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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실남실 Mar 18. 2024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불안

페터 한트케,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한트케의 책을 일본 여행 1일 차 비좁은 침대에서 읽었다. 

매번 읽어도 새로운 산문이란, 생각해 보면 이처럼 슬픈 책도 없다. 읽을 때마다 사지가 쭈뼛거리며 소름이 돋고 아련하게 비애감에 젖게 된다. 

이 책을 처음 읽었던 젊은 시절에는 그렇게 까지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나도 이런 시절을 보냈었지란 생각이 들면서 비감에 사로잡히는 괴물 같은 책이기도 하다. 

한때 실력 있는 골키퍼로 활약했던 요제프 블로흐는 일용직 현장에 출근해서 작업반장의 눈빛만 보고 자기 혼자 오늘이 마지막이란 해고 통보라고 확신하고 직장을 뛰쳐나와 방황하게 된다. 그리고 무모하고 소모적이며 동물적인 일상에 자신을 던지고 또 관찰하고 또 간신히 인간다운 척 인간임을 반복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작가는 요제프의 뜨듯 미지근한 모험을 대단히 불투명해 보이는 투명한 문장으로 구축해 낸다. 연민도 없이, 불안에 가득 쌓여 언어들을 실험하고 있다. 

한편 이 실험은 끝없는 현대성을 내뿜고 있다. 어떤 인간의 조건에 관한 면밀한 보고서로 읽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불투명하다고 느끼는 그의 문장의 명료함은, 독자 개인이 요제프의 내면에서 받은 불투명하고 답답한 느낌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그런 조건 하에서 애써 명료함을 찾아가는 도정에 머물고 있는지도 모른다. 독자는 작가가 이미 경험했던 체험 이 삶의 현장 분투기 속으로 휘말려 들어간다.

한트케의 책은 아주 오래전부터 읽기가 꺼려졌다. 

그 문장이 놓인 마음의 상태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일이란 소원해진 친구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처럼 쉽지 않고, 며칠 전부터 숨 고르기를 해야 하는 종류의 과업이기 때문이다. 어떤 고전들은 책 자체가 어렵다기보다는 그것을 준비하는 마음의 채비가 더 어려운 법. 때문에 많은 훈련과 앞뒤로 쾌활한 정신을 유지해야 하는데, 우리 삶은 그런 걸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다만 일상의 우울증을 겪는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은 더할 나위 없이 명료해 보일 수 있지만 그것조차 늘 폭발 전의 긴장감을 유발해서 무척 위험하다. 

여하튼, 여행 1일 차의 밤은 피곤함에 쩐 몸을 쉽게 가누지도 못하고 또한 지독한 독서의 여운 때문에 잠들지도 못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태였다. 이런 책을 가져온 걸 후회하게 만드는 자신을 탓할 수밖에... 

어찌 됐건 한트케의 책들에 대한 회고를 할 시점인 것도 같은데, 그의 최근 행보나 노벨상 이후의 최근 소식들 정치적인 문제들은 애써 외면했던 것도 같다. 보호 본능이라고도 할까. 나름 복잡한 애증 관계에 놓인 독자와 작가 관계라고나 할까. 한트케의 소설과 산문은 견고함을 유지한 채 미래의 독서의 지평에서 내내 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지금은 이런 잡글밖엔 쓰지 못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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