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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영 Apr 02. 2024

2. 사다리의 마지막 단

스티븐 킹


나는 이 소설을 읽기 전, 인터넷으로 미리 찾아보지도 않았고, 유년 시절, 혹은 소설에 빠져 살던 학생 때도 이 소설을 접하지 못했었다.

아마도 그것은, 나의 편독(偏讀) 때문이었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편독이 깨나 심한 편이었다(지금도 그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관심이 가는 작가가 생기며, 그 작가의 책만 찾아 읽었다.

그때의 나는,
1900년대 책을 주로 읽었다.

사실 어려워 이해하지 못했지만,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시작된 습관은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고치지 못했다. 주로 그 시대 책을 찾아 읽었고, 시대를 흘러 30년, 40년, 70년, 80년대까지 읽어 내렸다.

변명 같지만,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뒤늦게 소설 수업 과제로 접하게 되었다. 마지막 장을 넘기고 더 빨리 읽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몰랐다.

[사다리의 마지막 단]
그 제목에 코미디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마지막 단에 뭔가 유쾌한 이야기를 담고 있겠지 기대했기에 전혀 다른 흐름에 나는 책을 덮고도 우울에 빠져야 했다. 끝없는 우울 말이다. 빠지지 않기 위해 꽉 잡고 있던 끈을 놓쳐버린 것 같은 그 우울 말이다.

서간체 형식의 이 소설은 동생의 편지 한 통과 유년 시절 두 사람의 사다리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내었다.

이 소설의 첫 장면은 이랬다.

이야기의 시작은 동생 카트리나의 편지로부터였다. 두 번째 이사를 다녀 동생의 편지는 바로 받지 못했다. '주소 변경'이라는 잘못에 대한 추궁 같은 스티커가 붙어 있는 편지를 늦게 받게 되었다. 화자는 동생의 편지를 아버지에게 이야기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전화기를 들고 고민했다.


화자는 사료용 옥수수를 재배하며 가축을 기르는 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마을과는 떨어져 있어 쉽게 마을로 나가지도 못할 정도의 그런 곳에서 살았다.

지금은 미국 변호사가 되었지만,

어린 시절 하나밖에 없는 학교를 다니기 위해 먼짓길을 다녔고, 그 길에는 항상 동생 키티(카트리나)가 있었다. 그 후 도시로 이사를 갔고,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을 갔다. 그러나, 그 속에 동생은 함께하지 않았다.

시골에서 어린 시절, 건초더미가 있는 헛간은 좋은 놀이터였다. 부모님이 자리를 비운 사이 두 사람은 34단의 사다리를 오르는 놀이를 자주 하곤 했다. 그날 하필 사다리는 오래되어 낡았고, 고쳐야지 하던 부모님이 미처 그 사다리를 고치지 못했고, 11월 먼지를 가득 머금은 빛이 두 아이를 불렀고, 흐린 가을이었지만, 두 사람에게는 더없이 좋은 놀이였다. 사건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사다리를 오르는 놀이를 하던 키티와 오빠.
키티가 낡은 사다리에 올랐다. 두 사람은 낡았지만, 그 사다리가 자신들을 지켜 줄 거라 믿었다.

이것은 끔찍한 믿음이었다.

우리도 간혹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누군가 나를 지켜줄 거야.' 이런 생각 때문에 우리는 문제를 겪게 된다. 그것은 국가든 개인이든 마찬가지이다.
키티에게는 그런 믿음이 있었다. 오빠가 지켜줄 거라는, 사다리가 지켜줄 거라는....

사다리가 힘을 잃고 떨어진 것은 순식간이었고, 높이 올라갈수록 달콤함을 주던 공기가 삽시간에 식어 버린 것은 더 순식간이었다. 키티의 몸무게를 견디던 낡은 사다리는 삐걱거리다 떨어졌다. 오빠는 건초더미를 받쳐 떨어지는 키티를 살렸다.

그 후 두 사람은 다시는 사다리를 타지 않았다. 떨어짐은 그게 끝 같았지만, 끝이 아니었다.
오빠의 손에 들린 [콜걸 투신자살] 신문이 떨어짐의 끝이었다.

사다리 놀이를 끝낸 두 사람은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오빠는 대학을 가고, 변호사가 되었다.
키티는 미인대회를 나갔고, 조금 이른 결혼을 했고, 이혼을 했고, 그러는 중간중간 오빠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오빠는 바빴고, 시간이 맞지 않았다. 그리고, 키티는 보험회사 꼭대기에서 뛰어내렸다.

키티는 많은 날들 오빠를 기다렸다. 그 옛날 사다리에서 떨어지던 자신에게 건초더미를 던져주던 것처럼 자신을 구해 줄 거라는 믿음으로 기다렸다. 하지만, 어른이라는 시간이, 변해버린 환경이 동생에게 연락을 하는 행동을 미루게 했을 뿐이었다. 문제는 그것 하나였다.

지쳐버린 것은 동생 키티였다. 건초더미를 기다리다가 지쳐 시멘트 바닥인 줄 알면서도 키티는 몸을 던져 버렸는지도 몰랐다.


짧은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고, 마음이 무거웠다. 아니 우울했다. 내가 기대했던 이야기가 아니었다. 무거움과 우울감이 뭉쳐 나는 한동안 멍해졌었다. 아마도 그것은 동생을 먼저 보낸 같은 아픔을 가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날은 날씨마저 너무 좋았고, 노을은 산자락을 향해 갔고, 가을은 성큼 왔고, 그것은 사고였다. 순간은 다시 오지 못하는 길을 열었다.

이 소설의 키티가 항상 건초더미가 있을 거라고 믿었듯이 나에게도 그런 믿음이 있었던 적이 있었다. 건초더미가 있겠지, 내가 조금 아프게 떨어져도 나를 받쳐 줄 뭔가가 있겠지. 그러나, 돌이켜 생각하면(그렇게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건초더미는 없었다. 그냥 나는 있다고 믿는 거였다.

사람들은 상처를 받으면, 스스로 '괜찮아. 괜찮아.' 말하지만, 사실 괜찮은 것은 아니다.
상처를 받으면 약을 발라야 하는데 우리는 그러지 않는다. 누가 상처를 주어도 '그럴 수 있지.'
넘긴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것이다. 누구도 상처를 줄 자격 같은 건 없다. 어떤 이유라도 사람이 사람에게 상처 줄 수 없다. 혹 상처받는 다면, 꼭 약을 발라야 한다. 연고가 우리에게 가끔은 아주 좋은 치료제가 되기도 하기에 말이다.

그리고 상처주는 인간은 내 삶에서 치워야한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건초더미' 어렵겠지만 '건초더미'는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의 끝에 나는,
어떤 것이 키티의 삶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건초더미를 기다리며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키티가 할 수 있는 어쩌면 최선의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끔찍한 생각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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