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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주 Aug 03. 2024

누구에게나 비밀 병기는 있다

미소 짓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긋하던 목소리가 화포처럼 거세졌다.

화살촉보다 날카롭고 알몸보다 적나라한

한 마디를 사자후처럼 내던진 순간

사람들의 입은 벌어지고

상황은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그래,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다.   



학창 시절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기싸움이 존재했지만 직장 생활은 그야말로 총성 없는 전쟁터와 같았다. 주요 권한을 사수하기 위해, 업무 부과를 피하기 위해, 필요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자를 견제하기 위해 거의 매일 크고 작은 전쟁이 벌어졌다.


전시 상태는 전쟁에 참여한 주체는 물론 이를 바라보는 주변인들에게도 긴장감을 안겨 주는 법이라 뒷목이 뻣뻣해지는 날이 많았지만 더 힘든 것은 전쟁의 실체와 결실이 모호하다는 점이었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그리는 직장 속 전쟁은 언제나 영웅과 빌런이 명확했고 권선징악에 입각한 속시원한 결말이 뒤따랐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실제 직장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상당수는 아군과 적군, 선인과 악인의 구별이 불명확했고 가끔은 승리와 패배조차 분간이 어려웠다. 어제의 아군이 적군이 되는 일, 어제의 적군이 아군이 되는 일이 왕왕 일어났고 선인과 악인의 경계가 희미해지기도 했으며 상처뿐인 승리나 실리를 챙긴 패배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결국 직장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대부분은 목적이 명확하고 전개가 논리적이라기보다는 수시로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 남으려는 인간의 본능적인 몸부림에 가까웠다.



목적의 당위성과 절차의 체계성을 중시하는 고지식한 성격 탓에 나는 할 수만 있다면 원색적인 이 전쟁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조용히 나의 할 일만을 수행하는 방관자가 되고 싶었다. 고속 승진과 높은 연봉에 대한 욕심이 크지 않았기에 이러한 나의 바람은 수월히 이뤄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직장 속 전쟁은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오래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연차가 쌓이고 지위가 올라가면서 나는 원치 않는 전쟁에 휘말리는 일이 잦아졌고, 리더가 된 이후에는 나는 물론 직원들의 생존까지 짊어지고 전쟁에 뛰어 들어야 하는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특히 최근 악질 상사의 등장 이후에는 전쟁의 빈도가 급격히 늘어나 일주일에도 두세 번씩 전시 체제에 돌입하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나는 어쩔 수 없이 전투력을 증강하고 투지를 끌어올릴 수 밖에 없었다. 문제는 내가 전투에 특화된 인간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직장 속 전쟁에서 승기를 잡는 유형은 크게 두 가지였다. 여우같이 눈치가 빠르고 임기응변에 능한 유형, 뱀같은 간사함으로 약점을 잡거나 총애를 이끌어 내는 유형.


얼핏 상상해보면 사자나 호랑이처럼 카리스마 넘치는 유형이 우세할 것 같지만 정작 현실에서는 여우나 뱀처럼 교묘하게 상황을 교란시키는 유형이 승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우나 뱀에 속하기는커녕 정반대의 성정을 가진 나는 상당히 오랜 기간 전쟁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부당한 일에 대해 정당한 절차를 통해 항의하면 묵살되기 일쑤였고 누가 봐도 불공정한 처사에 대해 조목조목 지적하면 협업 능력이 부족하다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담당하고 있는 조직에 대한 무분별하고 부적절한 대우에 확실한 논거로 꽉 찬 보고서까지 작성해 대응했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업무 능력과 대인 관계에 제법 자신이 있었던 나는 전쟁에 패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의기소침해졌다. 특히 나의 역량 부족으로 조직과 직원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잠조차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날이 늘어났다.


나를 아끼는 지인들은 휴직이나 이직을 권했지만 나는 이 전쟁에서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해볼 수 있는 것은 다 해보고 단 한 번, 아주 미미하게라도 악의적인 무리들에게 내상을 입히고 난 후 당당하게 떠나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앞선 글에서 언급했던 최악의 추억 상자를 열어 보았다. 그 곳에는 내가 벌였던 수많은 전투들과 그로 인한 상처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 때도 나는 실수와 실패를 참 많이 경험했구나 하는 자기 연민이 들 때쯤 얼마 전 넣어 두었던 경력기술서가 내 눈길을 끌었다. A4 2장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나의 경력들과 성과들을 보는 순간 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결국 지금까지 살아남아 이야기를 계속 써내려가고 있는 사람은 나를 괴롭혔던 적군들이 아니라 나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무엇보다 큰 승리라는 것을.



그리고 며칠 후 나는 이 글의 도입부에 적어내려간 것처럼 참았던 사자후를 내뱉었다. 평소에는 단정하고 예의가 바르지만 임계점이 넘어간 순간 누구보다 무섭게 돌변할 수 있는 사람이 나라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며, 이것이야말로 무수한 전쟁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강력한 비밀 병기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한 가지 재주는 있다.

여우나 뱀이 아니라도 우리는 직장에서 벌어지는 전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수없이 실패하고 낙담하기도 하겠지만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계속 성찰하고 자신만의 비밀 병기를 찾아다면, 그리고 그리하여 직장이라는 전쟁터에서 생존한다면 그것이 결국 승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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