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년아아아, 술 가져와.”
상 위로 젓가락 던지는 소리가 크게 났다. 안주라고는 시어빠진 김치 보시기가 전부였다. 이미 서방의 곁으로 막걸리 병 몇개가 뒹굴었다. 큰 소리가 나자 방 한 켠 구석으로 아이들이 몰려갔다. 아직 어두워지려면 한참 남았는데, 점심에 먹기 시작한 술에 이 꼴이다. 박춘자는 저녁 농사를 지으러 갈 요령으로 머리에 두건을 질끈 맸다.
“야, 개년아 남편 말을 똥으로 들어?”
“니가 받아다 먹어. 왜 일하려는 사람한테 지랄이야?”
“지랄…. 옳아. 네 년이 좀 맞은 지 얼마 안 됐지?”
상이 뒤집어지고 방바닥으로 김칫국물이 마구 튀었다. 박춘자는 흠칫하면서도 내심 태연하게 굴어야 했다. 아직 눈깔이 돌지는 않아 보였다.
“은정아, 동생들 데리고 나가서 놀아.”
이제는 이런 모습이 아예 익숙해진 큰 딸아이가 막내 손을 잡고 밖으로 이끌었다. 단칸방 안에서 이런 서방과 살기는 참으로 힘들었다.
“야 이년아, 너 어제 윗멀에 사는 이택상하고 뭐라고 수군거렸냐?”
박춘자는 아 하고 안으로 탄성을 삼켰다. 역시나였다.
못 봤길 바랐건만 기어이 봤던 거구나. 결국 오늘은 갈 데까지 가겠구나.
박춘자는 가볍게 체념했다.
서방은 술을 먹지 않은 채로는 순하고 얌전했다. 제 자식 뿐만이 아니라 조카 아이들까지도 제법 살뜰하게 안아주고 살피곤 했다. 하지만 술을 마시면 안에 있던 울분이 쏟기 시작했다. 그의 안에는 박춘자를 향한 불신이 꾸불꾸불 뭉쳐있다. 그의 불신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박춘자는 이곳 출신이 아니었다. 이 지역에서 두시간 정도 차를 끌고 가야 가는 거리가 고향이었다. 거기서부터 여기까지 오기까지는 여러 사연이 있었다.
박춘자는 타고나길 피부가 거무스름했지만 윤기가 돌고 탄력이 있어 보였다. 코와 입술의 생김도 또렷하고 눈은 쌍꺼풀이 진하지 않았지만 눈매는 동그랗고 자체가 컸다. 더구나 국대접을 엎어놓은 젖퉁이는 가린다고 가려도 뭇사내의 눈길을 그대로 받고는 했다. 그게 문제였다. 별 짓도 안 했는데 동네에 흉흉한 소문이 늘 따라다녔다.
어느 여름, 근처에 물놀이 온 송경태와 친구들 무리의 눈길에 박춘자가 든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샌님같은 송경태와 몇 번 어울리다 우연히 잠자리로 이어진 이후, 혼담이 오갔다. 둘째로 자라 딱히 귀함을 받지 못하고 자란 차에 그래도 도청 소재지의 유지라고 불리는 집안에서 혼담이 건너온 건 나쁜 일이 아니었다. 물론 이복 집안의 태생이라는 결점은 있었으나, 본가를 생각하면 재산이 없지는 않겠다 싶었다. 더구나 송경태는 베트남 전 참전 용사라고도 했다.
그러나 시집을 오고 나서야 송경태가 베트남 전 참전으로 인한 이상한 증상으로 인해 술주정뱅이가 된 걸 알게 되었다. 이미 엎어진 물이었고 뒷걸음질쳐도 벽 밖에는 없었다. 술만 아니라면 송경태는 아파트를 짓는 곳이든, 불러 주는 곳은 어디든 가서 바지런하게 일했고, 살가웠다. 말수도 적었고 밥투정을 부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동네 사내들이 몇 번 말을 건네는 걸 본 이후로 종종 술을 찾기 시작했다. 술은 술로 끝나지 않았고 낮부터 매질을 시작하곤 했다.
“개년 내가 널 죽여버리고 그 새끼들도 다 죽여버릴 거야.”
우락부락한 손이 덥석 머리채를 휘어잡더니 바닥에 원을 그리듯 한 바퀴 돌렸다. 박춘자는 으아악 소리를 지르고 방바닥을 밀어내며 발버둥을 쳤다. 장판이 밀릴 만큼 센 힘이었지만 취한 송경태의 힘을 이기진 못했다. 박춘자는 어느새 방구석으로 떠밀렸다. 술에 절은 송경태는 바지춤을 내리기 시작했다. 절대 이기지 못할 순간이 다가옴에 박춘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박춘자의 얼굴 한쪽에 손바닥 자국이 심하게 남았다. 목도 졸렸던 탓에 목으로도 손가락 모양이 선연했다. 겉으로 봐서는 삐죽한 송경태에게 그런 힘이 나오는 걸 사람들은 믿기 힘들어했다. 처음에는 옷 안에 감춰졌던 맞은 자국들은 얼굴까지 올라오는 일이 잦아지고 나서야 동네 여자들은 수군거렸다.
그러길래, 아무한테나 방긋방긋 웃더라니. 서방이 눈이 돌지 안 돌겄어?
같은 여자끼리 어찌 그리 말하는가? 자네 서방이라고 다를 거 같어?
내가 뭘 어쨌다고 형님은 그러시오.
왜? 옥녀네 서방도 박춘자를 쳐다보고 그랬던감?
씨벌년이 자꾸 우리 서방한테 눈웃음을 흘리잖어요.
그래서 자네는 부황한 소리를 해대는 거시여?
박춘자는 그래서 대부분 낮에는 밭에 나가 일을 했고 밤이 되면 빨래터에 나갔다. 자식이 셋이나 된다. 아직 애들은 어렸고 혼자 먹여 살리기에는 힘이 부친다. 서방이라는 게 멀쩡한 날 벌어오는 수입은 적잖으니 매값이라 생각하고 사는 게 당연했다. 그저 누구에게도 함부로 꺼낼 수 없는 속내는 항상 방망이에 털어냈다.
그렇게 사흘에 한번은 맞고 살던 박춘자에게 서방의 동생이 영창에 들어가고 바람까지 폈다는 소문은 그리 고소할 수가 없었다.
관광회사를 꾸린다 했을 때 알아봤어야지. 그 집이 이곳 마을에 돌아올 때면 제 딸에 비해 예쁘지 않은 정순녀의 딸 둘은 늘 분홍색 공주 옷을 입은 채였다. 저는 고작 시장에서 몇 년은 입도록 큰 옷을 사서, 딸에게 입히고 무릎이나 팔꿈치가 해지면 천을 대 기워서 막내를 입혀야 했다.
똑같이 둘째 부인의 자식인데 유독 송준태는 첫째 부인의 식솔에게 대접을 받았고 제 서방은 무시를 당한다. 명절에 가도 송경태는 나무를 패는데 비해, 송준태는 집안의 종손인 맏이 곁에서 서류를 봤다.
누구는 멍청하고 싶어서 멍청하게 태어난 것이 아닌데. 씨부럴 세상. 그렇게 생색낼 때 다 알아봤지.
탕, 탕, 방망이를 내리쳤다. 고소한 소식을 들었음에도 생각하면 부아가 치밀었다. 정순녀의 친정 역시 이 마을에 있었다. 그 집 여편네 성질 머리가 고약한 것은 동네에 파다했다. 시어미조차 그 성질을 감당하지 못하고 앞에서는 꼬리를 내리는 일이 일쑤였다. 안 그래도 파르르 떠는 싸남배기에 사위가 바람이 났다는 소문이 돌자, 정순녀의 어미는 김춘덕의 집 앞을 지날 때마다 침을 뱉었다.
거기서 끝나면 좋을 일이었겠지만 문제는 김춘덕이 그 화풀이를 박춘자에게 해대는 게 문제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박춘자의 아이들에게 해댔다.
같은 마을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김춘덕은 아이들을 곧잘 불러댔다. 아이들은 할머니 집 마당에서 콩을 까거나 심부름을 했다. 그러다 못하면 싸리로 만든 대빗자루로 맞는 일이 허다했다.
정순녀의 둘째가 태어나고 다음 날, 박춘자의 아들이 태어난 것만 해도 그랬다. 그때는 아들이라고 당장에 달려와서는 ‘잘생긴 손주’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유난을 떨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때가 지나자 정순녀의 둘째가 점점 제 막내딸을 닮았다며 편애의 방향이 바뀌었다.
그나마 마음의 위안이라면 김춘덕이 정순녀의 큰 아이를 지나치게 싫어한다는 점이었다. 손녀지만 싫어했고 그 말 만으론 모자랄 만큼 깊이 미워했다. 외가의 성질 머리가 고약한 데다 허구한 날 금쪽같은 막내 아들 바가지를 긁어대고 사치를 좋아하고 낭비가 심한 며느리를 그대로 닮았다는 이유였다.
그야말로 정순녀와 그녀의 친정에 쌓인 원한을 어린 손녀에게 풀어내는 꼴이긴 했다. 박춘자는 아이가 혼날 때 절대 말리거나 끼어들지 않았다. 벼락같이 엄한 시어미를 따른다는 명목이었다.
되레 그 아이가 쥐어 박히거나 눈총을 받으면 박춘자는 한쪽에서 빙그레 웃음을 짓곤 했다. 나이가 같은 딸 아이가 그때마다 비교되었기 때문이다. 박춘자의 큰 딸 아이 은정이는 곧잘 밥을 앉히고 설거지를 했다. 그에 비해 도시 중심에 사는 정순녀의 딸 화분은 공부만 잘하고 순해빠졌지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 김춘덕은 늘 은정을 치켜세우며 화분을 구박했다.
박춘자는 그럴 때마다 제 집에 아이를 불러 좋아하는 김치 볶음을 잔뜩 해주고 밥을 퍼줬다. 자신의 위상이 보상 받는 기분이 들면 들수록 밥의 높이가 높았다. 아이들은 뭣도 모르고 큰 아비의 집이라고 좋아했는데, 마을에 아이들이 오면 꼭 하룻밤은 좁은 방에 재워 보내곤 했다.
송경태는 조카들을 예뻐했다. 송준태가 바로 아래 동생이어서인지 저는 더 바보 취급을 받는지도 모르고 제 동생을 퍽이나 자랑스러워했다. 그런 까닭에 송준태의 아이들을 유독 더 예뻐했다. 그래서 제 자식들에게는 주지도 않는 용돈을 얹어 주기도 했고 기분이 좋아져 술이 들어가도 그날은 절대 행패를 부리는 일이 없었다. 은정을 비롯한 아이들도 그 날만은 술 취해도 기분 좋은 아비덕에 즐거운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을 안쪽으로 이사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송경태의 주사는 말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조카 딸이 있는 앞에서 물건을 던졌다. 깜짝 놀란 아이가 경기를 일으킬 것처럼 떨어대는 것을 보고 박춘자는 혀를 찼다. 등짝을 때리면서 할머니께 가라고 소리를 지른 것도 그 이유였다.
그 후로 화분은 박춘자를 꺼려하기 시작했다. 묘하게 얕잡아 보는 시선이라고 박춘자는 느꼈다. 어린 것이 감히. 하는 생각이 들면 더욱 얄미워져서 어느 순간부터 할 말 안 할 말을 가리지 않게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