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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햇살 Jul 18. 2024

곰보다 여우

양반들의 포커페이스

결혼과 함께 탯줄처럼 엮인 또 다른 가족

  '시댁'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결혼이라는 끈으로 묶여

서로 이해하고 신뢰하는 데 10년 정도 걸린 것 같다.




 나는 서울사람이고 성격이 밝고 매우 사교적이다.  '애굣덩어리' '여우' '공감여왕' 등 남들이 평가하는 긍정적인 내 모습이다. 반면 '욱'하는 성격과 한 번 아니다 싶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 '더러운 성질머리'를 가진 다중인격체.  그러다 보니 감정선이 예측 불가한  동해바다 같다. 나와는 달리 시댁 식구들은  너무 잔잔해 저절로 눈이 감기는 듯한 회색 빛 서해바다처럼 감정선 자체가 없는 사람들 같다.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좀처럼 표현도 표정도 없는 시댁식구들 때문에 나는 가끔 밤고구마 열개를 먹은 듯한 답답함을 느끼곤 했다.




첫아이를 낳고 시댁에 한 번씩 갈 때마다 너무 힘이 들어 젖몸살을 심하게 앓았다. 나이는 어렸지만  아이에게 모유가  좋다는 생각이 강해 모유수유를 했다.  모유수유를 하다 보니 몸이 피곤하고 힘들면 온몸에 열이 펄펄 나고 근육이 욱신거리며 고통에 시달릴 때가 종종 있다.   30년 전만 해도 시댁에 가려면 꼬불거리는 문경새재를 넘어가야 했기 때문에 길이 막히지 않아도 평균 8시간이 걸렸다. 명절 때는 24시간 꼬박 차를 타야 할 때도 많았으니 시댁 갈 때마다 젖몸살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했다. 그날도 시댁에 도착하니  아니나 다를까 열이 나고 온몸이 욱신거렸다.  시어머니는 막내 아가씨 방에 군불을 뜨끈뜨끈하게 지펴 우리를 맞이했다. 내 몸 상태를 알아차린 시댁 식구들은 따뜻한 아랫목에 내가  쉴 수 있도록 자리를 펴주었다. 오한까지 와서 덜덜 떨며 누워 있는데 시댁 식구들은 모조리 안방에 모여 웃고 떠들고 있는 게 아닌가!  순간 너무 섭섭하고 억울해서 베개가 다 젖도록 혼자 울었던 기억이 난다.  후에 들은 이야기로는 내가 아프니 푹 쉬라고 배려해 준 것이라고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섭섭했던 마음은 지울 수가 없다.

 


이해할 수 없는 것 중 또 하나는 식사 때이다. 결혼해서 지금까지 시댁에 내려가면 시어머니는 좀처럼 부엌에 들어오지 않는다. 음식은 내게  전적으로 맡기기 때문에 시댁에 한 번 갔다 올 때마다 요리 솜씨가 좋아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댁 음식은 최소한의 간만하고 음식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린다.

시어머니처럼은 못하지만 된장찌개, 김치찌개, 육개장, 어묵볶음, 멸치볶음, 잡채등은 맛있게 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모처럼 새 며느리가 내려와  음식을 하면   시아버지는 자랑이라도 하듯  지나가는 동네사람을 굳이 청해 밥을 대접하기 일쑤다.

있는 솜씨 없는 솜씨 발휘해 음식을 해 내면 시댁구들은 절대 맛있다는 티를 내지 않고 천천히 깨작이며 먹는다. 요리담당 자로써  별로 유쾌한 모습은 아니기에  처음엔 오해 아닌 오해를 했다.

'맛이 없나?' 긴장하며 눈치를 살피면 어느새 밥과 반찬은 싹 비워져 있다. 빈 그릇을 보고서야 '으음~ 오늘도 잘 해냈군!' 하며 안심한다. 

'역시 안동 양반들의 포커페이스란!'



여름에 시댁은 주로 토란대를 잘라 도매상에 판다.

지역 특성상 제사를 많이 지내니 토란대를 삶아 다양한 음식에 사용해 소비가 많다.  시아버님은  신시장 구시장 여러 도매상에 토란대를 납품해 주 수입을 얻는다. 토란대는 그냥 잘라 팔 때보다  잘게 잘라 말려서 팔면 몇 배의 가격을 받을 수 있다. 그렇게 하려면 일손이 더 많이 필요하다. 나는 주로 시댁에 가면 가사 일을 하지만 토란대 자르는 걸 돕기도 한다. 그때마다 시어른들은  나를  만류하며

"야, 야! 만지지 마래이, 손에 뻘겋게 물들면 사돈이 좋아하시겠노!" 하신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직도 나와는 거리감이 있으신 거다.'느끼며 내심 서운한 맘이 들곤 했다.



아이를 나을 때마다  공교롭게 친정 엄마가 맹장수술과 담석 수술을 하고 나와 같은 시기에 입원하게 되었다. 큰아이는 4월, 작은아이는 3월이 생일인데 그때는 농번기라 시어머니도 산후조리 해주시기에 힘든 때이다. 그래도 시어머니는 싫다거나 바쁘다는 말씀 없이 일주일씩 산후조리를 해주시고 가셨다. 제왕절개로 수술한 며느리가 가스 나오기 전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게 안타까워 며느리가 잠 들고나서야 복도 의자에 앉아 소리 없이 식사를 하시던 시어머니.  



"도련님, 여자친구 있다면서요?"

"네, 근데 형수는 여우 같은 사람이랑 곰 같은 사람 중에 누가 더 좋겠어요?"

시동생은 두 명의 신부 후보감 중에서 형수인 내가 좋다는 사람을 데려오겠다고 했다. 어린 생각에 내가 여우 같으니 반대인 곰 같은 사람이 낫겠다 싶어 "곰 같은 사람이요."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 와, 키가 매우 크네!"

"백화점에서 근무한다며?"

시동생이 데려온 신붓감은 키도 크고 늘씬했다.

뿐만 아니라 대구에 살고 있어 우리 시댁과 문화적인 차이도 나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시댁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데    그녀는 인사 왔을 때부터 고봉밥을 먹었다. 그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샘이나기도 했다.  시동생은 나와의 약속대로 수더분하고 서글서글한 성격을 가진 '곰'같은 여자와 결혼을 했다.



동서를 맞이하고 사위 둘을 맞이하고 할아버지 장례를 치르며 어느덧 10년이라 세월이 흘렀다. 아무리 애를 써도 늘 이방인 같던 맏며느리.

 지역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다는 이유로 좀처럼 섞일 수 없을 것만 같던 어느 가을날

 땅콩을 캐시던 시어머니가 한마디 하신다

"아무리 그래도 곰보다는 여우가 낫데이"

그날 나는 드디어 어머니의 며느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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