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식하면 용감하다’
일반적으로 이 말은 자기 주제도 모른 채 나대는 사람들을 향한 비난조의 경구이지만, 나는 이 말을 다르게 바라본다. 때로는 돌다리를 지나치게 두드리는 것보다, 무지를 벗 삼아 과감히 뛰어드는 것이 더 좋은 결과를 내는 경우가 있다. 바로 몇 해전 우리 부부의 사례가 이에 해당한다.
2021년 가을 우리 부부는 제주도 여행을 떠나며 한라산 등반을 계획했다. 당시 우리 부부는 등산에 막 흥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직전에 등반한 검단산과 인왕산에서 큰 성취감을 맛보았기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산인 한라산을 등반 계획은 많은 설렘을 주었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한라산은 경사가 급하지 않고 난도가 높은 산은 아니라는 글이 많이 보였다. 그 말을 믿고, 다른 여행 일정을 짜느라 산행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한라산 등반을 계획한 당일, 아직 해가 완전히 뜨기 전인 6시 30분에 우리 부부의 산행은 시작되었다. 맑을 것이라는 예보와는 달리 가느다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급히 산 입구의 매점에서 얇은 우비를 구입했다. 갑자기 추가된 우비 외에 우리가 준비해 온 물품은 많지 않아서, 모두 허리에 차고 있는 작은 힙색에 충분히 들어갔다. 각자 챙긴 물품이라곤 생수 500ml 2 통과 단팥빵(아내는 소보로빵), 초코바 1개가 전부였다. 한나절도 더 걸리는 산행에 이런 비루한 준비물 이라니..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지만 우리 부부는 범을 두려워하지 않는 하룻강아지 마냥 순수한 미소를 머금고 한라산 입구로 씩씩하게 걸어 들어갔다.
추적추적 빗방울이 떨어졌지만, 평소 비를 좋아하는 나는 이런 날씨를 운치 있다고 느끼며 들떠있었다. 하지만 그런 즐거움도 잠시였다. 싸구려 우비는 빗물을 제대로 막지 못해 얼마 지나지 않아 옷이 몽땅 젖었다. 계속된 움직임 덕분에 춥지는 않았지만 빗물을 잔뜩 머금은 옷은 마치 군장 같았다. 짱짱한 판초우의와 미끄러운 지면으로 낙상을 방지해 줄 튼튼한 등산 스틱을 장착한 사람들 사이에 달랑 힙색 하나 착용한 우리 부부의 모습은 소인국의 걸리버 마냥 이질적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코로나 시국으로 착용이 필수였던 마스크 역시 빗물과 땀에 젖어 호흡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4시간에 가까운 산행 후 도착한 정상은 마치 구름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주변에 짙은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주변이 온통 새하얬고, 강한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십 수 미터도 채 되지 않는 가시거리 때문에 백록담을 구경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아침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해 속이 쓰릴 정도로 배고팠던 우리는, 재빨리 정상의 이정표 앞에서 인증샷만 남기고 준비해 온 작고 소중한 양식인 단팥빵을 먹기 시작했다. 정상이라 비를 피할 곳도 마땅치 않았기에 우리는 빗물에 젖은 빵을 흡입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앉아있으니 강한 바람 때문에 땀이 빠르게 식고 엄청난 한기가 밀어닥쳤다. 입술은 파래지고 온몸은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보온병에 뜨거운 물을 싸와 뜨근한 라면 국물에 김밥을 먹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빵을 먹었음에도 더 강한 허기가 치고 올라왔다. 거기에 심한 추위가 등을 떠밀어 지친 체력을 회복할 새도 없이 하산을 시작했다. 힘겹게 등반한 정상에서 머무른 시간은 겨우 20분 남짓이었다. 내려가는 데에는 3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 것 같다. 마치 좀비 마냥 두발을 질질 끌고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앞으로 이런 무계획적인 산행은 지양해야겠다고 느꼈다.
그런데 막상 이런 생각도 들었다. 예전에도 몇 번의 제주도 여행에 한라산 등반 일정을 넣었지만 한라산 입구에도 다다르지 못했다. 날씨와 몸 컨디션 등등 수많은 핑계 때문이었다. 그랬던 경험이 살며시 고개를 들자, 이번 산행의 성공은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일단 시작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날들을 돌이켜보면 충분히 가능했음에도 이것저것 재고 따지다가 지레 겁먹고 시작조차 못한 일들이 많다. 군대 가기 전에 자전거로 강원도를 횡단해보고 싶었지만 험한 날씨와 약한 체력에 대한 걱정들로 날을 보내다가 결국 입대 날이 다가와 포기한 경험이 있다. 직장 입사 후 유도의 매력에 빠져 배워보려 했지만, 허리 통증과 바쁜 업무를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 도장을 등록하지 못했다. 이외에도 망설이다 시도조차 못한 경험은 셀 수 없이 많다.
반면에 한라산 등반처럼 일단 시작해서 더 많은 것을 배운 경험도 있다. 나는 해외여행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어 해외에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과 동기의 제안으로 충동적으로 지원한 해외 연수 프로그램을 계기로 유럽 배낭여행 떠날 수 있었다. 그때의 경험은 편협했던 내 시각을 넓혀주었고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그리고 과감성은 학점이 낮은 내가 직업을 찾는 것에도 도움이 되었다. 군 제대 후 막연하게 진로를 걱정하던 중 아는 형이 준비하는 시험을 무작정 따라 했고, 지금의 만족스러운 직장을 구할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을 되살려 나는 새로운 도전을 해보려고 한다. 바로 마라톤 하프 코스 도전이다. 아내와 나는 러닝을 좋아해서 예전에는 마라톤 10km 코스에 가끔 참가하곤 했다. 아이가 태어난 후에는 쉽지 않았지만 작년에 부모님께서 잠시 아이를 돌봐주시는 동안 10km 코스에 참가했었다. 오랜만에 맑은 날씨에 야외를 달리니 무척 기분이 좋았고, 언젠가 하프 코스에 도전하자는 의지를 나눴다. 물론 10km도 쉽지 않은 나에게 하프 마라톤은 막연한 목표일 뿐이었다. 사실 속으로는 여러 현실적인 이유로 하프 코스 참가는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더 컸다. 그런 내 생각을 몰랐던 아내는 며칠 전에 올해 하프 코스에 나가보자고 제안을 했고, 나는 이런저런 이유를 말하며 나중으로 미루고자 했다. 내 반대에도 아내의 참가 의지는 강했고, 한라산의 경험이 떠오른 나는 생각을 바꿔 일단 도전해 보기로 다짐했다.
다짐한 목표를 두고 주저하다 실행하지 못한 경험은 비단 나만의 사례는 아닐 것이다. 많은 이들이 당장 시작하기보다, 도전하면 안 될 이유를 찾는 것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 더 준비해야 한다는 철저함을 빙자한 주저함은 우리를 정체시킨다. 하고자 하는,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너무 많은 고민들로 시간을 흘려보내기보다 일단 시작해 보자. 정지해 있는 물체는 계속해서 정치해 있고, 운동하는 물체는 계속해서 운동하려 하는 물리학의 관성 법칙은 우리의 삶에도 적용된다. 첫걸음이 부여한 관성의 힘은 목표 지점으로 달려가게 해 준다. 언젠가 삶을 돌아볼 때 주저하다 시도조차 못한 기억 보다, 일단 시작하고 결승선을 향해 최선을 다해 달려간 날들이 더욱 만족스럽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