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지 딱 2달이 되었다. 근래엔 꿈을 잘 꾸지 않았는데 오늘은 남자들이 재입대하는 꿈을 꾼다는 것처럼 다시 회사 사무실에서 끔찍이도 싫어하던 PM을 마주하는 악몽을 꿨다.
자율 신경 이상으로 7월부터 치료를 받았다. 불안 증상 때문에 9월에 뇌파 검사받았는데, 오늘 다시 검사를 받는 날이었다. 머리 곳곳에 젤을 바르고 모자를 뒤집어쓰고 5분은 눈을 감고, 5분은 앞에 있는 검은 점을 응시한 채 검사를 받아야 한다. 괜히 긴장이 되었다. 눈을 감은 동안은 숨 쉬는 것에 집중하려 했고, 눈을 뜬 동안은 점에 집중하려 했는데 그게 뭐라고 스트레스가 됐는지 검사 내내 숨 쉬는 게 답답했다.
기대와 달리 지난 검사 때에 비해 큰 차도가 없었다. 오히려 더 결과가 좋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 아무래도 검사받을 때 긴장했던 것 때문일까?
TMS(경두개 자기 자극술) 치료는 4번 정도 받았는데 치료 중에 눈과 코의 통증과 공황 증상이 와서 더는 못 받겠고, 약을 늘리고 tDCS(경두개 전기 자극술)만 이어가게 되었다.
뇌파검사 결과를 본 의사는 나에게 물었다.
“많이 불안하세요? 그동안 무슨 일 있으셨어요?"
"아니요. 별 자극 없이 지냈어요."
요 며칠은 인큐베이터에 있는 것처럼 칩거해 있었다. 11월 말까지만 해도 많이 좋아졌다고 느꼈었다. 그래서 12월에 실행할 유익한 계획을 세워두었었다. 하지만 12월 3일 이후, 나는 시간 감각도 잊은 채 불안과 흥분 속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12월 3일. 1년에 한두 번 올라오시는 부모님이 서울에 올라오셨다. 김장 김치, 갖가지 찌개와 반찬, 겨울 이불을 트렁크 가득 싸 들고 오셨다. 중간에 부모님과 망원시장 구경도 하고 며칠 후면 맞이할 부모님의 결혼기념일도 축하해드리며 맛있는 저녁도 사드렸다. 집이 좁아서 주변에 숙소를 잡아드리고 집에 들어와 평소에 틀지도 않던 TV를 켰다. 날벼락 같은 계엄령 선포 순간을 봐버린 것이다.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하필 왜 부모님이 올라오셨을 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불안은 극한으로 치달았다. 유튜브 라이브로 국회 앞 상황을 지켜봤다. 국회의원 수 과반이상이 찬성을 해야만 해제할 수 있다고 했다. 입구에서 출입을 막아 담을 넘어 한두 명씩 도착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국회의 까만 하늘 위에 헬기들이 나타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주시하려고 헬기가 왔나보다 했다. 하지만 잠시 후 총을 들고 야간투시경까지 장착한 군인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미친 상황이었다. 영화가 아니었다. 무서웠다. 혹시 라이브로 참혹한 현장을 보게 될까 두렵기도 했다.
군인들은 국회 유리창을 깨고 진입했고 내부에선 어떻게든 군인들의 로텐더홀 진입을 막기 위해 기자와 보좌관들이 책상과 의자 등의 집기들을 쌓았다. 그 장면 또한 고스란히 생중계되었다. 다행히 190명 출석, 190명 찬성으로 2시간 반 만에 계엄령 해제투표는 가결되었지만, 그런 어마어마한 일을 벌인 무법자들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계엄령 해제 발표 이후에도 진정이 되지 않아 새벽 5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침이 되어 부모님을 만났다. 부모님은 피곤해서 바로 잠자리에 드셔서 아침이 돼서야 그 일을 알았다고 했다.
"하필 엄마, 아빠 왔을 때 이런 일이 생겨서 얼마나 불안했나 몰라."
"나는 차라리 우리 와있을 때라 잘됐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데리고 내려가면 되니까"
그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엄마의 말에 괜스레 마음이 뭉클해졌다.
우리는 점심으로 쌀국수를 먹었고, 쇼핑을 하고,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무사히 고향으로 내려가셨다. 만약 간밤의 그 일을 막지 못했더라면 12월 4일 부모님과의 시간은 어떻게 됐을까?
83년생인 나는 계엄이 어떤 건지 겪어보지 못했다. 5, 6살 때쯤 엄마와 시내버스를 타고 대학교 앞을 지날 때 맡았던 매캐한 최루탄 냄새, 내 코와 입을 막아줬던 엄마의 손을 기억한다.
당시 방영하던 드라마에선 항상 데모를 하다 쫓겨 다니는 대학생이 등장 했었다. 쫓겨 다니다 모르는 집의 문을 두드리고, 숨겨 주었지만 결국 잡혀가 음침한 조사실에서 모진 고문과 폭행을 당하는 장면을 드라마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
‘데모하면 잡혀가서 무서운 일을 당하는구나!’
어린 나의 머릿속 깊이 각인 되었다.
고등학생 때 사회 선생님께서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해 이야기 해주신 적이 있다.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도 트럭에 태워져 간 뒤 생사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당시 기록물 사진을 보여주시며 끔찍한 사진도 있으니 힘들면 보지 않아도 되지만 이런 역사는 잊지 말라고 했다.
이 정권이 시작된 뒤 일상에 불안을 안고 살았다. 특히 작년 6월 새벽, 요란한 경보에 놀라 잠에서 깨 피난을 준비하라는 재난 문자를 봤을 때. ‘결국 두려워하던 일이 이렇게 벌어지고야 말았구나’ 하며 평정심을 찾기 힘들었다. 그 일은 헤프닝처럼 넘어갔지만, 매일 밤 잠자리에 들 때마다 혹시 또 그런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한 마음을 떨치기 힘들었다.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일들을 목도하며 답답함은 극에 달했는데 결국 계엄령까지 선포해 국회에 군인들까지 보내 나라를 흔들어 놓다니 나의 불안은 하늘로 치솟았다. 난 그날 밤 필요할 때 더 복용하라고 줬던 항불안제를 얼른 찾아 삼켰다.
개개인 한명 한명이 헌법기관이라던 국민의 선거로 선출된 여당 국회의원들이 탄핵안 표결에 참여조차 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을 때 답답함과 분노에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탄핵안이 가결되기까지 내내 불안감이 지속됐다. 하지만 추운 날씨에도 두려움을 유쾌함으로 무장한 채 자신이 갖고 있는 가장 밝은 것을 들고 거리로 나온 많은 국민들 덕분에 탄핵안 가결이라는 산 하나를 넘었다. 앞으로 몇 달 동안은 대혼돈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뭐 그런 일로 불안하고 잠을 못 자냐?'고 했다. 모두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일이었다. 당연한 줄 알았던 일상을 잃을 뻔했다. 속속들이 드러나는 사건의 전말들을 보며 나쁜 놈들도 저렇게 열심히 사는데 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많이 불안하세요? 그동안 무슨 일 있으셨어요?"라는 의사의 말에 사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이해 못 해줄 것 같아 그냥 별일 없이 지냈다고 했다.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뇌파검사 결과를 보며 속상한 마음에 병원 1층 카페에서 또 멍하게 시간을 보내다 갈 뻔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한자 한자 꾹꾹 눌러 적어본다. 아마 그날 그 일을 막지 못했다면 이런 글조차 게재하지 못했겠지...
불안감을 걷어내고, 두근거리지 않는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 잠을 제시간에 자야 하는데 쉰다는 이유로 밤낮이 바뀌어버렸고, 약 복용 시간도 뒤죽박죽... 춥다고 집에 들어앉아서 산책도 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상황을 주시하며, 일상을 돌보는 것뿐이다. 그들보다 더 열심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