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화왕산 산행기
눈을 떴지만 몸이 찌뿌둥한 것이 따스한 이불의 포근함에 좀 더 안겨 있고 싶은 새벽이다.
새벽 4시 30분이면 매일 같이 일어나 운동하는 습관을 들인 지도 오래이건만 일교차가 큰 가을에 거치게 되는 일종의 심리적 통과의례이다.
오늘 경남 창녕에 있는 화왕산으로 가려면 30분 더 일찍 서둘러야 한다.
아내는 벌써 일어나서 도시락 준비에 몸이 바쁘다. 새벽의 30분은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너무 짧다.
나도 아내의 분주함에 동참해야 한다. 함께 갈 산행인데 혼자만 분주하면 좀 억울할 것 같다.
후딱 커피를 내렸다.
임무완수!
7시에 출발한 버스는 3시간 30분이 걸려서야 화왕산 주차장에 도착했다. 예상보다는 빨리 도착했다.
창녕하늘은 차가워진 방바닥에 깔린 희고 얇은 홑이불처럼 잔뜩 흐려있었다.
파란 하늘에 은빛으로 춤추는 억새들의 춤사위를 보고 싶어 신청한 산행인데... 오르는 동안 하늘이 맑아지길 기대한다.
산악회에 발을 들였던 2014년 10월 등산경력 두 달만인 등산초보시절 화왕산에 왔었다. 남아 있는 기억은 정상부근 너른 억새밭 풍경과 산성이 있었다는 것, 갈대와 억새의 차이를 알게 되었고, 억새태우기행사로 인해 큰 인명피해가 있었다는 것 정도이다.
오늘도 그때와 같은 코스인데도 그때의 기억이 잘 나지 않은 것은 등산 초보시절이라 다소 험한 코스에서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앞사람 꽁무니만 쫒았고, 중간중간 만났던 멋진 바위와 풍경은 기억을 떠나버렸다.
산행을 시작했다.
주차장에서 자하정을 거쳐 장군바위- 배바위 쪽 1코스를 택했다. 다른 코스에 비해 가파른 편이지만 정상까지의 도달하는 시간이 짧고, 암릉과 바위절벽이 어우러진 멋진 풍경을 즐길 수 있는 코스이다.
자하정까지 오르는 길 옆 자하계곡에는 가늘고 긴 소나무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키 큰 소나무가 이렇게 빼곡히 들어차 있는 곳은 본 적이 없다. 아니 본 기억이 없다. 봤어도 기억 못 할 수도 있다.
그런 나이가 된 것이니...
소나무에서 뿜어내는 솔향기를 맡으며 30여분 정도 오르니 조금 평평한 언덕에 자하정이 나왔다.
자하정!
이름이 고급스러워서 옛날 높으신 양반들이 창녕읍내가 잘 보이는 자리에 정자를 짓고 풍류를 즐겼을 법한 멋진 정자를 기대했는데 요즘 동네 공원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통나무정자이다. 살짝 실망스럽다.
그런데 정자에서 흐릿한 옛 기억을 만났다.
이쯤에서 창녕군 시내가 보였던 것이 기억 한편에 머물러 있었다.
반갑다 기억아!
자하정부터는 암릉구간이 이어진다. 바위가 잘게 부스러진 마사토 길이다. 미끄러질 수 있다. 바위가 많은 암릉구간은 언제나 조심해야 한다. 비가 오면 젖어서 미끄럽고, 건조한 날은 모래에 미끄러질 수 있다.
산을 오르면서 창녕군을 칭찬하고 싶어졌다.
다른 산들에 비해서 산행코스의 정비가 아주 잘 되어 있는 것이다. 위험한 구간마다 튼튼한 지지대와 로프로 등산객들의 안전을 보조해 주고 절벽 같은 위험한 구간에는 눈에 잘 뜨이는 위험표지판이 제대로 잘 갖추어져 있다. 자신의 고장을 찾아주는 방문객들을 위한 배려에 창녕군의 행정력이 돋보였다.
장군바위까지는 로프를 단단히 잡고, 크고 작은 바위를 무수히 딛고 올라서야 한다. 이렇게 힘들여서 바위를 올라서면 보상이 따라온다. 왼쪽 편에는 기암괴석이 보석처럼 박힌 채색화 같은 화려한 풍경, 오른쪽은 큰 병풍을 펼쳐 놓은 수묵화 같은 풍경이, 돌아서면 가을에 잘 익은 들녘을 풍요롭게 안고 있는 창녕시내의 풍경이 보인다. 힘들게 올라 선 자만이 받을 수 있는 보상이다.
한 무리의 등산객들이 산등성이 곳곳에 놓인 멋진 바위마다 자리를 잡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촬영 포인트인 모양이다. 위험표지판 박혀있지만 아랑곳없다.
제각기 어떻게든 SNS에 담아서 뽐낼 멋진 포즈를 잡느라 여간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니다.
마임연극의 한 장면 같이다. 보고 있으니 재미있다. 우리도 그들이 비워 놓은 공간에 재빨리 자리를 잡고 비슷한 포즈로 추억을 남겨 본다.
장군바위에 올랐다.
아까 보았던 그 무리의 사람들이 또다시 먼저 자리를 잡고, 창녕시내가 보이는 멋진 조망을 배경 삼아 연신 핸드폰의 셔터를 터치하고 있었다. 포즈가 정말 다양하고 멋지다. 다들 포즈 잡아주는 학원 다니나 보다. 하하
조망을 즐기려면 그 틈을 비집고 통과해야 했다. 역시 창녕시내와 주변 산들이 어우러져 시원하게 눈에 들어온다. 가을바람도 시원하고, 바람이 흐르는 창녕의 풍경도 시원하다. 여름산행 후 계곡에서 땀을 씻어내는 알탕보다도 더 시원했다. 여름계곡에서 물놀이를 너무 좋아하는 아내는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억새를 만났다.
이제 막 꽃을 터뜨린 억새꽃들이 산불감시탑 주변부터 번져나가고 있었다. 기대했던 대로 장관이다.
손가락을 펼친 모양의 화형산인 화왕산의 정상은 화산폭발로 만들어진 분화구산이라 한라산 백록담과 비슷한 모양이다. 지난 기억이 바람에 일렁이고 있는 억새들의 물결처럼 나를 흔들어 깨워준다.
마치 대학시절에 빨간 불이 켜진 사진반 암실에서 현상액이 담긴 픽서에 인화지를 담그고 천천히 흔들어주면 점점 또렷하게 드러나던 흑백사진처럼 기억이 되살아 나고 있다.
되살아난 기억의 2014년 보다 억새가 많고 보호가 잘 되어있다.
2009년에 억새 태우기 사고로 이후 10년이 지난 2019년부터 창녕군의 정책으로 억새복원사업과 등산로 정비 그리고 치유의 숲을 조성을 했다고 하니 올라오면서 칭찬하고 싶었던 것에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포수를 피해 달아나다 얼어붙어 바위가 되었다는 곰바위와 큰 물난리에 배를 묶어 놓아서 배바위라는 바위에서 잠시 놀며 밥자리를부터 찾았다.
집에서든 산에서든 밥은 함께 먹는 사람이 많을수록 더 맛있다. 장소가 좋으면 더 맛있다.
금강산도 식후경인데 화왕산도 식후경이지...
은빛 억새가 일렁 대는 널따란 헬기착륙장에서 점심을 먹으려 자리를 잡았다. 발이 빠른 젊은(?) 회원 서 넛이서 먼저 식사를 하는 옆으로 자리를 잡고 일행을 기다렸다. 올라오면서 형수를 한 번도 못 만났는데 많이 뒤처진 것은 아닌지... 다행히 자리를 펴자 말자 형수가 내려왔다. 거대한 밥상이 차려지고 각자 정성을 다해 만들어온 반찬들을 내어놓는다.
멸치호두볶음, 호박나물, 우엉쥐치나물, 계란말이, 잡채, 돼지고기간장조림, 풋고추, 등 등 아시안게임이 한창인 이때 집반찬 경연대회를 방불케 한다. 하나같이 금메달급 맛이다. 이번에는 한 눈 안 팔고 형수가 챙겨주는 돼지고기간장조림을 먹었다. 아~ 햄~보카다.
밥도 배부르게 먹었겠다. 본격적으로 억새를 즐겼다.
일행들이 바람에 춤추는 억새들 사이로 들어가서 억새와 손을 잡고 함께 리듬을 맞춘다. 그러면 나는 준비된 휴대폰 화면에 그 장면을 고스란히 캡처해서 저장해서 돌려줄 것이다. 시간이 지난 뒤 그들의 아름다운 한 때를 떠 올릴 불쏘시개를 만들어 놓는 작업이다.
억새물결을 따라 정상을 오르니 멀리 보이던 화왕산성이 다가온다. 성인 머리보다 좀 더 큰 돌들로 쌓아놓은 널따란 성벽이 매우 인상적이다. 알고 보니 드라마 "미스터선샤인"에서 억새가 핀 화왕산 분지와 돌성을 배경으로 주인공 애신이 사격연습을 하는 장면으로 나왔었다 한다. 산행하면서는 몰랐는데 듣고 보니 그 장면이 떠올랐다. 미스터선샤인과 애신의 절절했던 사랑이야기가 한순간에 리뷰된다.
역시 명장면은 명소에서 나온다. 산성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몇몇은 그 장면을 이미 알고 자리를 잡은 듯하다.
배가 잔뜩 부른 뒤의 정상까지의 발걸음은 숨 더 가쁘고 힘이 더 부친다. 헉헉대며 정상을 향해가는데 근심스러운 사람을 닮았다는 걱정바위가 있다.
표짓말에 걱정을 내려놓고 가란다. 티베트의 격언에 "걱정을 한다고 걱정이 없어진다면 걱정이 없겠네"라는 말이 있다. 걱정을 아예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내려놓을 것도 없잖은가?
"걱정하지 마라 90%는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책도 있다.
정상이다. 757m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산성과 분지를 가득 채우며 바람에 일렁이는 은빛 억새물결이 햇빛 좋은 날 너른 호수의 물결에 비친 윤슬 같다.
정상에는 정상석에서 기념촬영하는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기다리기 싫었다.
배경 한편에 정상석이 보이기만 하면 인증도 되고 기억을 떠올리는 데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인증컷이 등산을 시작했을 때에는 동기부여가 되었지만 요즘은 동기부여 자체가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다.
산에 가면 당연히 정상에 가는 것이고, 정상석으로 증명할 필요가 없다.
잠시 창녕시내를 바라보았다. 장군바위에서 본 풍경이나 별 다름없는 풍경이었다. 정상부근에 핀 구절초와 이름 모를 야생화를 감상하는 편이 더 나았다.
하산길은 3코스! 숲으로 형성된 다소 완만한 길이다. 화왕산은 억새와 소나무의 산이라 불러야 하겠다.
내려오는 길도 소나무가 빼곡한 숲길이다. 올라갈 때의 가팔랐던 암릉이 없으니 기억창고의 한 공간이 열었다. 그리고 오늘 본 기억들을 채워본다. 소나무가 빼곡히 서있던 계곡 옆길, 기대를 저버린 자하정, 가을에 익어가고 있던 창녕의 들녘, 부산에서 온 아지매들이 딛고 멋진 포즈를 연출하던 바위들, 곰 같지도 않은 곰바위, 산꼭대기에서 배를 묶었다는 말도 안 되는 배바위, 윤슬같이 빛나던 억새의 춤사위, 드라마 선샤인에서 고애신이 사격연습했던 산성과 걱정 안 해도 되는 걱정바위, 멋대가리 없는 화왕산 정상표지석, 정상 주변에 핀 야생화, 여덟 갈래로 나누어 자란 소나무...
기억의 공간이 다 채워질 즈음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버스에 도착했다. 내년에도 가을이 찾아오면 화왕산에서의 즐거웠던 기억을 다시 꺼내어볼 것이다.
그때까지 잘 있거라 화왕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