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다듬이질을 할 줄 몰랐다. 옷감에 대해 관심 없고, 배우지 못했다. 옷감은 옷을 이루는 것이고, 다듬이질은 원래 타고난 사람들만 하는 줄 알았다.
5년 전, 엄마는 다듬이질을 시작했다. 꿈에도 몰랐지만 하기로 했으니. 남이 하는 대로 이 옷감, 저 옷감 두드려 보았다. 날실과 씨실이 자리를 잡도록 두드려야 했다.
홍두깨는 없었다. 열 손가락이 대신 방망이가 되었다. 바쁘게 움직여, 옷의 주름을 펴야 했다. 얻어다 놓은 옷감을 손질하고 직접 펴야만 했다.
처음 두들겨 본 건 이불 홑청이고, 한때 무명과 명주도 두들겨 보았다.
이불 홑청은 에세이였고, 뻣뻣한 무명은 칼럼이었고, 윤기 나는 명주는 편지글이었다. 날실은 책에서 난 글이었고, 씨실은 손끝에서 나오는 글이었다. 둘이 자리를 잡아가려면 두드려야 했다. 키보드를 열심히 두드려야 했다.
천을 다듬이질을 하려면, 풀을 먹여야 한다.
인위적인 노력이다.
글을 다듬이질하려면, 풀을 먹여야 한다.
후천적인 노력이다. 글의 군더더기를 턴 후, 초안이 마를 때까지 주야장천 두드려야 한다.
눈으로 볼 수 있는 홍두깨는 .. 칼국수용 밀대가 아니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홍두깨는 - 정신을 두들기는 방망이였다. 작가 특유의 광택과 촉감을 살리고, 글에 '풀기'가 골고루 베어 들게 하는 - 도구였다.
에세이에는 감성이, 칼럼에는 이성이, 편지글에는 이것이 담겨 있었다.
정신이 담겨 있으니, 편지글이 가장 어려웠다. 혼자 두드리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마주 않아 다듬기도 물론이다.
편지글은 명주천처럼 손질이 어렵지만, 그만큼의 윤기와 온기를 담아내고 있다.
특히, 엄마의 유산 출간을 위한 편지는 더욱 더 그렇다.
드디어, 끝이 보인다.
6월 6일. 엄마만의 윤기와 온기로 다듬이질한 옷감이 '명주'로써의 매력을 발견하는 날입니다.
* 해 본적 없고, 가져본 적 없는 사물이나 행위가 글감이 되면, 해 본 것과 가져본 적 있는 것과 접목해 봅니다.
* 본 브런치북 '엄마가 쓰는 유리병편지'를 발행해오면서 '정신'을 깨우고, '하루의 질을 높이는 것이야말로 고귀한 예술( 주 1)'임을 배웠습니다.
* 전통문화인 다듬이질을 '글을 써온 과정'에 빗대어, 근황도 전합니다!!
* 독자가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 1> 구도자에게 보낸 편지, 헨리 데이비드 소로, 류시화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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