문학 류다. 둘 다 재미있지만 좀 더 재미있는 쪽은 역시 소설이다. 게임은 패배하면 짜증 나지만 책은 그런 게 없으니까.
며칠 전 <오베라는 남자>를 다 읽었다. 오베는 매력적인 캐릭터였고 조금 늘어지는 내용이 있는 것 같았지만 재밌었다. 다소 급하게 마무리된 느낌을 지울 수 없어도 해피엔딩으로 끝나 다행이다. 요즘 부쩍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인터넷서점 장바구니에는 이미 수십 권의 소설 쓰기와 관련된 도서가 담겨 잇는데 책 값만 해도 30만 원이 넘다 보니 망설여진다. 돈도 돈이지만 그 책들을 다 읽을 수 있을지, 그리고 정말 내가 소설 쓰기라는 지루한 작업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심 때문에 몇 달째 생각만 하고 실천은 못 하고 있다. 소설을 쓰려면 한 3개월 정도는 꼬르륵 잠수를 타야만 할 것 같다. 수염도 좀 길러야겠고.
고향을 등지고 타지에서 일하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지인 없는 타지에서 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오늘은 친구가 오랜만에 안동에 왔다. 그 친구와 함께 또 다른 친구가 요리사로 있는 가게에 갔다. 요리사 친구는 멋들어진 복장을 갖추고 요리를 내어왔는데 정말 맛있었다. 실력이 제법이군. 고향에 온 친구는 벌써 애를 2명이나 키우면서 아빠의 삶을 살아간다.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아버지의 무게는 내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요리사 친구는 앞으로도 요리 쪽에 몸담을 예정인가보다. 자기의 위치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친구들의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니 내 기분도 좋아졌고 한편으로 자극을 받기도 했다.
요즘 내가 하는 일들은 주로 아이디어를 쥐어짜는 업무다. 마케팅과 광고 기획 업무를 비롯한 매거진에 기고할 칼럼 쓰기, 여행 후기 원고 작성, SNS에 PPL로 광고할 영상 시놉시스 작업도 있고 웹툰 스토리에까지 손을 댔다. 대체로 뭔가를 생각해서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크리에이티브한 작업이다. 상상 속에만 있던 어떤 것이 눈에 보이는 콘텐츠로 만들어져 나왔을 때의 그 보람은 정말 대단하지만, 그걸 만들기까지의 과정은 골치 아픈 일이 한두 개가 아니다. ‘벽돌 100개 쌓기’처럼 명확한 목표지점이 있다면 좀 더 수월하겠지만, 콘텐츠에 대한 지적 노동이란 건 수치도 없고 끝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는 완료를 지어야 한다. 아쉬워도 끝을 내야 하는 것이다.
아쉬워도 끝을 내는 것. 어쩌면 이게 인생을 관통하는 하나의 메시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질질 끌다가 포기해버리느니 다소 부족할지라도 일단은 끝내는 게 중요하다. 사랑, 글, 그림, 음악, 동영상, 생각, 심지어 마음가짐까지. 어느 순간에는 이 정도에서 만족하며 끝내야 한다. 끝은 새로운 시작과 닿아있다. 결국, 뭔가를 끝내야 다른 걸 할 수 있다. 이 글도 마찬가지. 계속 수정한다고 해서 좋아진다는 보장이 없다. 때로는 꾸밈없는 그대로의 민낯이 가장 아름다운 법이다.
유명한 낚시꾼 일화가 있다. 한 청년이 낚시하고 있으니 아저씨가 와서는 그물을 사라고 부추긴다. 왜라고 물으니 그물로 더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데 그러면 더 좋은 배를 살 수 있고, 더 좋은 배를 사면 더 좋은 그물도 살 수 있고 그러면 더 많은 고기를 잡고…. 결국에는 낚싯대를 드리우고 낮잠을 자면서 편안한 오후를 보낼 수 있다는 게 아저씨의 설명이다. 청년은 내가 지금 그렇게 하고 있지 않으냐며 반전을 준다. 우리는 왜 그토록 아등바등 살아가는 걸까?
내가 꿈꾸는 노후도 어쩌면 지금 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여행과 여가를 즐기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무언가를 뚝딱 만들어내는 일상.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지붕이 있고 원하는 걸 할 수 있는 아이맥과 초고속 인터넷, 아이폰, 내 여행을 기록해줄 DSLR과 믹스커피 그리고 얼음…. 부족한 게 많지만, 생각을 달리하면 부족함 없는 그런 생활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왜 그토록 아등바등 살아가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