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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미루이 Jun 25. 2024

그녀의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어요!

엘라 윌러 윌콕스 <고독의 리듬>을 읽고..










국내 처음 소개되는 <고독의 리듬>. 미국 여성 시인 엘라 윌러 윌콕스의 삶과 사랑에 대한 시 50여 편을 담은 책이다. 영화 <올드보이> 주인공 오대수의 방에 걸린 '제임스 앙소르'의 괴이한 작품 아래 적힌 문구로 알려진 <고독>이 실려 있다. 




웃어라, 그러면 세상이 너와 함께 웃는다.

울어라, 그러면 너 혼자 울게 된다. 

이 후줄근한 세상은 근심거리가 차고 넘치지

그래서 어디선가 즐거움을 빌려야 한다.

_<고독> 24p




그녀의 사랑 시들을 읽으며 새삼 나이 들었음을 실감한다. 어느새 결혼 15년 차, 사춘기에 접어드는 두 아이의 보호자로서 사랑은 더 이상 예전의 사랑이 아니다. 젊었을 적, 폭주기관차처럼 질주하는 사랑에 빠져 꿈같은 시간을 즐기다, 선로 끝이 끊어진 줄도 모르고 파국을 맞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줄 만큼, 아끼고 사랑하는 이가 평생의 원수이자 숙적으로 돌변하여 악다구니를 내뱉고 돌아설 때의 참혹함과 아이러니라니.. 

나 또한 증오와 미련에 사로잡혀, 마지막 정염의 불에 휩싸여 온갖 모진 말을 쏟아냈다. 끝없이 달릴 것만 같았던, 미친 사랑의 폭주는 화마에 삼켜져 활활 타올라 재가 된 이후에야 겨우 멈출 수 있었다. 




사랑을 바라는 기도를 했더니 그 염원이 이루어졌다

전율하는 몸과 마음과 생각을

정염의 불길이 휩쓸었고

그 자리에 상처만이 남았다_<기도의 응답> 74~75p




이후의 일은 떠올리기가 힘들 정도로 괴로운 나날이었다. 

사랑과 이별로 인해 가슴에 대못이 박힌다는 의미를 체감적 증상으로 깨달았다. 심장이 꿰뚫리는 것 같은, 숨쉬기 힘든 고통이 이어졌다. 지난날의 눈부시고 화사하고, 영광스러운 나날들이 부메랑처럼 돌아와 심장을 겨냥했다.

진정한 사랑을 이어가지 못했다는 좌절과 실망감. 그보다 앞서 연이 아니었음에도, 비극을 예감했음에도 끝까지 밀어붙인 어리석음과 집착에 대한 후회와 자책. 다시는 불같은 사랑에 빠지지 못하리라는 불안과 두려움이 온몸을 휘감았다.  




후회라는 이름의 유령이 있다.

비애와 비슷한 옷을 입었지만

얼굴은 더 아름답고 희미하다_<후회> 122p 




무력하고 공허한 나날에서 벗어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몇 번의 조심스러운 만남이 이어졌지만, 흐지부지 끝을 맺거나 실연의 아픔이 이어졌다. 이전 격정적인 사랑의 결말을 겪어봤기에 후유증은 그리 심하지 않았다. 마음을 비운 채 이번이 마지막이다, 다짐한 2009년 가을 어느 만남에서 평생의 인연을 만나는 행운을 누렸다. 


그간의 엇갈린 만남과 무수한 사랑의 시행착오, 실수가 헛되지는 않았구나. 하는 안도감과 행복이 선물처럼 주어졌다. 두 아이가 태어나고 성장하면서, 일상으로 굴러가는 결혼 생활이 겹겹 쌓이면서 우리는 사랑의 일부가 우정으로 치환되어 관계를 돈독히 유지케 함을 깨닫는다. 몇 번의 격랑이 우리를 덮쳤지만, 우리는 그 위기를 어떻든 넘겼고 삶은 그렇게 흘러갔다. 이제는 지난날의 상처가 아물어 희미해졌음을 느낀다. 하지만 날씨가 우중충하고 흐릿한 날이면, 인생과 사랑의 희로애락에 통달한 시인의 작품을 홀로 읽을 때면.. 가슴 한켠이 시려오곤 한다. 





아릿한 통증에 가슴 언저리를 둥그스레 쓰다듬는다. 가끔 만져질 때가 있다. 거듭 덧나고 아물어서 볼록 도드라진 흉터 자욱. 사라진 줄 알았던 유령이 다시 출몰하려 한다. 망각의 무덤 아래 묻힌 그녀가 다시 몸을 일으켜서는.. 뾰족한 손톱으로 내 심장의 가장 연약한 부위를 긁어대고 꼬집는다. 


이번엔 꽤 아프다. 엘라 윌러 윌콕스의 <고독의 리듬>은 숨기고픈, 은밀한 내 통점을 제대로 자극했다.  


지하에서 깨어난 유령은 음산하고 불규칙한 리듬에 맞추어 탭 댄스를 추었다. 머리를 산발한 채, 내 온몸을 더듬어 스텝을 밟는 그녀가 어서 잠들기를 고대했다. 반가운 마음이 살짝 감도는 건.. 실로 오랜만의 조우이기 때문일까. 난 결코 가볍지 않은 시집을 덮고는, 가슴을 어루만지며 심호흡을 반복했다.


어느새 눈이 감겼다. 꿈결에 들리는 아득한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었던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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