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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샘 Oct 24. 2021

저는 쌈닭이 아니라 표현할 줄 모르는 겁니다.

B급 교사 인생이지만 오늘도 살아남았습니다




지난 눈물의 출근길, 말없이 안아주던 짝꿍이 진심을 담은 한 마디를 해주었다.

(나는 남편 대산을 짝꿍이라 부른다)


‘혼자 다 감당하려고 하지 마.’


 그날 이후 나는 조금씩 노력했다. 

우선순위대로 일을 처리하려 했고, 적극적으로 도움 요청도 하고, 할 수 없는 일 들은 못 한다고 잘라 말하기 시작했다. 이번 글은 ‘나답게’ 살아낸 생존기라고 할 수 있겠다.





나를 돕는 건 바로 나!


 동시에 처리해야 할 일들에 파묻히기 시작하면서, ‘내가 먼저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해 낸 생존법은 나를 위한 시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2019년부터 자기 계발에 필(?)을 받은 나는 아침 시간을 더 늘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저는 새벽 4시에 일어날 거예요”


 새벽 모임 단톡방에서 6시 기상 인증을 하던 나는 5시로 앞당긴 상태였다. 눈물의 출근길 이후 나는 새벽 4시 기상을 선언했다. 이렇게 매일 글도 쓰고 (힘들 때 글을 쓰는 것이 나에겐 큰 힘이 되니까) 책 읽을 시간도 늘릴 참이었다. 1년 넘게 꾸준히 하던 미라클 모닝으로도 부족했다. 무엇보다 글을 쓰고 싶었고, 하고 싶은 공부도 할 수 있었다.


 35년간 올빼미형을 고집했던 내가 잠을 자는 것에 대한 마음을 비웠다. 그냥 눈을 감아서 잠시 쉰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일어나자마자 <미라클 모닝>에서 추천하는 6가지 루틴(명상, 선언, 시각화, 감사일기, 운동, 독서)과 함께 환경에 대한 공부나 작은 실천을 지속했다. 그래서 나의 모닝 루틴은 7가지이다.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일곱 빛깔 프로젝트이다. 습관달력을 만들고 지금도 2년째 매일 루틴을 실천하고 있다.


 아침을 의미 있게 시작하니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수 천 개가 넘는 방역물품들을 정리할 때에도, 학생들 모니터링을 하게 될 때에도, 열화상 카메라가 고장이 나고, 백신 접종을 하지 않겠다는 교직원을 상대할 때에도, 상대방 입장을 생각할 ‘여유’가 생긴 게 가장 큰 효과였다.



3교시에 찾아뵙겠습니다!


 학교마다 해야 할 일들은 비슷하게 주어지지만, 누가 하는지는 학교마다 다르다. 


 나의 경우에는 바로 위 학생부장, 교감 선생님께 보고를 하고 아래로는 담임이나 학생들을 챙겼다. 

하지만 교감 선생님과 교장 선생님 사이가 좋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대화가 불통인 두 고래 사이에서 작은 새우인 내 등만 터지는 일들이 생겨났다. 


 금요일 오전 8시 32분 공문을 확인하니, 교장선생님의 친절한(?) 지시사항이 함께 뜬다.

 “체온계 인증제품 조사 후에 보고하세요.” 


내 보고가 교장 선생님한테까지 올라가지 않으니, 교장 선생님은 나에게 자꾸 연락을 왔다. 아픈 학생들을 보건실에 두고(침대에서 요양을 하는 학생들) 교장실에 달려가 구두보고를 해야 하는 고구마처럼 답답한 순간들이 날 숨 막히게 했다. 이전 같으면 불평불만만 했겠지만 지금 해야 할 일들부터 우선순위를 정해 하기 시작했다.


 “교감, 교장선생님 3교시에 찾아뵙고 00 학생 건 회의를 해보면 어떨까요?”

 “교장 선생님, 제가 매일 오전 10시까지는 구글 시트로 담임들에게 학생 동태를 파악하고 보고 드리겠습니다.”


 내 수업 스케줄에 맞춰서 회의도 잡고, 내가 정리를 하기 시작하면서 밀린 업무들도 조금씩 해갈 수 있었다.



저는 쌈닭이 아닙니다.


 코로나의 ‘코’ 자만 붙어도 공문, 업무가 나에게 배정이 되었다. 기존에 내가 하던 업무와 수업에 비해 3~4배 정도 일이 늘어났고, 잘하던 일들도 계속 미뤄지는 느낌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도와달라는 이야기를 잘하지 못하는 나였다. 퇴근을 좀 더 늦게 해도 내가 할 일은 내가 해야지..라고 생각했다. 스피치 능력이라도 좋았다면 잘 표현을 해서 이 어려움을 이겨냈을 텐데... 라며 답답한 마음이 앞서 말빨(?)이 약한 나를 탓하기도 했다. 


 첫 혼돈의 시기에는 방역을 위한 소독제, 스프레이, 체온계도 없는 예산에 구걸하듯 구하러 다녔다. 교육청과 보건소 연락 보고, 학생 모니터링, 접종 관련된 일이나 보건교육, 교직원 연수 등이 감염병 업무라면, 나머지 기본적인 업무는 당연히 ‘알아서’ 잘 해내야 했다.


 평소보다 출근 시간을 더 앞당겨서 미리 준비를 하고, 몇 주가 지나니 역할 분담도 해야 했다. 나는 늘어난 아침시간에 <인간관계론>과 같은 책들을 읽으며 표현을 하는 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우리 학교는 동료 선생님들이 함께 도와주는 편이라 그나마 나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몸은 하나. 

감염병 매뉴얼대로 업무를 구분하고 교직원 연수를 해도, 증상이 있는 학생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일들이 자주 생겼다. 모르면 ‘보건샘’한테라는 생각의 몇몇 선생님들이 계셨던 것이다. 이번에는 크게 숨을 쉬어본다. 그리고 관리자를 찾아가 이야기를 했다.


 “교감, 교장 선생님! 저는 증상 있고 아픈 학생을 우선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동시다발적으로 저만 찾으시니, 제 몸이 열 개였으면 좋겠습니다.”


 나도 힘들다는 표현을 하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업무를 해갈 힘이 생기기 시작했다. 매뉴얼을 강조하면서 정작 교통정리를 못하는 관리자 분들께 찾아가서는 매뉴얼대로 역할 분담을 해야 한다고 계속 강조를 했다. 


 “저는 학생을 먼저 파악하고 돌보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매뉴얼대로 양육자분께 연락하는 건 우선 담임선생님께서 해주셔야 부모님 걱정도 덜어드릴 수 있고요. 일시적 관찰실에는 담당하는 선생님이 필요합니다. 제가 수업 중이나 다른 학생을 돌볼 때에는 학생을 살필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매뉴얼이 시시각각 바뀌고, 교육부-교육청-학교 매뉴얼이 내려오는 시간과 내용이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한 해 20번이 넘게 학교 매뉴얼을 수정했다.




 

 저는 쌈닭이 아니라 표현할 줄 몰랐던 겁니다.


 혼자 책임질 수 없는 일이기에, 부담이 컸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어떻게든 해보려 했었다. 하지만 학교는 작은 사회. 나 따위 일개 교사가 뭐라고 그 책임과 의무를 홀로 다하려는 착각을 한 것일까?


 나의 삶을 지탱할 일들을 만들고, 우선순위로 일을 하고, 싸우지 않고서도 역할분담을 해내면서 나는 나답게 삶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다. 물론 아직도 미숙하지만... 그 부족함 덕분에 좀 더 의미 있게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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