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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주 Jul 03. 2024

나를 뛰어넘다

사랑은 용기와 힘을 낳는다.




이번 학기 내가 본 인생의 맛 중 가장 쓴 것은 '학력 차로 인한 미성취감'이다. 석사 1학기 생부터 박사 3학기 생까지 25명의 대학원생이 함께 모인 강의를 들었다. 질적연구에 대해 배우는 과목이었는데, 첫 시간부터 머리에 쥐가 나기 시작했다. 각종 연구 용어를 넣어 설명하시는 교수님의 말소리가 외계어처럼 들려왔기 때문이다.


질적연구에 대해 아는 것도 아무것도 없는데 정의를 생각해보거나, 질적연구 제목들을 보고 특징을 찾아보는 토론활동을 하면서 같은 조원들과의 학력격차를 많이 느꼈다. 특히 첫 번째 조는 '답정너'들의 모임이었기에 조금도 틀린 이야기를 하면 안 되는 분위기라 정말 속상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건 너무 당연한데 아예 틀릴 거면 말도 하지 말라는 식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는 박사과정생인 조원 때문에 기도도 진짜 많이 했다. 어떤 큰 뜻이 있는 게 아니면 제발 좀 조를 바꿔달라고 말이다.


감사하게도 그 이후에 만난 조원들은 정말 따스하고 경청을 잘해주는 사람들이어서 나는 서기를 자처했다. 그 온기가 좋았고 선배들에게 그냥 배우자는 마음가짐을 갖기로 했다. 하지만 역경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학습 내용'에 고난이 닥친 것이다. 자료 분석을 위해 '코딩'이라는 것을 조별로 하게 되었는데 잘 되지 않았다. 하필 우리 조에는 '질적 코딩'을 해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대부분의 수강생들이 같은 부분을 어려워하여 교수님께서 한 번 더 설명해 주셨지만 그것만으로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그다음 주, 다시 조별 활동 결과물을 나누는 시간이 있었는데 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6개의 조들 중 단 2개의 조만이 교수님이 원하시는 수준의 코딩에 성공한 것이다.


그 결과물을 보면서 질적 코딩이 더 어렵게 느껴졌다. 우리 조의 것과 너무나 수준 차이가 나는 분석자료를 보며 아무래도 이걸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마음이 들어 다 포기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기말과제로 소논문으로 제출해야 하고, 미리 인터뷰도, 전사도 다 해놓은 터라 맘 편히 갖다 버리기엔 아까운 상태....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주저앉을 것인가. 3주 정도 고민했다. 동생과 남편은 징징거리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너무 크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다독여줬다. 실컷 위로받고 나자 '가족들이 얼마나 나를 도와주고 있는데...'라는 생각이 들어 이번에는 넘어가 보자는 마음이 생겼다!


먼저 용기를 내어 대학원을 졸업하신 분들에게 소논문 쓰는 법을 여쭤봤다. 선배들은 이구동성으로 '소논문을 쓰기 위해서는 두 가지 종류의 논문을 찾아보는 것이 좋다. 첫째, 구성과 형식을 보기 위해 강의하시는 교수님의 논문을 찾아볼 것, 둘째, 내용면을 채우기 위해 연구 방식에 대한 논문을 찾아볼 것.'을 조언해 주셨다. 그 말씀에 따라 논문들을 찾아 다운로드해 두었다. 숙제를 반쯤은 다 한 것 같은 듬직함이 솟아났다.


하지만 아직도 질적 연구에 대해 잘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학교 도서관에 있는 교과 지정도서 코너에 가서 관련 도서를 눈에 띄는 대로 다 읽었다. 15권이 넘게 훑고 나니 이제까지 생소하던 단어들에게서 친숙함이 느껴졌다. 희한한 체험이었다.


코딩을 잘해서 논문을 잘 쓰고 싶어서 질적 코딩에 대해 인터넷 검색을 했다. 질적 코딩을 종이를 잘라가며 하시는 분의 블로그를 발견했고, 서울교대 교수님의 유튜브도 찾을 수 있었다. 매우 유용했다. 그 후, 강의 중 우리 교수님이 발표하게 하신 두 조의 코딩 작업물을 프린트하여 분석했다. 어떻게 하는지 조금씩 감이 생겼다.


드디어 전사작업을 해놓은 면담 자료를 마주할 용기가 나서 코딩을 시작했다. 편리함을 위해 구글 시트로 작업하기로 했다. 자료의 내용 중 의미 있다고 여겨지는 것을 그대로 옮겨 담은 1차 코딩, 그것들을 유사한 내용별로 묶어보는 2차 코딩, 묶은 것들에 이름을 붙이는 3차 코딩까지 끝냈다. 이후 3차 코딩에서 나온 문구들끼리 모아 1차로 범주화한 뒤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로 2차 범주화까지 마쳤다.


소논문 작성을 위해 교수님이 공지하신 양식대로 글을 써가면서도 '소논문은 생전 처음'이라 두렵고 떨렸다. 이렇게 쓰는 게 맞나 싶어 온갖 논문을 다 뒤져가며 따라 쓰고 고쳐쓰기를 반복했다. 시험공부 좀 해본 나로서도 이건 대체 어디까지를 해야 끝인 건가 싶을 정도로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심 대학원 입학 후 젤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삶에 닥치는 고난은 누구에게 어떻게 오더라도 쓰고 맵고 차갑고 아픈 법인 듯하다. 대입을 실패했다 여겨 학업을 놔버린 나는 대학생활을 성실히 하지 못했다. 남보기 부끄러워 임고는 떨어지기 싫어 공부한 것을 빼곤 정말 농땡이를 제대로 부리며 살았다.


지금 대학원에서 내가 처절하게 맛보는 '미성취감'은 어쩌면 미성숙함으로부터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대학에 들어가면서는 중고등학생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학습해야 하는데 그 과정을 놓쳤다가 다시 맞닥들인 것일지도.


왜 나는 지금에서야 나를 뛰어넘기로 한 걸까.

그전까지는 왜 하지 않았을까.


조금 전까지 찌푸렸던 포항의 하늘이 갰다. 카페에 도착했을 때 바다와 하늘은 같은 색으로 보였다. 뿌옇고 흐렸다. 해변이 보이는 자리에 앉아 글을 쓰다 밖을 보니 어느샌가 바다는 푸르게 빛나고 하늘엔 구름도 선명하게 보인다.


젊었던 나는 우울함으로 다른 이들의 생각과 마음을 읽을 수 없었다. 세상은 온통 검고 어두웠다. 하지만 지금 내 맘 속엔 밝고 강렬한 빛이 있다.


어두운 눈을 열어주고

너와 나를 더욱 선명하게 하며

새로운 나로 태어날 용기를 주는 빛!


그것은 사랑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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