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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실남실 Mar 19. 2024

지도에도 없는 감정

유디트 헤르만, <레티파크> 

현대 독일작가 유디트 헤르만의 17편 내외 짧은 단편이 담긴 소설집이다. 


<레티파크> 어딘가의 지명인 것 같은 데 어감이 나쁘지 않다. 

작가는 2000년대 초반에 민음사 모던클래식 시리즈로 한 번 소개가 된 듯한 기억이 있다. 뭔가 섬세하고 여성여성한 문체였는데 잘 기억나지 않는데, 이번 단편들을 읽으니 뭐랄까? 더 응축되고 리듬이 더욱 경쾌해진 느낌이 든다. 뭔가 더 정갈한 느낌이랄까. 

반면 단편이 지향하는 바는 더욱더 감춰져 있다고 할까? 

같은 소외감과 이별, 관계의 단절을 보여줘도 레이먼드 카버류의 끈적함이 배어든 실내에서 느낄 참을 수 없는 종류의 응축이 아니라, 바람소리가 들리는 야외의 선선하고도 약간의 소름이 돋는듯한 느낌의 응축이다. 


작가의 문장과 묘사 수준은 아주 장난이 아니다. 그녀는 뭐랄까, 장편의 호흡으로는 할 수 없는 이야기들에만 관심이 있거나, 일상에서 인상적인 글감들을 마주하면 그것들에 천천히 살을 붙여서 이야기를 만들기 때문에, 완성된 글쓰기까지 가는 과정이 어려운 그런 작가인 듯하다. 


애초에 세상에 많은 말을 남기고 싶단 포부는 없지만 절대 활자화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의 불씨를 생을 통해 꾸준히 키워가는 그런 종류의 작가인 것이다. 


이번 책은 번역이 좋아서인지, 한국 여성작가의 문장처럼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아니 요즘 한국 여성작가들이 이렇게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정도로 화자의 생각이나 시선들이 잘 표현되어 있어서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추천해 줄 정도의 정돈된 산문이란 뜻이다. 


아쉽게도 나에겐 이런 스타일의 글들은 크게 매력적이지 않다. 


어떤 산문들은 첫 문단을 읽으면서 마음가짐을 준비하게 한다. 

곧장 책을 덮고 몸을 움직여 더 내밀한 장소나 오히려 더욱 개방적인 장소 등에서 책 등을 바깥쪽으로 향하게 만들고 또 어떤 책들은 내밀한 호흡에 적응되기를 차츰 기다리게 만들기도 한다. 

유디트 헤르만은 후자 쪽이며 일단 익숙해지고 나면 흡입력과 설득력을 가진 그녀의 세계를 조심스레 펼쳐놓는다. 인물들에 집중하면서 읽으면 좋다. 아니 에르노와는 다르지만 그녀 역시 오토픽션적인 글쓰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이야기의 세부적인 결들이란 실제 겪은 한 번의 시선에서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여하튼 독서의 후미는 무색무취의 낮은 채도의 색감이 느껴지는 맛인데, 

실제 독자가 상상력을 가동해야 하는 부분들은 그전단계의 응축이 가해졌을 소란스러운 가공 전의 일들이다. 여하튼 그런 부분들이 이미 게을러질 대로 게을러진 나에겐 버겁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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