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망의 그날, 고대로는 대기 의자에 앉아 있었다. 태동 검사에 들어간 도다리를 기다리는 참이었다.
조금 뒤 한 외국인 여자가 요란스레 출입문을 밀며 안으로 들어섰다. 콰쾅! 문이 벽을 때릴 정도였다. 여자에게 일제히 시선이 집중되었다. 어쩔 수 없었다고, 잘 굽혀지지 않는 허리를 까딱이며 이곳저곳에 눈길을 보내는 만삭의 여자. 정작 그녀에게 쏟아진 시선은 이미 흩어진 뒤였다. 이곳은 산부인과. 다들 자기 신음하기 바빴다.
잔뜩 찌푸린 채 솟은 배를 두 손으로 받친 여자는 한눈에도 낳기 직전 같았다. 외국인 노동자 센터 부센터장 고대로는 쓰러지듯 자기 옆자리에 앉아 신음하는 만삭의 외국인 여자를 반복적으로 힐끔거렸다. 예사롭지 않은 등장 때부터. 도와드릴 게 있을까요, 라고 물으려는데 여자가 대뜸 그의 팔뚝을 붙잡았다.
"쟤송합니돠……"
여자의 미간이 실룩실룩했다.
"예…… 괜찮습니…… 혹시 남편분은……"
"으윽…… 수실라임니돠……"
여자는 한국어에 서툰 듯했다.
"아, 수실라. 남편은…… 남편은 어딨습니까?"
"네팔…… 와써엿……"
여자의 작은 목젖이 모르고 뜨거운 걸 삼켜버렸을 때처럼 꿀렁꿀렁했다.
"읍…… 네팔에서 오셨습니까?"
여자의 손아귀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윽…… 네팔…… 네팔 와써엿……"
"으윽…… 네에…… 팔…… 그런데 남편은 어딨을까요오……?"
알통을 짜내며 고대로는 물었다. 고통이 상당한지 그것을 이겨내려는 여자의 힘 또한 어마어마했다.
"으으윽…… 몰라…… 몰라써요!"
여자가 손톱을 세워 그의 팔뚝을 쥐어뜯었다.
"으으읍! 허즈밴드으으으……?"
열 살 때 성경책을 덮으며 이 세상 모든 책을 함께 덮어버린 고대로는 가까스로 허즈밴드라는 단어를 기억해 냈다.
"오! 베이비? 마이 베이비? 공장에…… 후아아…… 와써…… 와써엿……!"
남편이 공장에 있다는 건가. 네팔에 있다는 건가. 이곳 어딘가에 있다는 건가. 설마 어딨는지 모른다는 건가. 베이비라 함은…… 분명 아기가 아닌가? 아기는 또 어쨌다는 건가…… 고대로는 머릿속이 더욱 새하얘졌다. 이러다간 내 팔뚝이 곧 어떻게 될 것 같다, 고대로는 이것만 확실히 알았다. 한국어에 서툰 수실라가 본인 이름 다음으로 힘을 준 발음. 와써엿. 고대로는 그 부분에 재빨리 희망을 걸었다. 주차 한 번 하려면 건물 몇 바퀴 도는 건 예사고, 여기서 낳고 저기서 태어나는 와중에 일 꼬이면 한두 시간 대기는 기본인 곳이 여기 아닌가. 그는 일단 아내 먼저 올려 보냈을 거다. 어찌 되든 접수부터 하라고. 그래. 저 출입문을 열고 곧 그가 나타날 것이다. 아버지…… 주여…… 고대로는 초조하게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응? 고개를 돌리는 고대로의 시선에 휙 빨간빛이 스쳤다. 뭐지?고대로는 빛 쪽으로 고개를 되돌렸다. 빨갰다. 아주 새빨갰다. 그건, 여자의 미간에서 반짝이던 불그스름한 빈디의 빛이 아니었다. 고대로는 난생처음 뱉었다. 오 마이 갓! 기막히게도 빨간 것은 빛이 아니라 피였다. 여자에게서 흘러나온 핏물이 그들이 앉은 의자 아래에 흥건했고, 그의 바지로도 스미고 있었다. 고대로는 그제야 축축해져 오는 허벅다리를 느꼈다. 새빨간 핏방울이 의자 끝에 규칙적으로 매달렸다. 그것들이 차례차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것들의 파편이 고대로의 신발에 토옥 토옥 박혔다. 고대로는 난생처음 뱉었다. 지저스…… 여드름 피만 봐도 질색하는 그였다. 임신 및 출산 경험 0회에 그친 남성 고대로가 여느 산모보다 하이 톤으로 신음하며 소리쳤다.
"으아아악! 피! 피! 피! 사람 살려! 살려 살려!으아아하학!"
황급히 의료진이 투입되었다. 예정일을 한 달이나 앞뒀지만 수실라는 당장 제왕절개를 해야 했다. 아기도 산모도 위험한 상황이었다.
"남편분이신가요?"
의료진이 고대로를 다그쳤다.
"으으읍! 으으으으읍!"
수실라가 신음을 삼키며 고대로의 팔뚝을 끌어안았다.
"으으윽! 처…… 처음……"
고대로는 처음 뵙는 분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아아! 초산! 일단 산모 먼저 수술실로 옮기겠습니다! 동의서 작성해주세요! 어서요! 허리 업! 허리 업!"
수실라는 이동 침대에 실리는 순간에도 끌어안은 것을 놓지 않았다. 형형하던 미간은 땀으로 얼룩져 갔지만, 팔뚝으로 전해지는 초인적 힘은 오히려 강인해졌다. 고대로는 그쪽 팔이 마비되다시피 했다. 무감각해진 팔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쓰며 침대 바퀴가 굴러가는 대로 휘청휘청 끌려갔다.
"무섭슴니돠…… 무섭슴니……"
고대로의 목젖에 덜컥 뜨거운 기운이 끼쳤다. 선명하게 들려오는 수실라의 한마디가 날카로운 회전으로 고대로의 폐부를 파고들었다. 수실라가 정신을 잃었다. 그의 팔에 화르르 피가 돌았다.
창백한 수실라의 얼굴에 아내 도다리의 얼굴이 겹쳤다. 아내 역시 석 달 뒤면 아기를 낳아야 했다. 오래전 막 솟아오른 배가 순식간에 꺼져버렸을 때, 아내는 늘어진 뱃가죽을 쓸며 말하곤 했다. 추워. 고대로는 침대 난간 위로 떨궈진 수실라의 손을 감싸 쥐었다. 수술실 문이 열릴 때까지 그것을 놓지 않았다.
*
"똘라도 함께 왔어. 바쁜 거 다 아는데 뭐. 굳이 오지 마. 센터를 부탁해, 부센터장님. 알겠지? 굳이 오지 마. 진짜 오지 마. 진짜로 오지 마. 진짜 오면 안 돼. 알겠지? 진짜……"
"다 왔다."
고대로는 전화를 먼저 끊었다. 도다리는 먼저 끊는 법이 없었다.
다 왔다는 건 다 뻥이었다. 외근 중이던 고대로는 아내의 전화에 놀라 지금 막 핸들을 꺾었다. 태동 검사. 어젯밤에도, 오늘 아침에도 무리 없이 되새긴 네 글자를 잊은 줄도 모르게 잊어버렸다. 등신. 고대로는 자신을 윽박지르며 산부인과를 향해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도착했을 때 아내는 이미 검사 중이었다.
- 그 자리♡
똥색 칠이 벗겨지고 거스러미가 잔뜩 인, 앉으면 저절로 파란 휴지 빨간 휴지가 튀어나올 듯한 케케묵은 나무 의자. 그곳에 놓인 몇몇 쓰레기를 모아 쓰레기통에 버린 고대로는 비로소 의자에 몸을 기대며 아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저출산 시대에 산부인과 로비를 가득 메운 산모들은 서서 대기하며 부은 다리를 두드리면서도 이 의자엔 앉지 않았다. 2인용인데 한 명도 안 앉았다. 커피가 반쯤 남은 플라스틱 컵, 구겨진 종이컵, 빨대 꽂힌 우유곽, 음료수 캔 따위가 늘 사람 대신 앉았다. 다리에 경련이 잦아, 말벌 떼의 공격보다도 오래 서 있는 게 더 무서운 도다리는 별수 없이 이 의자에 앉아야 했다. 치워…… 도다리의 말에 고대로는 주섬주섬 쓰레기를 치웠다. 병원에 올 때마다 치웠다. 어느 날 고대로는 살짝 짜증이 났다. 아오…… 껌 붙인 거 누구야…… 또 있으면 안 되는데…… 고대로는 눈에 불을 켜고 보았다. 눈 두 개로는 안 되어, 온몸에 불을 켜고 보았다. 훗. 거스러미가 잦아들어 있었다. 배 속 아기가 커가는 만큼, 아내가 앉는 만큼, 의자엔 미세하게 윤이 났다. 나무 의자는 그들의 전용석이 되었다.
'병원은 아내와 함께 갈 것. 아내의 이름으로서도. 나의 이름으로서도. 우리는 그곳에 혼자 서 있지 말 것.'
아내 배 속에서 숨을 멈춘 아기를 떠나보낸 오래전 그날, 자신의 남은 삶 앞에 내건 남편의 다짐이었다. 차가운 수술대에 누워 안아보지 못한 아기를, 철딱서니 없는 남편을 찾았을 아내를 생각하면 고대로는 지금도 발가벗겨진 듯 괴로웠다. 세 시간에 걸쳐 스무 번 넘게 걸려 온 산부인과 측의 전화를 한 번도 받지 못했다. 조기 축구회 회원들과 잔디밭을 뒹구는 게 더없이 신났다. 장난스레 축구공을 넣어놓은 듯 뽈록한 아내 배를 떠올리면, 멋들어진 자살골 서너 번은 껌으로 넣었다. 이상해, 어제 같지 않아. 어젯밤, 아내가 다리를 주무르며 되뇌던 혼잣말을 해외 축구 경기를 보느라 흘려들었다. 다음 날 그 다리에 경련이 일어, 옥탑방을 나서다 계단에서 구른 아내는 배 속 아기를 잃었다. 고대로는 그날부로 조기 축구를 끊었다. 축구 자체를 끊을 순 없었다. 고대로는 오싹했다. 네가 축구를 끊으면 나는 너를 끊겠다고, 그 다리는 물론 작은 몸 곳곳에 깁스를 한 아내가 으름장을 놓았다. 자살골이 특기인 그는 자람 보육원의 인기 스트라이커였다.
*
남편 아닌 친구와 태동 검사를 마치고 나온 도다리는 황망했다. 기다리겠단 자리에 기다리겠단 사람이 없었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어디에 있든 남편이 지극히 신나 있기만을 바랐다.
도다리는 친구와 병원을 뒤졌다. 그러다 외간 산모의 수술실 앞에서 마침내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했다. 가슴을 쓸어내린 도다리는 가만히 핸드백을 벗어 끈을 감아쥐었다. 게다가 우는 건지, 익숙한 뒷모습은 바닥에 주저앉아 외간 남자를 부둥켜안고 어깨를 떨어댔다. 핸드백을 살살 돌리며, 도다리는 익숙한 등짝을 향해 점점 속도를 높여 걸었다. 동시에 두 남자의 물기 어린 대화가 선명해졌다. 한국어밖에 모르는 고대로와 한국어를 모르는 외간 남자는 용케도 대화 중이었다. 매섭게 돌아가는 핸드백을 피해 몸을 사리던 똘라가 재빨리 통역에 나서주었다. 외간 남자는 구내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다 말고 달려온 푸스빠람이었다. 메뉴는…… 또 청국장이었다. 배 속 아기가 달라졌음을 느끼고 병원으로 향할 때, 수실라는 식사 시간에만 연락이 되는 남편에게 미리 문자를 남겨두었다.
- 나 먼저 가, 베이비.
먼저 간다는 아내의 문자에 소스라친 푸스빠람의 한쪽은 작업화, 한쪽은 무좀 양말이었다. 무좀 양말이라는 이름이 무색했다. 그건 토시에 가까웠다. 일하다 뚫린 건지 달려오다 뚫린 건진 알 수 없었다. 시원하게 뚫린 하나의 구멍으로 드러난 발가락 네 개를 푸스빠람은 수줍게 꼼지락거렸다. 새끼발가락은 양말에 제대로 끼워져 있는 줄 알았는데 그건 공장에서 잃어버렸다고 했다. 내내 이렇게 달려왔으니, 나머지 신발 한쪽은 아마 일터 구내식당 문턱쯤에 흘렸을 거라고. 도다리는 핸드백을 도로 멨다.
모두가 숨죽인 이때, 갑자기 누군가가 울었다. 뭔가 맺힌 게 주렁주렁한 스산한 소리. 어깨를 맞대고 들썩이던 두 남편이 화들짝 서로를 놓았다. 모두의 시선이 소리로 집중되었다. 그 시선 안에, 모태 솔로 똘라가 있었다. 똘라가 엄마를 찾으며 울었다. 진정해, 진정해, 한잔하게, 한잔하게, 도다리는 서둘러 똘라를 다독였다. 한잔으론 가망 없다는 듯 똘라는 더욱 눈가를 문질렀다. 8차선 도로인 양 위아래로 쭉쭉 뻗은 똘라의 아이라인이 징검징검 사라져 갔다. 도다리는 갑자기 풋 웃음이 났다. 태동 검사 내내 꼼짝도 하지 않아 애를 태우던 배 속 아이가 뻥! 뻥! 발길질을 해댔다. 도다리는 아예 푸하하하 웃어버렸다. 두 남편을 번갈아 보며, 자발적 모태 솔로 똘라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사랑 그거, 나를 버리는 일이 아니었어. 내가 새로워지는 일이었어.
*
힘 조절에 실패해 병원 문을 부술 듯 열고 만 수실라는 빈자리부터 스캔했다. 시선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그녀에게 그걸 느끼고 있을 새는 없었다. 그만큼 급했다.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저쪽, 구석진 그곳에 웬일로 딱 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 누가 먼저 앉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한국 지하철에서 갈고닦은 실력으로 수실라는 그 나무 의자를 향해 몸을 날렸다. 꽉 잡아! 베이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