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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Dec 09. 2021

이 작고 소중한 세계, 씨앗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버둥거린다. 
그 알은 새의 세계이다. 
알에서 빠져 나오려면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데미안> 중에서
                  


 시간을 이겨내는 고전의 가치는 읽어보아야만 알 수 있다. 정말 유명한 책이지만 나이가 꽤 들어서 읽은 <데미안>이었다. 그전부터 알고 있던 유명한 구절인 위의 글귀를 본문 속에서 읽어 내려가며 작품 속 '아브락사스'에 매료되어 며칠 동안은 <데미안>의 여파를 겪어야 했었다.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지만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새의 삶은 곧 우리 삶에 대한 비유이겠지만, 나에게는 이 구절이 씨앗에 대한 비유처럼 읽히기도 한다.





  어제는 꽃차 선생님을 뵈러 갔다. 올해 선생님 덕분에 꽃에 대해 많이 알게 되어 올해가 가기 전 얼굴을 뵙고 싶었다. 인사를 하고 싶어 간 자리였는데 이야기는 자연스레 꽃에 대한 대화로 번져가며 선생님이 모아놓은 씨앗을 구경하고 결국 만원에 12가지의 씨앗을 구매해 오는 자리가 되었다. 꽃 박사님이라 할 수 있는 선생님의 노하우가 대방출된 시간이었다.


 씨앗을 넣은 하얀 봉투는 약봉투인데 작고 가벼워서 씨앗을 넣기에 용이했다. 위를 접어서 밀봉하면 테이프로 붙였을 때보다 편하다는 설명이었다. 테이프를 붙이면 종이가 뜯겨 나간다니 말이다. "씨앗 모양이 다 다른 게 정말 신기하지. 키워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작은 씨앗이 커서 꽃까지 피어나는 과정을 지켜본다는 게 얼마나 신기하고 기쁜 일인지!" 선생님의 말씀은 내 생각과 1mm도 다르지 않았다.


 금낭화는 선생님께 몇 뿌리를 얻어다 심었었는데 잡초의 위력을 이기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었다. 종모양의 앙증맞은 꽃이 피는 금낭화를 내년에는 볼 수 있으리라. 할미꽃 씨앗에는 보드라운 털이 달렸다. 할미꽃 자체도 털꽃(?)이라서 이름답다 생각되는 꽃이다. 다알리아는 양수역 가는 길에 자주 볼 수 있는 꽃이었는데 주먹만 한 , 색색의 화려한 꽃이 핀다. 선생님께 받은 것은 미니 다알리아이다. 

   


 선생님께 들어 알게 된 옥잠화와 황금피라밋이다. 옥잠화는 하얗고 기다란 나팔 같이 생긴 꽃이 피고, 황금피라밋은 이름처럼 노란꽃이 피라미드 모양으로 줄기에서 위쪽까지 뻗어나가며 핀다. 끈끈이대나물은 길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꽃인데 진분홍꽃이 강렬한 꽃이다. 선생님께 몇 줄기 얻어서 심었었는데 여름에 잡초의 기세에 눌려 죽어버렸다. 끈끈이대나물의 씨앗은 깨소금보다도 훨씬 작은데, 이런 사이즈의 씨앗에서 몇십 센티의 식물이 자랄 수 있다는 것이 경이롭기만 하다.




 비누풀은 꽃과 잎에 물을 묻히면 비누처럼 사용할 수 있다는데, 반려동물을 목욕할 때 사용해도 된다고 해서 내년에 우리집 루이 목욕에 사용해볼까 한다. 손톱에 물들이는 봉숭아와 식물 콜라겐이라 불리는 금화규도 있다. 금화규는 꽃차로도 먹고, 팩으로도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콜라겐이 많다니까 피부 미용에 좋겠지. 벌써 기대된다!



 번식력이 좋은 구절초는 경사지나 석축 등에 심으면 좋겠고, 보라 홀릭이 된 나에게 보라꽃인 층층이꽃은 무조건 환영이다. 학명이 카렌듈라인 금잔화 씨앗은 어제 구한 씨앗 중에 가장 사이즈가 크다. 모양은 애벌레와 비슷하다.


 파란색은 한해살이, 붉은색은 여러해살이 이렇게 쓰라고 하셨는데 봉투에 적다 보니 검은색, 파란색, 붉은색이 섞여 버리긴 했다. 그래도 파종시기, 개화시기, 식물의 키, 꽃색 등 중요 정보는 열심히 적어놓았다. 개화시기를 모르면 언제 꽃이 피나 목이 빠져라 기다려야 하고(올해의 나처럼), 파종 시기를 놓쳐버리면 심어도 꽃을 보기 어렵다. 식물의 키를 알아야 꽃 심을 위치도 알맞게 선정할 수 있다.


 그리고 어제 알게 된 사실인데 여러해살이 식물은 원래 월동을 하는 식물이기 때문에 씨앗도 추운 시기를 보내는 것이 좋다고 한다. 4주 이상은 저온숙성기간이 있어야 한다니 다음 주쯤 마당에 파종을 하려고 한다. (그래서 봉투를 자세히 보면 지금 심을 것과 실내에서 모종으로 키운 다음 봄에 마당에 옮겨 심을 식물(옥잠화, 미니 다알리아)이 구분되어 있다.)



 나는 어제 12개의 작은 세계에 초대되었다. 이 작고 소중한 세계는 파괴되겠지만 나는 이 파괴를 통해 더 큰 세계, 더 향기로운 세계, 더 빛나는 세계를 만나게 될 것이다. 생사를 걸고 이 작은 세계를 파괴하며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씨앗, 그들이 품고 있는 용기와 생명력은 직접 만나본 자만이 알 수 있다.  


 그러니 마당이 아니더라도 작은 씨앗을 사서 화분에 심어 보면 어떨까. 씨앗 하나에 수많은 감정이 피어오르고 지는 자신과도 조우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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