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도 안하는 백수인데 왜 피곤해?

자유는 달콤하지만, 선택은 때때로 버겁다

by naniverse

일을 그만두면 어떻게 살고 싶어?


많은 지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늘어지게 자고 싶어. 알람 꺼두고


회사를 더이상 다니지 않게 되면서 가장 좋았던 것은 알람이 없는 아침이었다.

매일 아침 ‘일어나야 하는데 제발 5분만,,’이라는 부탁을 내게 더이상 하지 않아도 됐다. 일어날까 말까 고민 없이 안방 깊이 들어오는 햇살을 온몸으로 맞고 있어도 되는 여유, 그러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 앉아 멍때리는 시간. 더이상 더디게 오는 주말을 기다리지 않아도 됐다. 매일매일이 주말이었으니까


사실 알람보다 더 좋았던 것은 출근해서 보기 싫은 사람들을 더이상 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꾸역꾸역 출근을 해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 회사를 그만두더라도 평생 만나며 살고 싶은 좋은 사람도 물론 많았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꽤 많은 불편한 사람들을 만나게 됐다. 어쩔 수 없이 웃어야만 했던 시간들, 속으로는 욕을 하면서도 친절하게 대해야 했던 많은 사람들. 스트레스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던, 그들과 거리를 둘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이었다.


나는 내 곁에 내가 보고싶은 사람들만 남기기로 결심했다.


3년동안 같이 일했던 팀장 겸 임원이 있었다.

일주일에 3번 이상 저녁식사를 같이 해야 했던 사람이다. 이유는 단순했다. 퇴근시간에 출발하면 너무 밀리니까. 1시간이면 갈 거리를 2시간에 걸려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 결정에는 함께 일하는 직원들의 저녁이 있는 삶따위는 고려되지 않았다. 저녁식사 뿐이던가, 그와의 식사자리는 늘 술이 함께 해야 했고, 술을 거절할 선택권도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 어쩌다 저녁자리를 거절하게 되면 최소 일주일 정도는 냉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승인을 해줘야 하는 업무에 대해서도 시간을 끄는 사람이었다. 거절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견디면 가능한 부분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라고 나를 설득했다. 거절이라는 자유의지조차 박탈당한 채 나의 저녁을 꼬박 3년 동안 그에게 바쳐야했다.


회사를 그만둔다는 나의 소식을 어디선가 들었는지 여러번 연락이 왔다. 아팠다는 이야기도 들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회사를 나온 후 지금까지 단 한번도 그분께 연락을 하지 않았다. 연락이 올 때면 시간을 한 번 확인하고 다시 연락드릴께요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는 연락하지 않았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야 드디어 내게도 거절의 자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는 내 인생에 남기고 싶은, 보고 싶은 사람이 아니었다.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는 자유, 하기 싫은 것들을 하지 않을 자유.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내 하루를 가득 채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일상은 꽤나 달콤했다. 언제나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었고, 때로는 거절로써 나의 선택권을 보장받았다. 억지로 해야 하는 것은 없어졌고, 다른 사람의 상황을 애써 봐줘야 하는 상황들도 사라져갔다.


하지만,

행복하기만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유로운 삶은 언젠가 부터 조금씩 균열이 갔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서 회사에 가야 하는 일상, 원하지 않아도 사람들과 어울려야 했던 저녁 자리. 나를 불편하게 했던 그 모든 것들이 내 일상에서 사라졌는데 묘하게 피곤했다. 그다지 하는 일도 없는 백수의 삶을 만끽하고 있는데, 나는 왜 회사를 다닐때와 마찬가지로 피곤하단 말인가?


모든 것을 내 자유의지로 할 수 있었지만, 모든 순간이 선택의 순간이었다.

몇시에 일어날 지, 언제 밥을 먹을 지, 집에서 해 먹을지 나가서 사 먹을지, 오늘은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지, 매일,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섰다. 일주일에 고작 이틀동안 선택앞에 놓여있던 나는 이제 일주일에 7일, 1년 365일 선택앞에 서게 됐다.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는 타인의 간섭 없이 오롯이 나의 선택들로 결정됐다.

자유를 가지면 모든 것을 가지게 될 줄 알았지만, 매 순간 내게 닥친 선택의 순간들은 묘하게 나의 에너지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백수의 삶은 결국 모든 선택의 결정권을 내가 가지게 된다는 의미였다.

수십년동안 남이 정해준 삶을 사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버린 탓이었을까? 누군가가 정해준 하루를 따라가는 게 싫었는데, 모든 걸 내가 정해야 하는 하루도 꽤나 힘든 일이었다.


자유란, 달콤하지만 생각보다 무겁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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