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시작하며
나는 약 13년 전에 직장을 그만 두었다. 내 직장은 학교였고, 사립이이었기 때문에 사직을 하면 다시 들어오는 것이 어려웠다. 그럼에도, 당시 3년차밖에 되지 않았던 햇병아리 초보 교사가 사직서를 내고 학교를 뛰쳐나온 이유는, 바로 미움을 받는 법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당시 직장에는 나보다 10살이 많은 교사가 있었다. 처음에는 그 교사가 나이에 비해 예쁘고 친절해서 매우 좋은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내 바로 옆자리이기도 해서 내가 할 일을 이것저것 챙겨주고 이야기도 해주곤 했다. 그러나 내가 생각보다 무뚝뚝하고 싹싹하지 못한 데다, 일머리도 없고 어리바리한 것에 실망해서일까, 점점 말을 줄이더니 어느 날은 나를 불러다 놓고 '이거이거 잘못하는 거예요'라고 지적을 했다. 나는 그 지적이 너무 무서워서 그 주말 내내 눈물로 보내고 출근해서 앞으로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나는 그가 지적한 것들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초보 교사에게, 학생들을 제대로 훈육하라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요구였다.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내게는 그럴만한 스킬도 능력도 없었다.
그후로 그의 태도가 달라졌다. 냉랭해지더니,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급기야 간식을 싸와서는 나를 빼고 다른 교사들에게만 주기도 했다. 원래 그전부터 간식을 자주 싸와서 나누어 주었는데, 나는 먹기 싫은데도 억지로 먹곤 했다. 주는 것을 거절하기도 난감해서 그냥 받아서 먹었었다. 그래서 안 주는 것이 오히려 고맙기도 한데 또 나만 빼놓고 다른 사람들은 주니 서럽기도 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뭔가 내가 실수라도 하면 험악하게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나에게 소리를 치거나 무서운 얼굴로 말하기도 했다. 그 실수라는 것이, 자신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어도 마찬가지였다. 청소 담당 교사도 아니면서, 우리반 청소 구역을 알아다가 '거기 왜 이렇게 청소가 안 되어 있어요'라고 해서 내가 대걸레를 가지고 가서 공강 시간에 청소를 하기도 했다.
당시는 그것이 괴롭힘인 줄도 몰랐다. 나는 아직 이십대 후반, 막 시작하는 초임 교사였으니까. 나를 좋아하는 교사들이 훨씬 많았고, 내 하소연을 들어줄 귀도 많이 있었으나 내게는 나를 괴롭히는 그 교사만 보였다. 그렇게 3년을 지내니 더는 못 해 먹을 것 같았다. 어느 날 수업을 들어갔다가 나왔는데 교감 선생님이 부르셨다. 교감 선생님도 꽤나 나를 혼내셨는데, 그날도 나를 불러다 놓고는 '왜 수업 시간에 애들이 다 자고 있는데 혼자 수업하고 있느냐'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듣는데 내가 놀랐던 것은, 1시간 내내 수업을 하면서 애들이 자고 있는 것조차 몰랐다는 사실이었다. 아마도 그때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다면 중증 우울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는 더 살고 싶지 않아서, 나는 학교를 사직했다.
나는 미움 받는 법을 몰랐다. 미움을 받으면서, 나를 미워하는 그 교사만 바라보았고, 내 삶의 목표를 오로지 그 미움을 받지 않는 것으로 잡았다. 미움 받지 않기 위해 나는 최선을 다 했다. 언제는, 그 교사가 시키는 일을 하기 위해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데 너무 급히 뛰어내려가서 넘어질 뻔한 적도 있다. 미움을 소거하기 위해 나는 계단을 내려가는 것초자 신경쓰지 못할 정도로 다급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내가 사직을 할 때 그 교사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한 교사는 '그 교사가 너한테 미안하다는 소리 안 해?'라고 하면서 놀란 목소리로 묻기도 했다. 그런데 미안하다는 소리는 커녕 그 교사는 '글 쓰고 살면 돈 많이 번다더라'라는 이상한 소리나 했다. 당시 나는, 다른 핑계를 대기 어려워서 글을 쓰느라 그만 둔다고 대충 둘러댄 상태였다.
그때에 알았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 미움 받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 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아무리 노력해도 그에게서 미움을 거두어갈 수는 없다는 것을. 까닭은 미움이란 것은 그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진짜 달라졌어도 그는 내게서 미움을 쉽게 거둬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미움과 그에 따른 괴롭힘을 합당하게 하기 위해 이미 수없는 합리화를 통해 나를 '회생가능성이 없는 개썅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정말 미움받게 행동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경우도 있겠으나, 대부분의 경우는 나와 같은 경우일 것이다.
미움의 원인은 자신에게 있는데, 그것을 내게 있다고 합리화를 해 버리고 그것을 믿게 되었으니 그는 쉽게 그 믿음에서 나올 수가 없을 것이다. 사직을 할 때조차 아무런 죄책감이 없었던 것은 아마 그 합리화한 믿음을 여전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는 자신이 내게 저지른 수많은 히스테리를 사과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 역시 그것을 사과받을 기대 자체를 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를 제외한 수많은 동료 교사, 내가 그가 내게 한 것을 이야기하지도 않은 교사들이 내게 밥을 먹자고 청하고 나를 대신해 그를 욕했다. 나는 이것이 무슨 그림일까 대단히 궁금했다.
나는 미움을 받으면서 의연히 견디고, 나를 미워하지 않는 대다수의 사람과 친하게 지내며, 그 미움이라는 터널을 지나 나를 온전히 사랑하게 되는 그곳으로 이르지 못했다. 나는 내가 미움 받으니 자격이 없다고 여겼다. 나는 그 미움을 이겨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오히려 그 미움은 사라질 수가 없는데도, 나는 내가 노력해서 없앨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와 화목하게 지내는 것을 늘 꿈꾸었고, 그와 다시 동료 교사로 행복하게 되는 날들을 생각했다. 그것이 내 실수였다. 나는 결국 미움을 이겨내지 못했고, 그 자리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리고 13년이 지났다. 그 사이에도 수없는 일들이 있었지만 13년전의 그 일처럼 나를 대놓고 미워하는 이는 없었다. 그러니 내 자라지 못한 자아는, 훈련받지 못한 어린 아이는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생겼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생긴 것이다. 나는 몇 번을 이 미움의 관계를 풀려고 노력했다. 카톡도 하고 전화도 했다. 만나면 친절하게 안부를 물었다. 하지만 나를 대하는 그에게서 나는 보았다. 13년전의 그 교사의 모습을. 그 냉랭하고 싸늘한, 미움의 얼굴을. 나는 생각했다. 기회가 왔다. 다시 미움이라는 터널을 지날 기회가.
이 글을 시작으로, 나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미움 훈련'을 기록할 것이다. 나는 이것을 혼자서는 할 수가 없다. 실은 나는 미움 받는 것을 최고로 싫어하는 사람이다. 오죽하면 대학 때부터 어렵게 교사자격증 취득해서 얻은 교사 자리를 내놓고 도망을 갔겠는가. 그러니 기도하면서, 도우심을 바라면서 나는 이 길을 걸을 것이다. 그때처럼 실패할 수도 있다. 내가 다 내려놓고 도망을 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내가 희망을 가지는 것은, 그때처럼 나는 미움을 없애려고 노력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내게 훈련인 이상 나는 도망가지 않고 견뎌내려고, 그 속에서 내 마음이 단단해지는 것을 보려고 최선을 다 할 것이다. 미움과 동행하는 법을 그렇게 배워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